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5주간 금요일 - 십자가의 가난과 포용력의 관계
어느 날 한분의 신부님과 아침식사를 함께 하면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어떤 원로신부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처음엔 그 분의 결단력과 성품에 대해 좋은 평을 서로 늘어놓았습니다. 그 분은 정말 가난하게 사시고 교회 정신에 맞게 성인처럼 사시는 분입니다. 개인적인 삶으로는 누구도 쫓아오지 못할 정도로 열심히 사셨습니다.
그러다가 단점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포용력의 부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함께 식사하던 신부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분은 실패한 경험도 없고 당신이 완벽하셔서 다른 사제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수긍이 가는 말이다 싶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모습이 저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제가 사는 삶이 모범이라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살도록 권유하고 또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안 될까?’라는 생각을 많이 해 왔습니다. 이는 아마 나와 같은 수준의 사람을 만들어서 나를 이해해주는 누군가를 갖기를 원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저도 같은 사제들을 보면서 많이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엔 그런 모습들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어찌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냥 내버려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사제가 목자로서 신자들을 잘 이끌면 되지.’라고 생각하여 사제들보다는 신자들에게 먼저 신경을 쓰며 살게 되었습니다. 사실 사제들보다 신자들이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중에 그 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니 저도 혼자서는 잘 살지만 함께 받아들이며 사랑하는 형제적인 모습을 이루는 것에는 많이 부족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최후의 만찬 때에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은 모두가 성인들이 아니었습니다. 부족한 사람들도 있었고 좀 더 완전한 사람들도 있었고, 유다와 같은 배신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단을 성인들의 집합소가 아닌 보통 사람들로 구성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보통 사람들이 모여 당신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모범을 사람들에게 보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용서하고 포용하는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유다는 어떤 의미에서 다른 사도들의 스승이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이 거짓말쟁이이며 도둑이고 배신자인 유다를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유다가 배신자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합니다. 모두가 유다를 형제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그렇게 참고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성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이제는 종이 아닌 친구로 부르시는 것에서, 정말 완전하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흠이 많은 인간을 친구로 여길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모범은 당신의 생명까지도 벗을 위해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주신다는 뜻은 자신을 온전히 비웠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사랑이 많다는 뜻은 자신을 온전히 주어서 자신을 비웠기에 누구도 이해하고 안아줄 수 있는 무한한 포용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완전해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로 가득 차서, 즉 사랑이 적어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살아가다가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 있다면 부딪혀서 감정이 상하느니 그냥 외면해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누구 하나 놓지 말고 품어줄 수 있는 어머니의 마음을 가지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 넓은 마음은 또한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사랑의 마음에서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부족하여 감싸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도 자신을 온전히 비워버린 십자가의 예수님을 묵상해봅시다. 당신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아끼지 않고 주실 수 있었던 사랑, 그렇게 자신을 비울 줄 아는 사랑을 가져야만 우리도 참 예수님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짧은 묵상>>
며칠 전에 앞차가 갑자기 급정거를 해서 저도 급정거를 했는데 뒤에 오던 택시가 저희 차를 받았습니다.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그 택시운전사는 내려서 괜찮으냐는 말도 없이 자신의 차만을 살펴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경찰을 부르자고 했습니다. 경찰이 해결해주어야 깨끗할 것 같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태도가 급변하였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배상 할 테니 먼저 차부터 좀 빼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차를 먼저 빼면 근거가 없을 것 같아서 차근차근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더 다급한 나머지 자신의 차가 검사기간이 어제로 끝났는데 경찰이 오면 자신의 운전면허증을 빼앗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차를 길에서 먼저 좀 빼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순순히 자신이 알아서 일을 다 처리해 주었습니다.
남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는 것은 좋은 관계를 위해서입니다. 택시운전사가 그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니 저도 그 사정을 봐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열고 서로 속이거나 감추는 것이 없으면 얼마나 좋은 세상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또 친구들에게도 모든 것을 털어놓고 사는 사람은 드뭅니다. 자신의 모든 마음을 숨김없이 털어놓고 살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더 깊은 관계는 서로 비밀이 없이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해주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 중,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을 데리고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와 타볼산의 변모, 또 겟세마니에서의 고뇌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요한에게만 누가 당신을 배반할 것인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더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더 중요한 비밀들을 이야기하십니다. 더 많이 털어놓는 만큼 더 깊은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상대를 보아가며 그 사람에 맞게 당신을 열어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좋은 친구가 되려면 그만한 자격이 되어야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즉 아무나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합당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좋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했는데 그것을 아무에게나 말하고 다니는 사람에게 어떻게 또 다른 비밀을 이야기해 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묵상기도에서도 해당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이 해 주시는 말을 들으려면 그만큼 합당한 친구의 모습을 지녀야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사람만이 그분의 작은 속삭임까지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 내 안에 사는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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