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4주간 목요일 - 파견된 이들
로마로 여행 중이던 한 자매가 제가 아는 신부님의 성당 신자라고 하기에 그 신부님 잘 계시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그 분의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신부님, 잘 계신 거 같아요. 근데 강론을 너무 못하셔요. 매일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성경과는 맞지도 않고... 그런 사람이 무슨...”
저도 그 신부님이 강론말씀을 잘 준비하지 못하시는 것을 알지만 그 본당 신자의 말을 통해 들으니 같은 사제로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사제가 강론 잘하고 못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이 말씀은 당신께서 아버지께서 보내셔서 세상에 오셨고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당신께서 파견하시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란 뜻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당신이 아버지를 대신하는 것처럼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제들이 강론을 잘하고 못하고 성격이 좋고 안 좋고를 떠나서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당신의 제자들을 마치 당신처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라고 하여 물 한 컵을 주어도 그 상급을 반드시 받을 것이라고 하셨고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아야 할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도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파견자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또한 그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제의 질이 어떻고를 따지지 않고 사제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그만큼 큰 그릇과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제가 아는 또 다른 신부님은 고해성사를 보다가 화가 난 신자에게 신자들이 보는 앞에서 멱살을 잡히기도 하였는데 그 신자는 버젓이 미사를 끝까지 하고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받아들이면 된다는 생각이겠지만, 아버지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처럼, 그리스도 이전에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몇몇의 신자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우리나라 신자들은 사제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잘 받아들입니다. 더 큰 문제는 사제들에게 있는 것이 맞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제들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여러 가지 면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 제 단체 자매님은 스스로 ‘평신도’를 사제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병신도’라 칭하며 자신을 낮춥니다. 그래서 사제들에게 말할 때 “우리 병신도들은 사제님들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 안에는 신자로서 사제를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잘 나타납니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자신을 비하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제로 몇 년 본당에 있지도 않았지만 아무리 겸손하려해도 신자들이 우대해주는 것에 쉽게 물들어가는 저를 쉽게 발견하곤 하였습니다. 항상 모임에 맨 나중에 나타나고 강복 한 번 주면 고마워하고 노인 어르신들까지도 굽신굽신하고 신앙 없는 정치인들까지도 사제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보고 스스로 거만해지지 않기란 쉽지 않습니다. 나중엔 그렇게 대해주지 않으면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교황님을 ‘종들의 종’이라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세상에 보여주시기 위해서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며 낮아지신 것처럼 자신을 낮추는 겸손 안에서만이 사제직이 완전히 수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그리스도의 대리자는 맞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처럼 그리스도께서 모범을 보이시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라고 하신 것은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던 모습’이었습니다. 당신이 주님이고 스승으로서 이 일을 하였으니 당신의 제자들인 사제들도 신자들에게 그런 종의 모습으로 봉사하라는 뜻입니다.
사제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대리자들은 그리스도처럼 종의 모습으로 신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공동체로 끊임없이 우리 자신들을 정화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짧은 묵상>>
초등학교 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항상 큰 것을 희망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꿈이 작으면 잘해봐야 그 꿈을 꾼 사람만큼만 될 수 있지만 꿈이 크면 그 꿈대로 되지 못하더라도 그것에 가까이 가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꿈이 소방관나 경찰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면 잘해봐야 그 꿈을 이루어 소방관이나 경찰로 살 수 있지만, 꿈이 대통령이었던 사람은 결국 대통령이 못되더라도 국회의원까지는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어렸을 때부터 그런 꿈을 가지고 영어공부를 하였고 지금은 대통령보다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내가 그런 사람이 돼!’, 혹은 ‘그건 불가능해!’라고 말하는 것이 겸손인 것처럼 처음부터 포개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디까지 희망하셨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배반할 사람을 처음부터 아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그렇게 예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유다가 배반할 것을 아시고도 그를 사도로 뽑으셨다는 말이 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뽑으시어 그에게 죄를 지을 빌미를 마련해 주신 것이기에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배반할 것까지 아시고 있는 유다를 뽑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그 분은 한 인간으로서 모르는 것도 있었고 그래서 믿는 것도 희망하시는 것도 있었음을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배반할 것을 아시면서도 (아마 유다가 끝까지 뽑아달라고 졸랐을 테지만) 그를 뽑으신 이유는, 그가 회개할 수 있도록 ‘희망’하셨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이제 네가 할 일을 하여라.”하실 때까지 예수님은 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미 ‘예정 되어 있는 것까지 희망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까지 희망하시어 그를 구원하려 하셨던 분이기에 예수님이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희망해야 하는 것들은 우리가 아무런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예정 되어 있는 것까지 희망하셨다면, 우리가 희망하지 말아야 할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희망과 믿음과 사랑의 크기는 비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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