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전삼용 신부님

주님의 음성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김레지나 2010. 5. 1. 18:31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부활 4주간 월요일 - 주님의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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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치료를 하시는 분이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여자 대학생과 그 어머니가 육체적, 심리적으로 힘든 삶을 살기에 치료를 받기 위해서 왔다고 합니다. 특히 학생은 피해의식으로 소심하고 고립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학생을 무의식 상태로 들어가게 하여 학생의 기억 속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들어보려 하였습니다. 과거로 과거로 가다가 학생이 태어나기 전 시기까지 들어갔습니다.

학생은 “‘넌 죽으면 안 돼, 넌 살아야 돼’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요.”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머니가 설명하기를, “제가 이 아이를 가졌을 때는 쌍둥이였어요. 하나는 사내아이고 하나는 이 아이였죠. 사내아이가 워낙 극성이어서 영양분을 다 가져가고 활동 범위가 넓어 이 아이는 구석에만 있어야 했어요. 또한 남편이 속 썩이고 아이를 지우라고도 해서 저는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끊임없이 ‘넌 죽으면 안 돼, 넌 살아야 돼’라고 말해 주었어요. 그걸 기억하는 거예요...”

저도 이 이야기를 듣고 소름이 끼쳤습니다. 아이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미 형성되며, 사실은 중요한 것들은 이미 그 안에서 다 형성되는 것입니다.

 

어떤 유치원 선생님이 희한한 아이가 있기에 어머니를 불렀습니다. 그 아이는 나이에 맞지 않게 점잖고 선생님과 아이들을 배려하는 또래에 맞지 않는 성숙한 아이였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 유치원 선생님께 그 비결을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한 거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냥 아이 임신하고 아이를 위해서 또 저를 위해서 신구약 성경을 두 번 통독했어요. 그랬더니 아이가 나왔는데 처음부터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다르더라고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십니다. 당신의 양들의 이름을 부른다는 뜻은 그들을 하나하나 안다는 말이고 안다는 말은 성경에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완전하시기에 예수님은 우리 하나하나를 당신의 신부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신랑의 목소리를 이미 아는 양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목소리가 들리면 오히려 멀리 달아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듣는 목소리지만 그 목소리를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도 어머니의 목소리와 심장 박동소리, 그 영성까지도 받아들이듯이 우리도 주님의 품에 있을 때부터 이미 그 분의 목소리는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었습니다. 누구나 주님으로부터 온 사람은 그 분의 목소리를 알고 사실은 그 목소리를 그리워합니다. 사람이 모든 것을 얻어도 공허하다면 아직도 주님을 찾지 못해서 영혼이 그 분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모든 영혼은 하느님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대로라면 주님의 선택된 양들만이 그 분의 목소리를 듣고 따라갑니다.

제 생각은 스스로 세상의 다른 소리들, 즉 교만, 육체적 욕망, 돈, 인기, 명예 등에 촉각을 곤두세우다보니 주님의 소리는 내면 깊숙한 곳에 묻혀버려 그 분의 소리가 들려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부를 것이라고 생각하면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가운데서도 자신을 부르는 연인의 소리만을 잡아냅니다. 그러나 다른 생각을 하거나 다른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면 연인이 불러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은 하느님 태중에서부터 그 분의 소리를 들었기에 지금도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그 분의 목소리를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부르심만이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화와 안정을 줍니다.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어머니 목소리를 들을 때 가장 안정감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도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때 영혼의 평안함을 찾습니다. 세상 소음에 휩쓸리지 말고 먼저 나를 부르는 그 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시다.

 

<<짧은 묵상>>

오늘 아침 우연찮게 한 수녀님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신이 전에 있던 곳의 한 자매님 이야기입니다. 그 자매님은 30대 중반의 늦은 나이에 첫 아기를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검사결과 아기는 자궁의 혹과 함께 자라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생명을 위해서는 그 혹을 제거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쩔 수 없이 아기의 생명도 함께 희생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매님은 남편과 의사의 강력한 조언에도 불구하고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오늘 이 이야기를 해 주신 수녀님께 기도를 청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남편과 의사가 잡아놓은 수술날짜에 다시 검사를 해 보니 혹이 조금 줄어든 듯 하여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자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9달이 지난 것입니다.

혹은 자궁의 여러 곳으로 퍼졌지만 아기는 무사히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6개월 뒤엔 퍼져있던 혹들이 한 곳으로 다시 모여 간단하게 그것만 잘라내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아이는 지금 중학생이 되었고 건강하게 성소의 꿈을 지니며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벗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실로 그 자매는 자신의 목숨을 아들을 위해 바친 것입니다. 그랬더니 자신도 살고 또 한 생명도 얻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방식은 당신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착한 목자로 양들을 위해 당신 목숨을 내어놓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희생으로 생명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의 전부인 생명의 성령님을 아드님께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희생이고 아버지의 죽음입니다. 물론 그 희생은 다시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성령님을 돌려받게 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하신 그대로를 반복함으로써 아버지께로부터 사랑을 받으신다면 우리는 예수님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바치는 길 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생명을 바치는 사랑을 본받도록 우리에게 유일한 한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com/30jose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