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홍성남 신부님

사랑 - 홍성남 신부님

김레지나 2011. 6. 13. 21:24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신다고 하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이라는 것, 유행가 가사의 절반 이상이 사랑이라고 할 정도로 흔하게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란 말에 대하여 어느 정도는 포만감을 느끼기조차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주님은 입에 발린 소리로 하는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이라서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신앙생활 안에서의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같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까 합니다.


우선 사랑이 무엇인가 그 개념부터 살펴볼까요.

사랑이 무엇인가 물었더니 어떤 녀석이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하더군요.

여자친구에게 채인 지 얼마 안됐다나요.

그러나 사랑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종류가 몇 가지나 되는지 심리학자인 스탠버그가 분류한 사랑의 종류를 살펴보겠습니다.

길을 가다가 아주 예쁜 여자를 보고 첫눈에 뿅 갔습니다.

혹은 아주 잘 생긴 총각을 보고 마음이 무너져내렸습니다.

이런 사랑을 무엇이라고 하나요?

에로스라고 합니다.

에로틱하다느니 하는 말의 원어인 것이지요.

이 사랑은 이성간의 사랑을 말합니다.

에로스 때문에 인간은 결혼을 하고 종족보전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 우정을 영원히 간직하자 할 때의 것은 스트로게라고 합니다.

친구간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해지면 동성애가 되기도 하지요.

요즘 드라마의 삼각, 사각관계,

배우자가 있는데도 다른 사람의 배우자를 사랑한다고 난리치는 것.

루두스라고도 하고 불륜이라고 하기도 하지요.

이 루두스에 빠지면 사람의 이성은 마비가 되고 맙니다.

제가 보좌신부 때 어떤 사람이 전화를 했습니다.

신자가 아닌데 성당에서 결혼하고 싶다고...

야그를 듣고 보니 불륜...

그런데도 자기들은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성당 신부에게 축복받고 싶다고...

그 때는 제가 욕을 잘 못할 때여서 그냥 절에 가서 하시지요 한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루두스는 중독성이 강한 것인데 대개 인생의 사추기인 사십대에 잘 빠져드는 것입니다.

어느 한 사람에게 정신없이 빠져드는 것을 마니아라고 합니다.

이것이 좀 심해지면 스토커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지요.

스토커들도 종류가 다양하지요.

간이 큰 스토커들은 집 앞에서 죽치고 있습니다.

간이 작은 스토커들은 전화를 걸고서 아무 말 않습니다.

목소리라도 들을라고요.

사제관에는 주로 간이 작은 스토커들이 전화를 합니다.

보좌 때는 마음이 착해서 노래도 불러 주었는데 지금은 고래고래 욕을 하고 끊습니다.

마음 약한 스토커들은 보좌신부 전화를 애용하시기 바랍니다.

저한테 하면 상처받고 우울증 심해집니다.

명동 보좌신부 시절에는 다른 신부 스토커에게서 신부도 신부 나름이지 하는 소리를 듣고

상처받기도 했습니다.

여하간 신부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일인 이상의 스토커가 따라 다닙니다.

추기경님도 예외가 아니시지요.

연애하다가 결혼할 즈음에 현실적으로 따져서 사랑하려고 하는 것을 프레그마라고 합니다.

이 사람과 결혼하면 경제적으로 잘 살까 못 살까,

혹은 사모님 대접을 받을까 못 받을까 따지면서 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의 뜻에 따라서 사랑을 실천하려는 것은  아가페라고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과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이 아가페에 대한 것입니다.

아가페란 주님의 뜻을 따라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교우분들이 일반적으로 아는 아가페 사랑의 개념은 너무 수준이 높아서 도저히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수준을 스스로에게 요구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아가페적인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몇 가지 수칙을 알려드립니다.

모든 사람이 내가 주는 사랑을 반기는 것은 아니란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끔 나는 마음을 다해서 사랑을 주려고 하는데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속상해하는 분들을 봅니다.

그런 경우 사랑을 받는 분보다 주는 분에게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사랑은 주지 않는 편이 좋은데

내 감정에 빠져서 주려고 하는 것은 상대에게 식상함을 안겨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원하지도 않는데 주려는 것은 아가페가 아니라

상대의 관심을 끌려는 의존적인 태도인 것입니다.

둘째 사랑을 베푸는데 감정이 꼭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니란 점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가끔 사랑을 베풀려고 하는데 마음 안에서 사랑하는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고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책이 된다고 하시는데, 그런 경우 감정없는 사랑의 베품은 가식적인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희생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감정이 따라주면 좋겠지만 사실 감정이란 것에는 기만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에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아가페적인 사랑에는 힘의 소모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가페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쉽게 지칩니다.

몇 해 전 어떤 분이 상담을 청해 왔습니다.

자기가 갈 곳 없는 노인들을 모시고 사는데 처음에는 마음을 다하여 모셨지만 갈수록 짜증이 나서

마음이 괴롭다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보아도 마음이 편치 않고...

그래서 제가 그 분에게 물었습니다.

삼년을 봉사하시는 동안 휴가는 몇 번이나 가셨냐고요?

한 번도.

그러니까 지친 것이지요.

그것은 사랑의 실천이 아니라 미련곰퉁이같은 삶을 사신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과 몸에는 힘의 한계가 있어서 반드시 쉬어주어야 합니다.

중노동을 하면서 마음이 즐거울 리가 없는 것이지요.

이분뿐만이 아닙니다.

간병하다 보면 병자가 돌아가시길 바라는 마음이 들어서 죄책감을 느낀다고 하시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간병하는 일은 쉬 지치게 마련입니다.

때로 환자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조차 본인이 나빠서가 아니라 지쳤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므로

그럴 때에는 자책할 것이 아니라 쉬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만 사랑의 실천은 노동과도 같은 것입니다.

쉬지 않고 계속하다가는 지치게 마련이고, 자칫 자기 자신이 병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아가페적 사랑 역시

모자람도 지나침도 없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