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고뇌는 바로 인간 전반의 고뇌요,
따라서 우리 자신의 고뇌이기도 하다.
욥은 큰 소리로 하느님을 부르지만
그분은 아무런 대답도 않으시고 침묵을 지키신다.
욥은 오직 그분을 직접 마주 대하여
그분의 해명을 요구하고 싶은 한 가지 염원만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가망 없다는 것,
하느님은 인간적 이해를 훨씬 벗어나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욥이 하느님께로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는
하느님의 이 불가해성(不可解性)이
본래 그의 육신의 괴로움을 더욱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더 큰 고통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부재를 느낀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
오히려 그분의 침묵을 체험한다는 점에서 욥은 오늘날 우리와 비슷하다.
인간을 외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큰 소리를 지르려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신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하느님과 대화를 하지 못하고
독백만 하게 된다.
그리고 이 독백은
한번도 하느님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고
또 그분을 움직여 어떤 반응을 보이게 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아예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어디 계신지 알기만 하면,
당장에 찾아가서
나의 정당함을 진술하겠네.
변증할 말도 궁하지는 않으련만.
그가 무슨 말로 답변하실지를 꼭 알아야겠기에
그 하시는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어야겠네." (욥기 23,3-5)
욥은 그 시련의 끝에 가서야
비로소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물음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만약 하느님이 매번 변명을 해야 한다면
하느님이 아닐 것이다.
성경은 가까이 계실 뿐아니라
멀리 계시기도 하고,
말씀을 하실뿐 아니라
침묵을 지키시기도 하고,
자신을 드러내실 뿐 아니라
자신을 숨기시기도 하는....그런 하느님을 알고 있다.
- 헤르버트 하크-
한동안 글을 쓸 수 없었습니다.
너무도 가슴 아픈 일들이 많았기에..
욥처럼 착한 지인들이 왜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지.....
고난은 절망이 아니라 돌아가는 길이라지만,
그 돌아가는 길이 끝이 보이지않으니..
하지만 이 고난은 하느님의 나라를
잘 받아들일 준비를 시키고,
또 "하느님의 일"과 "하느님의 영광" 및
"성자의 영광"을 드러나게 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왜 착한 그들이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지를...
출처 :회복의 시간 Hora Recreationis 원문보기▶ 글쓴이 : 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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