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전삼용 신부님

새로 태어남과 믿음

김레지나 2010. 5. 1. 18:33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순 4주간 화요일 - 새로 태어남과 믿음

 

 

 

믿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많이 쓰는 예화가 있습니다.

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등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만 미끄러져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본능적으로 손을 허우적거리다가 바위틈으로 자란 나뭇가지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뭇가지로는 오래 자신을 지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늘에 대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느님, 도와주세요.”

그러자 하늘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래, 내가 도와줄 테니 잡고 있는 그 나뭇가지를 놓아라.”

그는 정말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와서 놀랍고 기쁘기는 했지만 아래를 내려다보니 나뭇가지를 놓아선 결코 살아날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는 그 말씀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끝에 마지막 안간힘을 다하여 외쳤습니다.

“근데, 그 위에 또 다른 분은 없나요?”

 

믿음은 자신을 죽여야 생깁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싶어 당신을 찾아온 니코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지금의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위의 예처럼 믿음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항상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제가 본당에서 강론을 할 때 항상 십일조를 내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에도 나와 있고 예수님께서도 십일조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분께서 하라고 하시는 말씀도 믿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항상 이렇습니다.

“살려거든 잡고 있는 가지를 놓아라.”

그러나 결과는 끝까지 그 가지를 잡고 놓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고 청합니다. 이들도 예수님을 믿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믿고 따르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믿지 못하고 어떤 확신을 요구하기만합니다. 사실은 그런 표징들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믿음을 가질만한 사람들이 못 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혹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믿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믿으면 지금까지 살아오던 방식을 바꾸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뭇가지를 놓기를 원치 않는, 즉 하느님이 아닌 자신을 더 믿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양과 하느님의 양이 아닌 사람들과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았고 믿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건 답이 없습니다. 믿음에 이르는 방법은 수 없이 많고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은 자신을 죽이고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은 자신을 죽이는 회개를 의미하고 성령은 말 그대로 믿음을 주시는 은총을 가리킵니다. 물과 성령으로 매일 새로 나야 합니다.

믿기를 원하면 믿을 수 있고 원치 않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이미 우리 앞엔 같은 하느님의 계시가 주어졌습니다. 마치 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놓고 안 놓는 것이 자신에게 달려있듯, 믿고 안 믿고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믿으면 그것이 십일조이든 무엇이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따르게 될 것입니다.

 

짧은 묵상

어떤 신앙심 깊은 신부님이 홍수가 났는데도 피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신자들이 와서 피하자고 하는데도 성당을 버리고 갈 수 없다며 끝까지 버텼습니다. 성당이 반쯤 잠기자 보트를 탄 사람이 와서 함께 가자고 했으나 하느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라며 청을 거절하였습니다. 나중에 성당 지붕만 남아 그 위에 올라가 있을 때 헬기가 와서 구해주려고 하는데도 역시 끝까지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그 청을 거절했습니다. 물론 그 신부님은 물에 떠내려갔고 죽어서 하느님 앞에 갔습니다. 그는 왜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셨느냐고 하느님께 따졌습니다. 하느님은 “네 믿음 때문에 널 구하려고 세 번씩이나 사람들을 보냈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너는 이 세상에서 어찌 시간을 허비했기에 간신히 구원받을 정도만 되어 올라왔느냐?”라고 한다면 어쩌면 우리도 이 신부님처럼 할 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저에게 바오로에게 나타나셨던 것처럼 한 번 나타나셨습니까, 아니면 베드로를 부르실 때처럼 기적을 보여주셨습니까, 아니면 성인들처럼 기도 중에 황홀경에 빠지게 해 주셨습니까? 사실 좀 불공평하신 것 같아요~”

오늘 복음에서도 유다인들이 똑같은 불평을 합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이는 “당신이 확실하게 우리가 믿을 수 있게 말이나 기적을 행하지 않으니 우리가 못 믿는 것 아니오?”라고 따지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 자주 하늘의 표징을 청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절대 불공평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목자가 부르는 소리는 모두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참으로 목자로 여기는 양들만이 그 목소리를 따릅니다.

바오로나 베드로, 혹은 모든 성인들에게 특별하게 주시는 은총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에게도 공평하게 은총이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들이 듣고 보려고 하지 않을 뿐입니다. 만약 그들만 한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들보다 커질 수 있는 은총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공평하게 목자의 목소리를 똑 같이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