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전삼용 신부님

삼위일체 사랑의 모델

김레지나 2010. 5. 15. 21:57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부활 5주간 목요일 - 삼위일체 사랑의 모델

 

 

 

한 비행기에 조종사와 우주 과학자와 보이스카우트 소년과 신부님이 타고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추락하려고 하자 조종사는 “불행하게도 우리는 넷인데, 낙하산은 셋뿐입니다. 저는 아내와 첫 돌 맞은 아들이 있으니 살아야겠습니다. 미안합니다.”하고 뛰어내렸습니다.

이어 우주 과학자는 “나는 살아있는 사람 중에 제일 똑똑한 사람입니다. 나의 죽음은 세계 전체의 큰 손해입니다. 저 먼저 뛰어내리겠습니다.”하고 뛰어내렸습니다.

남은 것은 신부님과 보이스카웃 소년이었는데 신부님은 “얘야, 남은 낙하산은 네가 써라. 나야 살 만큼 살았고 부양해야 할 가족도 없고 부활에 대한 믿음도 있으니 괜찮아.”라고 말하자, 보이스카웃 소년이 주위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가방 어디 있지? 아~, 과학자 아저씨가 내 가방을 지고 뛰어내렸네요...”

사랑은 하나뿐인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막시밀리아노 꼴베 신부님은 한 사람을 대신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줌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신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유일한 것, 가장 소중한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사랑이 많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당 벽화나 그림을 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더 나이 드신 아버지와 비둘기 모양의 성령님을 함께 그린 그림들이 자주 눈에 띕니다. 예수님은 고통을 받으시고 아버지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슬퍼하는 모습입니다. 물론 그림으로 표현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만이 인류 구원을 위해 고통을 당하시고 아버지와 성령님은 그저 지켜보고만 계셨을까요?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이 줄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을 바칩니다. 하물며 하느님이야 서로에게 어떤 것을 주시겠습니까? 하느님이 온전히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은 서로서로에게 당신의 ‘전부’, 즉 ‘생명’을 주십니다.

하느님은 세 분이신데 세 분이 다 생명을 지니고 있다면 세 분의 생명들, 즉 세 개의 본질을 지닌 세 분의 하느님이 되어버립니다. 하느님에겐 신적인 본질이 단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세 분 하느님 중에 ‘생명’의 본질은 단 한 분만이 소유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 한 분 이 생명을 당신 혼자 가지고 있으려 하시지 않으십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들은 아버지께 성령님을 통하여 당신의 생명을 계속 돌려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령님께서 내려오시고 아들은 성령님을 통해 아버지의 전부, 즉 생명을 받습니다. 그 생명을 통해 아들은 살지만 사실 아버지는 자신의 유일한 생명을 아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죽음을 맞고 계신 것입니다.

아들은 이것을 보고 있을 수 없어 당신의 ‘생명’, 즉 성령님을 아버지께 돌려보내십니다. 이것이 아들의 죽음입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당신의 ‘영’을 아버지께 돌려보냈다고 표현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아들의 죽음만을 보지만 사실 아들이 살아계실 때는 아버지는 죽어계신 것이고 아들이 죽으실 때는 아버지께서 생명을 받아 사시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생명이 없는 아들을 그대로 두시지 않고 다시 당신의 성령을 아들에게 보내시어 당신은 죽으시고 아들을 부활시키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는 이 서로 간의 ‘줌과 받음’의 운동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며 세 분이 하나의 ‘사랑’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비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신이 아버지로부터 받아 지니고 있는 전부, 즉 생명을 우리에게 똑 같이 주시는 사랑을 하셨다는 뜻입니다. 즉, 십자가에서 ‘피와 물’, ‘생명과 성령님’을 우리에게 부어주신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렇게 아들은 온전히 사랑을 우리에게 쏟아 부어 죽음을 맞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다시 살리는 일은 우리가 받은 사랑을 다시 예수님께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죽임이란, 자신의 뜻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뜻을 따름을 의미합니다. 즉,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아들이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며 그 분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와 한 몸을 이루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와 그 분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사랑의 계명을 따라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서로 자신을 온전히 주시는 사랑 안에서 기쁘고 행복한 것처럼 우리도 똑같은 삼위일체의 사랑의 모델을 닮아가며 기쁘고 행복하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도 생명을 주는 사랑을 배우지 못하면 참 하느님의 행복은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끼리도 이 사랑을 반복하라고 하십니다. 사랑을 가진 이가 먼저 다른 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을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즉, 당신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우리 생명을 주는 사랑을 할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엔 아버지도 달리셨고 아들도, 성령님도, 우리 모두도 사랑을 위해 달려야하는 사랑의 온전한 자리인 것입니다.

 

<<짧은 묵상>>

바티칸 대성당의 돔은 지구상에 떠 있는 돔 중에 규모가 가장 큰 것입니다. 그 무게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돔을 올릴 방법이 없어서 그것만 남겨놓고 바티칸 성당은 30년이 넘게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결국 그 돔을 완성시킨 장본인은 미켈란젤로라고 하는 조각가였습니다. 그는 피렌체 대성당 돔을 올린 것을 바탕으로 빙빙 돌아 위로 올라가는 길을 만들어 마차를 이용해 돌을 올렸고 그렇게 거대한 베드로 성당의 돔이 완성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피렌체 대성당의 돔이 없었다면 미켈란젤로가 그 돔을 올리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그 유명한 ‘천지창조’를 30대 초반에 5년에 걸쳐 완성했습니다. 그는 본래 조각가로서 이전에 프레스코화를 그려본 적이 없어서 다들 중도에 포기할 줄 알았는데 그림을 처음으로 그린 것이 역사에 남는 걸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30년 뒤에 같은 시스티나 성당 제대 벽면에 7년에 걸쳐 ‘최후의 심판’을 그립니다. 이미 60대가 되어서 그림에도 완전의 경지에 올랐을법한데 알고 보면 그 때도 계속 모방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아폴로상의 얼굴을 본 따서 그렸고 그 몸의 자세는 토르소라는 몸통만 있는 조각을 보고 그렸습니다. 결국 완전한 경지에 올라도 ‘모방’은 창조의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라파엘로도 아테네 학당이라는 유명한 프레스코화에 자신이 아는 얼굴들, 즉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페엘로, 브라만테 등을 그려 넣었고 자신의 얼굴까지 그려 넣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그 유명한 최후의 만찬 그림에서 예수님의 얼굴과 가리옷 유다의 얼굴의 모델은 같은 사람이라고 전해집니다.

위대한 예술가들도 모방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냈다면, 예수님의 삶은 어땠을까요? 사실 예수님의 삶도 모방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사랑을 모방하여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당신의 사랑을 따라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그냥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하신 ‘그대로’ 모방하며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예수님의 삶은 우리가 모방하도록 보여주신 모델입니다. 예수님조차도 아버지의 사랑을 모델로 삼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 분의 삶을 모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나 그대를 사랑하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