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송봉모 신부님

[스크랩] 2. 그래도 하느님은 용서하기를 원하신다

김레지나 2011. 1. 12. 23:21

2. 그래도 하느님은 용서하기를 원하신다

 

용서란 그토록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수많은 성인들이 용서를 강조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리고 필자 역시 용서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용서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기 때문이다.

(용서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용서해야 하는 이유 → 주님의 지상명령이기 때문)

용서란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히 알고 실행해야 할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외우며 용서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오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주님 앞에서 서로 용서하며 살겠다는 결심이 담겨 있는 이 기도는

그저 입으로만 암송하면 끝나는 기도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용서 사상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구약성서를 통해서 강조하신 용서 정신과 일치한다.

 

집회서 27,30-28,7에는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라. 그러면 네가 기도할 때에 네 죄도 사해질 것이다.

자기 이웃에 분노를 품고 있는 자가 어떻게 주님의 용서를 (느낄 수 있으랴!)

기대할 수 있으랴." 라는 내용의 말이 나온다.

하느님이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이웃을 향한 우리의 용서가 선행되어야

우리를 위해 주어진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용서에 관한 하느님 아버지와 구세주 예수의 가르침은 절대적이다.

'만약'이라든가, '하지만'이라든가 하는 핑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또 '상대가 준비가 되면'이란 식의 조건도 붙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하듯이,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용서요구는 무조건적이라 했는데, 하느님 자신도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시는가 하는 의문이 ‘주님의 기도’와 관계해서 나올 수 있다.

‘주님의 기도’에서 “오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 기도하는데, 이는 조건적인 것이 아닌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하느님도 우리를 용서할 수도 , 용서 안 할수도 있다면, 하느님의 용서는 조건적인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용서를 요구하시면서, 당신이 우리 인간을 용서하실 때에는 조건적이라면 불공평하다.

하지만 ‘주님의 기도’의 용서에 대한 요구를 조건적으로 보는 것은 틀린 해석이다.

 실상 ‘주님의 기도’에는 조건적 구문이 없다. ‘한다면’ 이라는 조건부가 없다. ‘같이’란 말만 있을 뿐이다. ‘같이’와 ‘한다면’은 다른 말이다. ‘

주님의 기도’에서 “오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의 “하오니”는 용서를 하겠다는 우리의 결심을 가리키는 말이다.

무조건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느님 사랑을 알고 있기에 우리도 무조건 용서하겠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러니 이 기도문을 좀 더 알기 쉽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오늘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용서하듯이,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게 하옵시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흔 일곱 번 용서하라고 명하였다.

일흔일곱 번씩 일곱 번이란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이다.

성서 숫자에서 일곱은 완전수 이다.

일흔일곱 번에다 곱하기 일곱을 하는 것이니, 이는 절대적인 완전수를 가리킨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무조건 용서하라고 하신 근거는

당신 자신이 우리를 무조건 용서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어느 수도원 성당 고해소 위에 달려있는 십자가의 예수님은

오른팔이 축 늘어져 있다.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오래전 이 고해소에 어느 신자가 와서 엄청난 죄를 고백하였는데,

이때 신부는 다른 죄는 다 용서할 수 잇어도 그 죄만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바로 그때 고해소 위에 걸려 있던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오른팔이 움직이면서

그 신자의 죄를 무조건 용서하라는 뜻으로 십자를 그었다고 한다.

그후부터 이 십자가의 예수님 오른팔이 늘어져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예수께서 우리에게 무조건 용서하라고 하시는 까닭은 무엇일까?

하느님 나라는 용서의 나라이고, 하느님 나라의 통치방식은 용서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점은 구원사업의 정점이었던 십자가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용서의 기도를 청한다.

예수께서 하신 기도,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루카 23,34)

 

여기서 '그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유다, 최고법정, 그리고 빌라도이다.

유다는 배반하여 스승 예수를 팔아넘겼고,

최고법정은 자국의 동포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식민 통치자인 빌라도에게 넘겨 배반하였고,

빌라도는 로마제국법에 따라 정의와 공평 속에서 예수의 무죄를 선언해야 했건만

폭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예수를 처형하도록 병사들에게 넘김으로써 배반하였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당신을 배반한 자들,

당신의 죽으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이들을 용서해 주기를 청하셨다.

하늘 나라의 왕이신 주님께서 하늘 나라에 들어가시기 전에 무조건적인 용서를 베푸시는 것이다.

 

용서의 왕이신 주님께서는 당신 오른편에 매달린 사형수에게도 용서를 베푸신다.

"오늘 네가 정년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루카 23,43)

살아 생전 좋은 일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사형수에게 예수께서는 무조건 용서를 베푸시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 보여주신 이 사건들은

하느님의 왕국이 어떤 곳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곧 하느님 나라는 용서의 나라요, 그 나라의 통치 방식은 용서인 것이다.

우리는 하늘 나라의 시민들이기에 용서의 나라 시민들이다.

그런데 용서의 왕국의 시민권자가 되어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용서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진정으로 하늘 나라 시민이기를 원한다면,

우리에게 잘못한 이웃과 원수들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요구하신 절대적 용서를 살아간 이들,

곧 용서의 왕을 그대로 본받아 살아간 이들은

우리가 용서를 하며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어준다.

 

아기 예수님의 거룩한 탄생을 기념하고 나서 바로 다음날 기억하는 성인은

스테파노 성인이다.

왜 하필 스테파노를 성탄 다음날 기념하는 것일까?

스테파노는 자기를 돌로 쳐죽이는 이들을 위하여 주님께 용서를 빌면서 순교하였다.

또 용서의 주님을 본받은 이가 있으니 토머스 모어이다.

그는 자기 목을 자르는 이를 위로하며 말하기를

"여보게, 날 죽이는 것을 언짢게 생각지 말게나. 우리 모두는 다 천국에서 기쁜 마음으로 만날 것이니."

 

이렇게 용서를 살아간 구체적 인물을 본받는 것은 용서하려는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저들도 용서했는데, 내가 용서 못 할 이유가 무엇인가?

 

언젠가 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읽었다.

살인죄를 저지르고도 10년 넘게 잡히지 않고 살아온 자가 자수하였다.

경찰은 그를 의심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자기 죄를 고백한 것이다.

그가 자수한 것은, 자기가 죽인 할머니의 마지막 기도 때문이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돈을 빼앗고 자기를 죽이려는 강도에게는 뭐라고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게만 "주님, 제가 지금 당신께 갑니다."라고 여러번 외쳤다고 했다.

할머니의 그 마지막 말이 그 살인자의 마음을 지난 10년간 괴롭히다가

끝내 자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날은 전문가가 존중받는 시대다.

하느님의 전문은 용서이다.

우리가 용서의 전문가인 하느님을 존중하고, 그분의 용서를 받으면서 살아가기 위하여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평화의 기도'를 하신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용서의 도구가 되어 살아가야 한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출처 : 퍼렁별나라공쥬님의 블로그
글쓴이 : 찬미예수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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