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5주간 화요일 - 미사보 쓰는 이유
성지순례를 나오신 분들과 함께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면 지나가는 외국인들이 신기한 듯이 우리 신자들을 쳐다봅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 신자들이 그들의 시선을 자극하는 것은 미사 때 머리에 쓰는 수건입니다. 왜냐하면 미사보를 쓰는 것은 교회의 오랜 전통이었지만 서양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여성차별이라는 이유로 쓰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미사보를 쓰게 한 연유는 정말로 바오로가 한 말에서 기인하고 여성차별의 의미로 받아들일 소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여자가 기도를 하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할 때에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 머리, 곧 자기 남편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머리를 민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만일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아도 된다면 머리를 깎아 버려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를 깎거나 미는 것은 여자에게는 부끄러운 일이니 무엇으로든지 머리를 가리십시오.” (1코린 11,5-6)
따라서 미사보를 쓰는 이유는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순결’의 의미나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뜻은 그 의미를 완전하게 설명해주지 못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여성만이 순결하고 여성만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는 뜻인데, 남성들도 교회의 일원으로서 순결해져야하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레베카가 남편이 될 이사악 앞에서 ‘너울을 꺼내어 얼굴을 가렸다’ (창세 24,65)고 하듯이 미사보는 말 그대로 자신보다 ‘높게 여겨야할’ 남자가 있다는 말이고, 다시 말해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두듯이, 여성은 남성을 머리로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이 설명이 거슬린다면 오늘 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봅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보다 위대하시다고 번역했지만 직역하면 단순히 ‘큰’ 분이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보다 크신 분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아들은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것만 말하고 아버지께서 명령하시는 대로만 순종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가 더 크십니까, 아니면 아들이 더 크신 분입니까?”라고 물으면 우리는 무어라 대답해야할까요?
만약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만 듣고 “당연히 아버지가 더 크신 분이죠.”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단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같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요한 10,30)
도대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바로 사랑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깨달으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성모님은 어떻게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을까요? 당신의 마니피캇에서도 노래하시듯이 하느님은 “권세 있는 자들을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들을 끌어올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부부싸움은 언제부터 시작됩니까? 서로 교만하여 상대의 ‘머리’ 위에 앉으려고 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발단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정작 싸움이 일어나는 이유는 바로 서로 높아지려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과 같이 되려는 것에서 하느님과의 일치와 자신들의 일치도 깨어진 것처럼 높아지려함은 사랑을 거스르고 분열을 초래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예수님은 아버지와 동등한 신적 위치를 보존하려하지 않으시고 사람이 되시어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셨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당신과 똑같은 위치가 되도록 부활시켜 주시고 승천하셔서 아버지와 동등한 위치가 되셨습니다. 만약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의 하느님이 서로 높아지려한다면 한 분 하느님은 사라지고 온 세상은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혼돈으로 망하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은 서로 낮아지려는 것 가운데서 사랑과 일치를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도 이와 마찬가지로 남자는 그 위에 하느님이 있음을 인정하고 여자는 자신의 위에 남자가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서로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심으로써 아버지와 동등한 위치가 되시고, 성모님께서 자신을 낮추심으로써 ‘하느님의 어머니, 천상의 여왕’이 되신 것처럼, 아내도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질서를 인정함으로써 사랑으로 남편과 동등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사보를 쓰는 것이 남녀 차별이 아니라 ‘남녀 구별’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그 역할이 구별 되듯이, 하느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 서로의 역할을 구별하여 주셨고 삼위일체가 바로 그 역할 안에서 한 ‘사랑’을 만들었듯이, 사람도 남자, 여자의 구별 안에서 작은 삼위일체를 형성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되 당신의 모상대로 만드셨다는 의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교회가 그렇듯이 남편과 아내도 이 신비를 드러내는 상징이 되어야 하는데 그 순종 안에서의 한 몸이 되는 혼인의 신비의 핵심이 바로 여자가 쓰는 ‘미사보’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는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합니다.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저마다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아내도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에페 5, 21-33)
<짧은 묵상>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아! 이래서 성인들이 단명하시는구나!’였습니다. 그 분은 의사이시고 하루에 300명의 환자들을 보면서도 정작 자신의 몸은 신경 쓰지 않으셨습니다. 생전처음 한 건강검진에서 대장암 말기로 판정을 받기까지 알아차리시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잊고 살았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이 아니라 상대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고, 자신을 잊고 상대에게 모든 것을 주기 때문에 자신은 자신도 모르게 소진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 완전히 당신을 소진시키셨습니다.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텐즈 사람들이 이태석 신부님께서 주시려고 했던 것을 받기를 거부했다면 그 분은 그렇게 그 곳에서 자신을 소진하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 곳 사람들이 자신이 주고자 하시는 것들을 너무도 원하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주신 것입니다. 100킬로를 걸어서 오고 또 총에 맞아 죽어가는 사람이 꿀잠을 자고 있는 한밤중에 찾아왔다고 하여 어떻게 돌려보낼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그들에게 당신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느님께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당에 나오는 이유를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것 자체가 나 스스로는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다는 좋은 징조입니다. 오늘 예수님도,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라고 하시며 평화가 당신께 받아야만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무엇임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텐즈 사람들이 이태석 신부님께서 주시고자 하셨던 것을 받으려고 했던 것만큼, 우리가 정말 그만큼 절실하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원하고 있는지는 반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그러셨듯, 예수님은 원하기만 한다면 당신을 소진해가시며 모든 것을 주실 분이십니다. 만약 우리 마음이 산란하고 걱정스럽고 두렵다면 그건 ‘진정으로’ 받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평화는 이렇게 원하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상’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주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겸손한 모습으로 그 분께 두 손을 벌려 내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는 곧 그 분의 생명이고 성체입니다. 나의 평화가 곧 온 세상의 평화의 시작인 것입니다.
<사랑과 평화의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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