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는 분별의 장소
시험과 유혹은 같은 광야에서 이뤄진다.
같은 광야에서이지만,
하느님 보살핌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시험을 치르는 이들은
하느님의 사람으로 단련되고,
고통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유혹에 빠지는 이들은 어둠의 자식이 된다.
같은 자리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있고,
사탄의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 좋은 예가 창세기에 나온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시험을 주시고,
사탄은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먹어야 하느님처럼 된다."고 유혹한다.
에덴동산에서 시험과 유혹이 각기 다른 주제로부터 온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준 시험은 계명이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은 따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죽는다."
이 계명은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서 준 계명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유일한 길로서 준 계명이다.
선악을 안다는 것은 모든 실재의 기원과 원칙을 소유한다는 의미이다.
곧 선악을 안다는 것은 만물의 전체성을 파악하면서 그것들을 소유하며 그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는 곧 하느님이 됨을 의미한다.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기에 선악을 알게 되면, 곧 하느님이 되면 인간되기를 그만둘 수밖에 없다. 인간의 실현은 이간의 길을 걸음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주신 이 계명은 곧 인간을 위해 주신 것이다.
생명의 충만함을 누리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주신 것이다.
이간이 인간의 길을 걷도록 하려는 것이 하느님 시험의 목적이라면,
사탄의 유혹은 정반대로 인간이 하느님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험과 유혹은 이렇게 같은 자리, 같은 광야에서 이루어진다.
같은 광야에서 인간에게 생명을 주고자 시험하시는 분이 하느님이라면,
파멸로 이끌고자 유혹하는 존재는 사탄이다.
그러니 광야에 선 인간은
하느님과 어둠의 세력이 주는 두 가지 상충된 가치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첫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과 뱀의 유혹 사이에서 그래야 했듯이 우리도 분별하여야 한다.
바른 분별을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에 근거해서 우리의 행위가 과연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마치 벽돌을 쌓는 일꾼이 벽돌을 곧게 쌓아올리기 위하여
잣대로 재어보는 것과 유사하다.
분별의 기준은 광야가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속성,
하느님께 우선순위를 두는 것에 있다.
사실 시험이나 유혹이 공통으로 건드리는 것은
우리의 우선순위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우리가 삶의 중심으로 무엇을 택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시험의 경우는 하느님께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요,
유혹의 경우는 어둠의 세력에 우선순위를 둔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주시는 시험은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것이기에 고통스러워도 내적 평화가 있고 내적 자유로움이 주어지지만, 악마가 주는 유혹은 우리를 파멸로 이끌기 위한 것이라 한순간 편할지는 몰라도 결국엔 절망에 빠지게 된다.
그러니 광야에 선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그 안에 참 평과와 자유가 있는지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내면에 평화가 있다면 비록 삶 자체가 고통스럽다 해도 그 영혼은 생의 비약을 향한 홀가분함을 느낄 것이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삶이 편할지는 몰라도
영혼은 불안 속에 서성거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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