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수난 성지주일 - 오늘도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우리 심판은 내가 한 행위보다는 나의 ‘존재가 무엇이냐’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같은 공기에서 하이에나는 썩은 냄새만 맡고, 바다에서 피 냄새는 상어만큼 잘 맡는 물고기가 없습니다. 꿀벌은 꽃만 보지만 똥파리는 그 밑에 있는 썩은 것만 봅니다. 사람 안에도 좋은 면과 나쁜 면이 공존하는데 좋은 면보다는 나쁜 면을 먼저보고 판단하기 좋아한다면 그 사람의 본질은 하이에나, 상어, 똥파리가 됩니다.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한 말처럼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마태오 복음 25장엔 최후의 심판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지 않고 구원하러 오셨다고 합니다. 당신이 하는 심판은 공정하지만 누구도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심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사람이 양과 염소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양인지 알았는데 염소였다면 매우 놀랍고 안타까울 것입니다. 원숭이가 사람 흉내를 내도 사람 사는 곳에 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두 여인이 같이 맷돌질을 하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기고, 또 두 남자가 함께 밭을 갈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겨둘 것입니다. 즉, 그 하는 일이 같아도 그 사람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을 보고 오징어만 올라오고 나머지 고기들은 어둠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듯 우리 본질이 빛이라면 그리스도의 빛 아래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성 바오로는 매 순간 기도하고, 항상 감사하며, 언제나 기뻐하라고 합니다. 이는 본질상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항상’이란 말은 억지로 그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상 ‘항상’ 그런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본질이 타락하였습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나라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마귀들에 비해서는 덜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적어도 우리 안에 아직은 자신의 본질을 변화시킬 좋은 것들이 남아있습니다.
신생아실에서 한 아이가 울면 다른 아이들도 따라 웁니다. 그러나 자신의 우는 소리를 녹음해서 들려주면 자신의 우는 소리를 듣고는 절대 울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 안에 상대의 아픔을 공감하는 좋은 심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자아와 육체, 또 세상의 상황에 지배를 받습니다. 지하철 선로에 사람이 떨어지면 모두들 안타까워하면서도 좀체 뛰어 내려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도 내려가지 않기 때문에 나도 내려갈 필요가 없고, 더 큰 문제는 자신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깡패들이 누구를 괴롭히고 있다면 못 본 채 합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는 내가 다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마음 안에서 일지만 자신의 자아를 뚫고 나올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2001년 1월 26일 이수현이라고 하는 한국인 유학생이 일본 지하철역에서 사람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은 일이 있었습니다. 충분히 피할 시간도 있었지만 끝까지 사람을 끌어내려다가 목숨을 잃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리게 되었고 책으로도 출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부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선로에 떨어진 한 사람을 구해낸 사람들의 수가 매번 8명, 10명 등으로 늘어나는 것입니다. 누구나가 다 선로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책을 읽었거나 그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희생이 사람들 안에 잠재되어 있던 좋은 심성을 깨운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자라서 꽃이 되고 열매가 될 씨앗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자아와 육체가 딱딱하게 그것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의 따듯한 빛이 그 씨앗을 싹트고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계란 안에 있는 병아리가 어미 닭의 따듯함이 없이는 껍질을 깰 수 없는 것처럼 인간 안에 잠재되어 있는 좋은 심성도 누군가의 ‘사랑의 희생’으로만 깨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같은 예이지만, 2007년 12월 25일 세계 복싱 타이틀을 획득하고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최요삼 선수가 있습니다. 평소 어려운 이들을 돕고 싶다는 그의 뜻에 따라 가족의 결정으로 6명에게 장기를 기증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최요삼 효과’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장기기증이 쇄도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희생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희생들은 오랜 효과를 지속하지는 못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잊혀지게 됩니다. 우리에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따듯한 태양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당신이 직접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 희생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영원성과 보편성을 지닙니다. 그 분이 사람이시면서도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의 희생 하나로 2000년 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껍질을 깨고 본질을 변화시켜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고정원씨는 어느 날 자신의 집에 들어갔을 때 늙으신 노모가 처참하게 살해되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방에서는 아내가 역시 처참하게 살해되어 죽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4대 독자인 아들까지 살해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모든 것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 분은 계속 자살을 하려다가 그런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라도 알고 죽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유영철이 잡혔고 아무 이유 없이 세 명을 살해했다고 자백했습니다. 고정원씨는 그 사이에 이미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그를 용서하였습니다. 그러고는 한강 다리로 가서 뛰어내리려고 하는데 지금까지 죽고만 싶었던 심정이 사라졌습니다. 용서 했더니 다시 살고 싶어 진 것입니다.
그러나 살고 싶어 졌을 뿐이지 마음은 그 전보다 더 괴로웠습니다.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사람들 시선 때문이었습니다. 다들 그를 위선이라고 생각했고 같은 피해자 가족들은 미움의 시선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미리 결혼하였던 딸 둘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버지와 더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고정원씨는 용서란 이름으로 더 외로워졌고 더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용서란 한 순간에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딸을 잃은 어떤 사람이 십 몇 년이 지나서야 하루에 분노가 1분정도만 치솟아 오른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 전에 비해서는 매우 짧은 시간입니다. 그렇게 용서도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 해 주었고 고정원씨는 지금까지 그 용서의 먼 길을 가고 계십니다.
이는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신 그 모습을 보며 잠재되어 있는 선한 것을 깨우는 것입니다.
몸에 칼을 수십 차례나 맞은 마리아 고레띠 성녀는 죽어가면서 자신을 찌른 이와 함께 천국에 있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용서를 못하는 이유는 결국 내 자아가 너무나도 강하게 좋은 것들을 가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그 껍데기를 스스로 뚫고 나올 수 있도록 우리의 빛이 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구원자가 된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으면 양심에서 나를 죄인으로 판단하고 하느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그 보상심리로 다른 사람들에게 잘 평가받기를 원해서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오히려 부자유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모든 죄는 그런데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교만하여져서 유일한 심판자인 하느님의 자리까지 올라 사람을 심판하게 됩니다. 그래서 화가 나고 미워하기까지 하게 됩니다. 죄가 없다면 상처 받을 자아도 없고 사람을 판단도 하지 않아서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이 그런 분들입니다. 그 분들은 자신을 온전히 버리시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신 분들입니다. 자신을 버리니 그 안에는 오직 좋은 것들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리스도를 “랍뿌니!”, 즉 ‘스승님!’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그녀를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큰 죄인에서 가장 큰 성녀로 변하게 만든 비밀입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하신 말씀처럼 매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결과 자신의 본질이 그렇게 빠르게 변화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성체와 성혈만 영한다고 그 분과 한 몸이 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매 순간 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분이 내 안에서 살게 하셔야합니다. 그것이 나의 본질을 원숭이에서 사람이 되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요한 13,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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