강론 말씀 (가나다순)/홍성남 신부님

용서 - 홍성남 신부님 ㅎ

김레지나 2011. 6. 15. 18:54

오늘 복음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 쉬운 분 계십니까?

나는 누구나 다 용서하고 산다고 자신하시는 분은 저하고 자리를 바꾸었으면 합니다.

미운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몇 년 전에 교우 한 분이 기도모임에 갔다와서 상담을 청하셨습니다.

그 기도모임에서 자기에게 상처준 사람을 용서하기 힘들다고 했더니

리더인 분이 말하기를 어째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느냐 주님이 너를 용서하셨는데

너는 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느냐고 무조건 용서하라고 몰아붙이더랍니다.

그런데 그 말이 맞는데도  왠지 마음이 영 불편하고 힘들어서 상담하러 온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주님이 여러분을 용서하셨으니 우리도 사람들을 다 용서하라고 누가 말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저라면 너는 그게 되냐 하고 반문할 것입니다.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가 어려운 것일까요?

용서하기 어려운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상대방이 나에게 입힌 마음의 상처가 클 때 용서가 어렵습니다.

마음의 상처는 다 똑같지 않습니다.

대중소 이렇게 크기가 다 다릅니다.

누가 나를 살짝 때린 것과 칼로 푸욱 찌른 것이 같을까요? 당연히 다르겠지요.

따라서 여러분이 누군가를 용서하기가 어려우시다면

우선 내가 입은 상처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상처의 크기가 큰 경우에는 너무 급하게 억지로 용서하려고 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그 상처가 아무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성급하게 용서하려다가는 자신의 마음을 다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그러십니다. 별로 큰 상처도 아닌데 용서가 안된다구요.

그것은 마음의 종기를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종기란 사이즈는 작지만 건드리면 어떻습니까? 상당히 아프지요.

사람의 마음에도 종기같은 것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터져야 하는데 하면서 차일피일하던 것이 곪고 곪아서 벌겋게 성했는데

누군가가 그것을 건드리면 참으로 아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 상대방을 어른으로 보는 한 용서는 없습니다.

왜 그런가?

나잇살 먹고도 저렇게 살아 하는 생각이 용서하고픈 마음을 다 없애 버린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수행이 덜 되면 마음이 어린아이 상태에서 크지 않습니다.

육신이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마음도 따라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기에

누군가가 나를 해코지하였다면 그 사람의 육신의 나이를 보지 말고 내적인 나이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렇구만 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쨌건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우리 마음에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인가요?

 

어느 수도원에서 수도자 두 사람이 서로 다퉈서 사이가 안 좋아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밥을 먹을 때도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지낼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마음이 힘들고 괴로워서 원장수사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하소연하기를 용서하고 싶은데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원장수사 말씀하시길 그래 그럼 용서하지 마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수도자가, 용서를 안 하니까 마음이 힘들어 죽을 지경입니다 하고 말하자

원장수사님 왈, 그래 그럼 용서해 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수도자가, 용서해주고 싶은데 안된다고요 하고 짜증을 냈습니다.

그랬더니 원장수사가 용서하지 않아서 힘든 게 니 맘이냐 아님 내 맘이냐 물었습니다.

제 맘이지요.

그럼 니 맘이 편해지려면 내가 용서를 해야 하냐 아님 니가 용서를 해야 하냐?

내가 용서해야 합니다.

알면서 왜 지랄이냐, 지랄이.

그래서 상처입은 수사가 원장수사를 용서하지 못해 홧병을 앓다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을 위해서도 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을 편안히 가지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용서의 영성을 이야기하셨던 것입니다.

 

도반 홍성남 마태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