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전삼용 신부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김레지나 2010. 5. 15. 21:54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부활 5주간 수요일 -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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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논문 지도교수님 수업을 끝내고 나오려고 하는데 그 분과 석사 논문을 마무리하시는 수녀님께서 자신의 논문을 지도신부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얼마 전에 신부님이 저에게 그 수녀님 논문에 대해서 아직까지 당신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들어오지 않았음을 말씀하셨었습니다. .

그러나 지금 논문을 제출해야 하는 때이고 더 이상 바꿀 수도 없는지라 신부님은 그냥 사인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수녀님께서는 사인을 받으면서도 교수님이 만족해하지 않으시는 느낌을 받아 저에게 살짝 물어보신 것입니다.

저는 대답해주기가 난처했습니다. 우선은 신부님이 만족해하시는 것도 아니지만 수녀님도 논문을 쓰시느라 많은 고생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수녀님은 지도교수님의 노선을 따르려하기보다는 주어진 시간이 촉박하여 쉽게 통과시켜주시는 분으로 그 교수님을 택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 분의 노선을 따를 생각이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짧은 시간에 석사를 끝내신 것도 아주 잘하신 일이지만 한국에 돌아가서도 남들이 써놓은 것을 종합하는 식이 아니라 자신의 노선을 정하여 한 장을 쓰더라도 자신의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수녀님은 다 잘 끝내놓고도 지도교수님의 노선을 전혀 고려하지 않아서 그 분께 죄송하다며 눈시울을 붉히셨습니다.

 

교수님들은 이미 자신의 노선들이 확고하여 그 분들과 생각이 맞지 않으면 함께 논문을 써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맞는 교수님을 골라야합니다. 그리고 그 분의 생각에 맞는 논문을 써주면 교수님은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이 한 명 더 생겼다는 기쁨에 즐거워합니다. 이것이 교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 교수님께 지도를 받으면서도 그 분의 노선과는 상관없이 쓴다면 그 분은 좀 허탈한 느낌을 갖고 논문을 쓴 사람도 만족해하지 못하는 교수님을 보면서 자신도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저도 성경 석사를 할 때, 교수님 생각보다는 제 생각대로 써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 일을 겪기도 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의 비유를 설명해 주시며 아버지를 어떻게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뜻은 그 분의 노선을 따른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간다면 절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드리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기도를 드리지 않더라도 이미 아버지의 이름은 거룩히 빛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기도를 하지 않더라도 아버지의 영광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이미 완전히 영광을 누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빛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 분의 제자가 되어 그 분의 가르침대로 살아서 많은 열매를 맺으면 그것으로 아버지께서 더 영광스럽게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완전하신 하느님의 영광에 자그마한 영광과 기쁨을 더 보태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 살아야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는 것입니다.

 

요즘 최고의 스타는 김연아 선수일 것입니다. 김연아 선수는 자신의 허리통증을 치료해 주시던 신자분의 권유로 가톨릭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항상 묵주 반지를 끼고 다닙니다. 김연아 선수가 없었더라도 가톨릭교회는 큰 변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김연아 선수가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가톨릭교회는 조금 더 영광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인 당신께 붙어있기만 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말씀과 성체로 교회 안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분의 제자가 되고 그 분의 노선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또 어떻게 우리를 위해 외아드님까지 주신 아버지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짧은 묵상>>

 처음 신학교 들어갔을 때는 비장한 마음으로 훌륭한 사제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많이 고민하였습니다. 훌륭한 성인들은 정말 신기한 체험이나 위대한 업적들을 많이 남기셔서 감히 비슷하게라도 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날 “나에게 올 때 빈손으로 오지 마라.”라는 성경 구절이 있는데 이뤄놓은 것이 없이 죽는다면 큰 걱정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접한 말씀이 오늘의 ‘포도나무의 비유’입니다. 이 구절은 신학교 시절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제 삶의 시작이요 끝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사실 소화 데레사는 어떠한 큰 영적 체험이나 드러나는 일을 하신 적이 없지만 커다란 성녀가 되었습니다. 위대한 성인이 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업적을 쌓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머묾으로써 저절로 열매가 맺어지게 하면 그만입니다.

즉, 먼저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라는 말씀이 핵심입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래서 항상 주님을 찾고 의지해야하는데 그것이 ‘기도’입니다. 결국 우리는 공기 안에 있고 항상 숨을 쉬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듯이, 항상 그리스도 안에 있더라도 겸손하지 못하면 그 안에 머무를 수 없게 됩니다. 아기가 어머니를 찾듯, 겸손한 이가 주님을 잊지 않고 ‘머무르게’ 되는데 이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가지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그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 뿐입니다.

예수님은 기도 중에서도 말씀을 묵상하는 기도가 가장 중요함을 오늘 복음에서 동시에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깨끗함은 그리스도 안에 머물기 위한 조건입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깨끗하여진다고 하시니 꾸준히 말씀을 묵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내 안에 하느님께 바칠 포동포동한 열매가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 붙어있으면 그분으로부터 성령의 수액이 들어와 저절로 열매가 맺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기도를 하고, 겸손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잊지 않고 찾습니다. 결국 숨 쉬는 것처럼 항상 ‘기도’하는 사람만이 많은 열매를 맺어 주님께 양손 무겁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제목 :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