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간 월요일>(2011. 3. 21. 월)(루카 6,36-38)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구약성경에도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계명과 율법이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길을 잃고 헤매는 너희 원수의 소나 나귀와 마주칠 경우,
너희는 그것을 임자에게 데려다 주어야 한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에 눌려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을 경우,
내버려 두지 말고 그와 함께 나귀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탈출 23,4-5)."
구약성경에 이런 율법이 있다는 것은
이웃 사랑의 계명이 예수님만의(그리스도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 이웃 사랑은 종교와 민족을 초월한 인류의 보편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이웃을 같은 동족 안에서의 이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인류 전체의 이웃으로 바로잡으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가 좋은 예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유대인들이 원수였지만,
그는 강도를 당하고 죽어가는 모습만을 보고 이웃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실천한 사랑은
이웃 사랑이면서 동시에 원수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사실상 하나의 계명입니다.)
지금 우리가 일본을 도와주어야 하는 것은
일본이기 때문이 아니라(바로 옆에 있는 이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니까 도와주어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우리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시일이 지나면 또다시 독도 문제나 역사 왜곡 문제로 다툴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지금은 도와주어야 할 때입니다.
너희가 어려울 때 우리가 도와주었으니까 앞으로는 좀 더 착해져라,
라고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말을 해서도 안 됩니다. 돕는 건, 그냥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3월 21일의 복음 말씀을 읽게 되면 뜻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주어라."
과거사에 대한 회개를 제대로 하지 않고
오히려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일을 묵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도와주어야 할 때입니다.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우기는 일을 용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도와주어야 할 때입니다.
'사랑'이란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하니까 도와주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어떤 조건도 단서도 달지 않고, 대가도 바라지 않습니다.
만일에 비슷한 재난을 북한이 당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사건을 먼저 사과하지 않으면 안 도와준다고 할 것인가?
일본을 도와주면서 아무 조건을 달지 않은 것처럼
북한도 그렇게 조건 없이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국가 간의 문제에서는
개인 간의 일보다도 더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일이 쉬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다시 시선을 자기 개인의 문제로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인을 위해서는 선뜻 사랑의 손길을 내밀면서,
어제 심각하게 다툰, 정말 꼴도 보기 싫은 이웃집은?
사사건건 미운 짓만 하고 있는 시누이는?
꾼 돈을 갚지 않아서 지금 나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그 사람은?
나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 준 그 사람은? 기타 등등...
지진 피해를 입은 일본인들을 도와주는 일에는 적극 동참하지만,
정말 꼴도 보기 싫은 옆집은 눈도 마주치기 싫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일본 돕기 성금을 내러 가는데, 미워하고 있는 사람과 마주쳤다,
그런데 그 사람도 일본 돕기 성금을 내는 것이 보인다,
그때 속으로, '흥, 일본 돕기는 무슨... 자기 처신이나 잘하지...'
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초등학생 때나 중학생 때까지는 친한 친구와 덜 친한 친구가 있는 정도였는데,
나이가 들면서 인간관계의 폭이 넓어지니까
그 인간관계가 굉장히 복잡해졌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 라고 하시는데,
실제 현실에서는 남에게 심판받기도 하고, 남에게 단죄받기도 합니다.
남을 심판하지 않는 문제를 고민하기도 전에
남에게 심판받고 있는 현실을 고민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용서가 안 된다고 고민할 때도 있지만,
용서를 받지 못해서 고민할 때도 많습니다.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용서할 일보다 용서받을 일이 더 늘어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자비를 베푼 일보다 자비와 은혜를 받은 일이 더 많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지금 이 나이에도 이런데, 좀 더 늙게 되면
온통 용서 청할 일과 은혜 갚을 일만 남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고 했는데... 뿌린 것이 없으면 거둘 것도 없는데...
용서를 뿌려야 용서를 받게 될 텐데...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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