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 세상을 이분(二分)하는 태도 (2)
교회와 세상은 어떤 관계일까?
기도와 일은 조화될 수 있을까?
관상과 활동은 통합될 수 있을까?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이 하루 종일 정신없이 물건을 팔면서도 자신을 하느님께 드릴 수 있을까?
엄마가 온종일 칭얼거리는 아기를 돌보면서도 자신을 하느님께 드릴 수 있을까?
수능시험을 앞둔 학생이 공부에 몰두하면서도 자신을 하느님께 드릴 수 있을까?
의사가 진료실에 앉아 끊임없이 들어오는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자신을 하느님께 드릴 수 있을까?
정치인이 혼란 스런 나라 상황을 바로잡자 국정 운영에 전념하면서 자신을 하느님께 드릴 수 있을까?
우리는 흔히 이 세상을 영적인 자리와 세속의 자리로 구분한다.
하느님과 관련된 교회 활동이나 모임은 영적 세계에 속한다.
예를 들어 주일 미사 참례, 기도, 성경 읽기, 레지오, 구역모임 등은 거룩한 영적 세계의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활동이나 모임은 세속에 속한다.
말하자면 직장일, 아이 돌보기, 식사 준비, 영화 구경, 장보기, 술자리 등은 모두 세속적인 일에 속한다.
이분법적 구별
이러한 구분은 우리 행동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영적 세계에서는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엄숙한 태도를 취한다.
적어도 사람들은 성당 안에서 껌을 씹거나 다리를 꼬고 앉지 않는다.
하지만 세속 세계에는 하느님이 현존하지 않는다고 여겨
욕심에 따라 행동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술집이나 식당에 들어가면 몸가짐도 마음가짐도 느긋해진다.
달리 말하면 교회에서는 하느님을 기억하지만
세상에서는 하느님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산다는 얘기다.
주일에는 그리스도인이지만 평일에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셈이다.
극단적으로 세상을 이분해서 보는 좋은 예를 우리는 영화 '투캅스'에서 볼 수 있다.
주인공 안성기는 '투캅스'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긁어모으는 악덕 형사다. 가족은 대궐 같은 집에 살면서 자신은 청렴결백한 국민의 공복으로 보이기 위해
일곱 평짜리 서민 아파트에서 혼자 산다.
철저히 이중인격자요 위선자다.
그런데 이 악덕 형사가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다.
꼬박꼬박 십일조를 내는 것은 물론이요, 술집 주인과 포주들에게 돈을 많이 뜯어낸 날은 하느님의 축복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며 감사헌금을 바친다.
또 예배에 참석하면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회개하고 열정을 다해 하느님을 찬미한다.
한 번은 그가 수요 저녁예배에 참석했는데 목사님이 "하느님 아버지, 이 자리에는 죄 많은 당신의 아들딸들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구원받고자 모였습니다" 하고 회개를 인도하는 기도를 했다.
그러자 그는 "오, 아바지, 아바지"하고 응답한다.(그는 평안도 사람으로 나온다)
목사님이 "자신의 직위를 이용하여 남을 괴롭히는 자를 용서하소서" 하자
"오, 주여, 주여" 하고 응답한다.
계속해서 목사님이 "자기에게 맡긴 일은 소홀히하면서 돈을 탐내는 자를 용서하소서" 하자 또 "오, 아바지, 불쌍히 여기옵소서" 하면서 맞장구를 친다.
수요 저녁예배가 끝나자 그는 오랜만에 대궐 같은 집으로 간다.
그리고 "휴, 모처럼 하느님 앞에서 회개했더니 속이 다 후련하네." 하고 말하자
아내의 대답이 걸작이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요? 아무리 바빠도 늘 예배 참석하면 구원받고 축복 많이 받는다고 했잖아요."
주인공은 다음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업주들에게 돈을 착취하고, 아내는 남편이 가져오는 돈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알고 관리하느라 여념이 없다.
영화 '투캅스'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다분히 비판적이다.
이 나라에는 명색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불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네 명 중 한 명 꼴로 있지만, 그들이 오히려 이 나라를 더 어둡게 하고 부패시키고 있음을 과장해 비판한 것이다.
교회에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척하지만 교회 밖에서는 신자가 아닌 사람들보다 더 탐욕스럽고 더 타락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모습을 비꼬아 비판한 것이다.
(영화 투캅스가 꼬집고 있는 대상은 둘이다. 하나는 경찰의 부패한 모습이요,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의 위선적인 모습이다. 물론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모든 경찰이 비리를 저지르지 않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위선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언급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이분해서 대할 때 세상 한복판에서 하느님과 함께할 수 없음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이분법적이고 바리사이적인 태도
영화 '투캅스'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양분해서 대할 때의 속물적인 모습을 과장해서 표현한다. 이른바 바리사이적 모습이다.
