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 6 주일 - 성령이 오시기 위해서 그 분은 떠나야 한다
이태석 신부님은 아프리카 수단에서 그 가난함과 고단한 봉사로 자신의 몸을 소진시키셨습니다. 다시 한국에 돌아오셨을 때는 대장암 말기였습니다. 다시 아프리카 수단으로 돌아가시지는 못하셨지만 그 곳에 가서 봉사하겠다는 의사들도 생겨나고 또 그의 모교에서는 이태석 신부가 선발한 두 명을 의사로 만들어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 많은 후원자들이 늘어났고 그렇게 수단에 남겨진 이들은 그분이 남기고 가신 사랑을 다른 모습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고정 후원자가 천 명 이상 늘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모습에서 오늘 복음의 모든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상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미리 제자들에게 말씀해주시는 장면입니다. 오늘 복음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1.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2. 성령님이 오시면 내 말을 기억하게 하실 것이다.
3.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4.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하여라.
언뜻 보면 아무 연관이 없어 보일 수 있지만 다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새로운 계명을 주시면서 그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을 보내신 분까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의 말을 잘 따른다는 것은 사랑의 증거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혼인하시기 전에 침을 뱉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그것을 보시고 그러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아버지는 그 이후로 침 뱉는 버릇이 말끔히 없어졌다고 합니다. 일단 결혼은 해야 하니까 그런 버릇을 고치는 것이 크게 어렵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은 결혼하고 나서는 바꿀 수 있었던 게 하나도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가장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니까요.
이태석 신부님이 남겨놓고 가신 업적 때문에 많은 수단의 사람들이 도움을 받게 될 텐데 당연히 도움을 받는 사람들은 그 분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모든 수단사람들이 그 분 때문에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만든 학교나 병원, 성당 등에 오는 사람이 먼저 도움을 받게 됩니다.
또한 그분으로부터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선발된 두 청년은 신부님의 마음에 꼭 드는 두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 분으로부터 오는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그 분과 관계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로부터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그 분의 계명을 따라 그 분과 관계가 있어야합니다. 그 분의 말씀을 더 잘 따르는 사람에게 더 충만한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2.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도움’이 ‘성령님’입니다. 사실 이태석 신부님께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나 자신 출신 의대에서 그렇게 많은 지원을 받게 된 것에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가며 희생한 그 분의 삶에 의해서였습니다.
지금 수단 사람들이 받게 되는 도움은 그 분의 삶과 죽음 덕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지만 그 분께서 아버지께 마음에 드는 삶을 사시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전해주실 성령님을 받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님을 받았다는 표징은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항상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주시고 또 그렇게 살도록 힘도 주십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인도를 무시하고 스스로 살려다보면 걱정도 생기고 두려움도 생기고 또 그런 것들이 잘 되어 나가던 것까지 망쳐놓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증거를 ‘평화’로 삼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남겨놓고 간다고 하시는데 평화는 바로 성령님의 열매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느끼고 있는 사람은 성령님이 계신 것이고 걱정, 불안, 긴장, 두려움 등의 평화를 깨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다시 성령님으로 자신을 채우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 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남겨놓고 가신 것은 당신이 이 세상에서 하시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육체뿐만이 아니라 교육 사업까지 하셔서 그들의 정신까지도 살려주셨습니다. 그 일은 앞으로 후원자들과 봉사자들이 생겨나 계속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 분이 혼자 하실 때보다 그 분의 죽음으로 더 많은 도움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그 분이 남겨놓으신 평화를 받아 누리게 됩니다. 그 가장 큰 평화가 바로 ‘성체’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4. 우리는 개인적으로 세례를 받을 때 성령님이 처음으로 오심을 느끼게 됩니다. 세례를 받을 때 걱정스러웠고 두려웠던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십시오. 제 출신 본당의 어떤 신자는 이름표를 꽂을 때 핀이 살이 꽂혀 있었는데도 그래야 하는지 알고 세례시간 동안 그렇게 있었다고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그 때 내려오시는 성령의 힘은 모든 고통도 이겨낼 수 있는 평화와 기쁨입니다. 사도들도 두려움에 떨고 있다가 성령님이 내려오시자 문을 박차고 나가 전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께로 가지 않으시면 성령님이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요한 16,17).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성령님은 두 분 사이에서 오고가는 사랑입니다. 두 분이 멀리 떨어져 계시면 그 사랑의 빈도도 약해지게 마련입니다. 성령님이 줄어드시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사랑이지만 약해진다는 뜻입니다. 탁구도 서로 멀리 떨어져서 치면 공이 오고가는 시간도 길어지고 빈도도 약해집니다. 금을 생각해 봅시다. 금을 잡아 늘이면 한 없이 늘어납니다. 금은 점도가 좋아서 거의 끊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은 금으로 서로 이어져 계십니다. 사실 성경에서 금도 성령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어쨌건 예수님은 이 세상까지 내려오시는 것도 모자라서 저승까지 내려가서 구원을 기다리는 이들을 데려와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세상에 내려오시는 것을 시작으로 아버지와 예수님께서 가장 멀리 떨어져 계셨을 때가 바로 성삼일 동안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괴로워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셨고 십자가에서 “주님, 주님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한탄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왜 모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며 돌변했을까요?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 간에 너무 멀리 떨어져 계셨기 때문에 성령님의 힘도 매우 약해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기억하고 감사하며 살 수 있는 힘은 성령님에게서 오는데 성령님의 힘이 매우 약해져버렸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머리가 어둡게 되어버려 온전한 판단을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시기 직전까지 예수님은 저승에 내려가 계셨고 이때는 성령님의 힘이 가장 약해져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 때문에 가장 고통을 당해야 하셨던 분은 성모님입니다. 성령님을 충만히 받고 아드님을 잉태하셨던 성모님은 예수님과 함께 사랑을 잃는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시고 나서는 당신을 붙잡으려는 막달레나에게 당신은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하니 붙잡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성령님이 온 세상에 충만하게 내릴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교회가 공식적으로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님도 만약 이 세상에서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지금만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한 신부의 자신을 소진하는 사랑을 보았고 이제는 그 분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라도 거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돈을 내기도 하고 봉사 지원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신부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두 명의 수단 청년들이 거저로 의사가 되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당신이 돌아가시는 일이 잘 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큰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보고 당신이 아버지께 올라가는 것을 기뻐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분이 올라가셔야 충만한 성령님을 세상에 보내주실 수 있고 우리들의 자리를 마련해 놓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상의 성인은 당신의 50년간의 오상의 고통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은총을 전해 주었습니다. 누구나가 그리스도의 모범으로 그렇게 자신을 죽일 줄 안다면 자신은 세상에서 죽을지라도 많은 은총을 세상에 전해주는 중재자가 되게 됩니다. 이것이 자신을 위해서 살고 죽는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남을 위한 죽음은 많은 열매를 남깁니다. 남도 살리고 자신도 살립니다. 자신을 위한 삶은 남도 죽이고 자기도 죽이는 비참한 죽음입니다.
< 주님의 사랑이 이 곳에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강론 말씀 (가나다순) > 전삼용 신부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너지 효과 (0) | 2010.05.15 |
---|---|
증거자 성령님 (0) | 2010.05.15 |
미움을 넘어서 (0) | 2010.05.15 |
십자가의 가난과 포용력의 관계 - 그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사람만이 (0) | 2010.05.15 |
삼위일체 사랑의 모델 (0) | 2010.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