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전삼용 신부님

은총의 중재자 -사제는 그리스도의 중제자로서~

김레지나 2010. 5. 1. 18:45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부활 4주간 토요일 - 은총의 중재자

 

 

 

오상의 비오 신부님 유물 전시관에 들어가면 눈에 띄는 것 중의 하나는 한 벽면을 가득 메운 편지들입니다. 그것도 전 세계에서 비오 신부님께 보내 온 편지들의 일부라고 하는데 몇 통이나 되는지 그 수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이 비오 신부님께 무엇에 대해 하느님께 청해 달라는 편지들입니다.

그러나 왜 본인들이 기도하기보다는 성인들이나 성직자, 수도자들에게 기도를 청하는 것일까요? 과연 그 분들을 통한 기도는 더 큰 응답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바빌론 유배시절 있었던 일입니다. 임금은 크세르크세스라는 사람이었고 그의 인정을 받던 하만이란 신하가 있었습니다. 임금은 큰 잔치를 베풀고 기분이 좋아져 어여쁜 와스티 왕비를 잔치에 초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왕비는 왕의 청을 거절하였고 왕은 격분하여 왕비를 폐위시켰습니다. 이는 남편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 나라에 본을 보여주기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새 왕비를 뽑기로 하였습니다. 이 때 유다인 모르도카이는 자기 삼촌의 딸인 에스테르를 맡아 키우고 있었습니다. 모르도카이는 에스테르를 궁궐로 보냈고 그녀가 왕의 마음에 들어 왕비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하만이란 신하가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인 모르도카이를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임금에게 간하여 모르도카이만이 아니라 모든 유다인들을 페르시아에서 없애버리라는 명을 온 지방에 전달하게 하였습니다.

모르도카이는 어찌할 바를 몰라 이 사실을 에스테르에게 말하였습니다. 에스테르는 비록 왕비지만 함부로 임금 앞에 나설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임금의 허락 없이 임금이 앉아 정치하는 곳으로 들어가면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임금이 왕홀을 내밀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무릅쓰고 에스테르는 임금을 만났고 임금과 하만에게 술을 대접하며 임금의 애를 태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유다인이고 하만이 자신의 종족을 멸하려한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임금이 화가 나서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하만은 왕비에게 엎드려 살려달라고 청하고 있었는데 임금은 그것이 왕비까지도 폭행하려하는지 알고 그와 그의 가족들을 죽이라고 하고 온 나라에 유다인들의 적을 유다인들 마음대로 죽일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이 에스텔서에 나오는 내용의 줄거리입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임금께 순종하지 못한 왕비는 쫓겨났지만 임금의 사랑을 받던 에스테르의 청에 의해 온 민족이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만물의 주권자는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당신께 죽기까지 순종하는 아들에게 당신의 모든 권능을 주시어 당신과 같은 위치로 올려주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처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기에 아들은 아버지와 같아지실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께 청하는 무엇이나 얻어내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한 몸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또 한 분의 중재자 성모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성모님과 또 한 몸을 이루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모든 것을 얻어내시는 것처럼 성모님도 마치 에스테르처럼 아들에게 간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얻어내실 수 있는 분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예수님은 성모님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첫 번째 기적을 얻어내신 분이 성모님이신 것은 바로 그 이유에서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인들의 전구는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더 큰 사랑을 받고 하느님과 더 일치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론이요 다른 이들에게도 은총을 전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순종하여 더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짧은 묵상>>

진정한 그리스도의 ‘중재자’로서의 사제의 역할은 어때야하는가에 대해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 교수님은 사제가 고해성사를 들을 때 신자의 죄를 캐묻거나 더 성찰하고 오라고 내쫓는 등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참 중재자는 ‘투명’하여 바로 고해성사 보는 사람이 그리스도와의 맞대면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사제가 고해하지 않은 것까지 캐묻거나 심하게 신자를 야단치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또한 사제가 중간에 가로막아서 고해자와 그리스도간의 1대1 대면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중재자의 역할이 둘 중간에 서서 투명해지는 것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중재자란 ‘보이지 않는 분을 보이게 해 주기 위해’ 투명해 지는 것입니다. 즉, 중재자가 없으면 어떤 방법으로도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스스로 하느님께 기도하면 죄가 용서된다고 하지만 천주교에서는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하면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라고 하신 성경말씀대로 사제가 사죄경을 해 주지 않으면 그 사람의 죄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중재자는 단순히 투명해지는 도구가 아니라 직접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을 볼 수 있게 ‘번역’해 주는 역할입니다. 즉, 눈으로 태양을 직접 볼 수 없을 때 선글라스를 끼면 잘 보이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세우신 당신의 중재자는 자신을 죽여 투명해지기도 해야 하지만 동시에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는 아닌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도 당신께서 중재자이심을 선포하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아버지께서 당신 ‘대신’ 살게 하신 것과 같이, 사제들도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미사를 거행하고 고해성사를 주는 등의 외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생각과 말과 행동에 있어서 그리스도라는 책을 자신의 삶으로 ‘번역’해 주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일치하시기 위해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처럼 우리 자신들도 그리스도의 뜻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아야합니다. 이것은 중재자 자신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넘어서 새로운 교회를 탄생하게 하는 생명력을 지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