이 세상을 영과 속으로 구분하면서, 세속은 거룩하지 않기에 철저히 멀리하는 태도다.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이나 예수님이 들어가지 않은 작품은, 그것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세속적인 것으로 취급해 버린다.
음악도 성가만 듣고 부른다. 다른 노래는 거룩한 노래가 아니라고 생각해 듣지도 부르지도 않는다. 대중가요 중에도 우리의 정서를 순화시키고 어루만져 주는 좋은 노래가 많이 있지만 하느님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여 듣지도 않는다.
장영희님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에 이런 글이 있다.
유 선생은 목포 어느 나이트 클럽에서 트럼펫 연주를 한다.
그는 청소년 시절부터 절도, 강간 등 온갖 범죄를 저질러 10여년간 감옥을 들락거린 사람이다. 그가 아홉번째 감옥에 후송될 때 일이다.
그는 수갑을 찬 채 경찰차 뒷자석에 앉아 있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그는 차창 밖으로 앞으로 몇 년 동안 보지 못할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을 바라보았다.
그때 마침 라디오에서 '눈물로 쓴 편지'가 흘러나왔다.
"눈물로 쓴 편지는 읽을 수가 없어요. 눈물은 보이지 않으니까요. 눈물로 쓴 편지는 고칠 수가 없어요.."
순간 애잔한 그 노래가 그의 영혼을 흔들었다.
마치 하느님의 계시처럼 자신이 너무나 삶을 낭비하고 있다는 회한의 눈물이 쏟아졌다.
후송차에서 내릴 때 그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다.
나중에 그는 모범수가 되어 각종 갱생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여러 가지 악기를 배웠다.
지금 그는 훌륭한 가장으로서 쉬는 날이면 아들과 함께 양로원이나 고아원을 찾아 다니며 연주회를 가진다. 유 선생은 이렇게 고백한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는 꿈에도 모르겠지만, 그 노래는 내 영혼의 구원자였다. 그 노래를 듣지 못했다면 아마 나는 아직 감옥에 있거나 아니면 이 세상에 해만 끼치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바리사이처럼 철저히 거룩한 신앙생활을 고집하는 이들은 대중가요는 물론 가곡과 고전음악까지도 세속 음악이라 하여 멀리할 뿐 아니라 영화도 아무 영화나 보지 않는다.
'십계'나 '나자렛 예수'처럼 신앙에 관한 영화만 본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작품성이 뛰어나고 감동을 준다고 해도
하느님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보지 않는다.
특히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영화는 뉴 에이지 영화라고 기피한다.
하지만 유다인 스필버그 감독은 유다인 어머니 밑에서 신앙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만든 영화를 보면 하나같이 하느님의 본질과 영역을 다룬다.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ET'의 핵심 주제는 사랑이다.
죽은 ET를 소년이 손으로 만지며 사랑한다고 고백하자 죽은 ET가 살아난다.
사랑보다 더 큰 생명, 더 위대한 힘은 없다는 진리를 선포한 것이다.
또 '쥐라기 공원'에서는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역시 그의 작품인 '쉰들러 리스트'에서 주인공 쉰들러는 단 한번도 하느님을 부르지 않지만 하느님 때문에 유다인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성당에 들어가 십자가를 만진다.
이 행위는 그의 행위가 단순히 인도주의적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단순히 어떤 작품에서 하느님이란 말이 나오니까 좋은 것이고, 신앙에 대한 말이 나오지 않으니까 봐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너무나 미숙한 생각이다.
이 말은 형편없는 작품이라도 하느님이나 예수님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면 훌륭한 작품으로 취급하겠다는 말이다.
이분법적 태도는 비성경적, 비교회적이다.
세상을 영과 속으로 양분해서 보는 것은 잘못된 태도다.
그러한 태도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바오로 사도는 무엇이라고 했는가?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1코린 10,31)
바오로 사도의 이와 같은 행위는 우리가 흔히 세속적이라 여기는 먹고 마시는 일이었다. 그는 세상을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바오로 사도한테는 먹고 마시는 것이 모두 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또한 세상을 양분해서 보는 태도는 교회 가르침이 아니다.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이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이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것을 권고했다.
"평신도들은 일상 생활의 현세 임무를 올바로 이행하면서도 그리스도와 이루는 일치와 자기 삶을 분리시키지 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기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이 일치 안에서 성장하여야 한다."
'강론 말씀 (가나다순) > 송봉모 신부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그분과 함께하기 위해 붙들어야 할 것들 (1) (0) | 2011.01.12 |
---|---|
[스크랩] 세상 한 복판에서 그분과 함께 2.들어가는 말 - 세상을 이분하는 태도2 (0) | 2011.01.12 |
하느님은 부엌의 그릇 속에서 행동하신다. (0) | 2011.01.12 |
시간을 잘 쓰십시오. (0) | 2011.01.12 |
나는 있는 자로서 이다 (I Am) (0) | 2010.10.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