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는 시험의 장소(2)
일상도의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일상도의 영성이다.
일상도의 영성을 살아갈 때 우리의 인생은 봄날 같지만 그렇지 못할 때 우리 삶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빨리 지치고 메말라 버릴 것이다.
우리 대다수는 일상도의 삶을 살지 못한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느라고 오늘, 지금이라는 현재를 온전히 살지 못한다.
우리 에너지의 상당 부분이 내일에 대한 걱정 근심으로 소모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도의 영성을 살아간다면 삶의 긴장과 고통도 견딜 만할 것이다.
주님껫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 (마태 6,34)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는 말씀은 오늘의 걱정만큼은 그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가 견뎌낼 수 있다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실상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정도의 고통만 허락하신다.
생각해 보자.
우리가 너무 힘들다고, 견딜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지금 이 순간의 걱정과 고통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지금은 존재치도 않는 일에 대한 것은 아닌지.
야훼 하느님은 오늘만을 살아가시는 '있는 자로서이다' 이시기에 이러한 분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도 '한 번에 한 순간씩만 살 수 있다.' 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우리는 월요일에는 오로지 월요일 일만 할 수 있고, 1시에 할 일은 1시에만 할 수 있으며 3시에 할 일은 3시에만 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은 한 우리는 일상도의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지시를 어기는 것이다.
인간은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할 수 있으며, 지금 이 순간만을 염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기만 한다면 쉽게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 하루만을 생각하면서 충실하게 살아갈 때 우리 삶의 무게는 그만큼 가벼워질 것이다.
평생을 어떻게 살까 생각하면 힘겨운 것도 오늘 하루만 견디어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견딜 만해진다.
오늘 하루를 사랑하며 살고, 분노하지 않고, 온유하게 살겠다고 결심하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서 어떤 이는 "하루만이라면 누구나 다 참을성 있고, 이타적이고, 순수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또 혹자는 "매일 그날로 끝을 맺자.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는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잊자.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않을 때 훨씬 유쾌하고 가볍게 새로운 날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한 예술가가 이탈리아의 어느 주교좌 성당에서 모자이크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작업을 하고 있던 그 예술가 옆에는 갖가지 색깔의 크고 작은 대리석 조각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성당을 구경하러 들어왔던 어떤 사람이 그 예술가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정말 굉장한 작업을 하고 계십니다. 이 큰 성당에다 모자이크를 하려면 여러 해가 걸릴 텐데...나 같으면 엄두도 못 냈을 것입니다. 언제 끝내지 하는 긴장감 때문에 시작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자 그 예술가는 조용히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아요. 저는 제가 하루에 할 수 있는 작업량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고 그 양만큼만 합니다. 매일 아침 성당에 오면 그날 할 일을 정하지요. 그러고 나서 그 일만을 합니다. 그 밖의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요. 그러노라면 제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 일은 끝나겠지요."
그렇다. 일상도(日常道)의 영성을 살아가는 우리는 매일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서 하루를 살 뿐이다.
고통스런 시간일수록, 광야의 어려운 시간을보낼 때일수록 일상도의 삶은 더 필요하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도와 선교활동을 한 캥인 여루 성악가 킴 윅스는 한국 여성이다.
그녀는 6.25 동란시 두 눈을 잃고 고아원에서 자라더 어느 미국인의 양녀가 된 사람이다. 윅스는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말로 일상도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내 손을 붙들고 인도해 주시는 분은 나에게 100미터 전방에 무엇이 있다고 일러주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그저 내 발 앞에 계단이 있다고만 알려줍니다. 그러면 나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계단에 오르기 위하여 발을 들기만 하면 됩니다. 믿을 만한 안내자에게 나를 맡기고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가다 보면 내가 가야 할 목적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우리는 10년, 20년 후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또 알아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진실하신 예수님께 우리의 발걸음을 맡기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따라가다 보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해 주신 저 영원한 하늘 나라에 무사히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도의 영성을 살아간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은 견딜 만하고, 그 고통은 우리 생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실존적 고통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광야에서 우리를 시험하신다.
그 시험은 우리 마음을 제련시키기 위한 것이다.
"내가 너희 찌꺼끼를 용광로에서 녹여내고 납들을 걷어내어 너를 순결케 하리라"
(이사 1,25)
그래서 시험한다는 말은 흔히 "정제시키다." "단련시키다"란 말로 바꾸어 쓰기도 한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내리는 시험은 한마디로 우리의 신앙을 단련시키려는 하느님의 교육이다. 집회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아들아! 네가 주님을 섬기려면 스스로 시련에 대비하여라.
네 마음을 곧게 가져 동요하지 말며 역경에 처해서 당황하지 말라.
어떠한 일이 닥칠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네 처지가 불쌍하게 되더라도 참고 견디어라.
실로 황금은 불속에서 단련되고 사람은 굴욕의 화덕에서 단련되어
하느님을 기쁘게 한다." (집회 2,1-5)
한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하느님이 광야에서 베푸시는 시련이 무조건 우리를 단련시키는 것은 아니다.
우리 마음의 자세에 따라서 그것이 단련시킬 수도 있고, 파괴시킬 수도 있다.
마치 옹기장이가 같은 진흙을 갖고 단단하고 잘생긴 옹기를 구워낼 수도 있지만
때로 숯덩이처럼 태워버릴 수도 있듯이 말이다.
우리가 시련 중에서 어떤 얼굴을 보느냐에 따라
광야가 우리를 단련시킬 수도 있고
파괴시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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