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전삼용 신부님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김레지나 2010. 3. 25. 22:50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성탄 자정미사가 끝나고 예비신학생 복사들에게 수고했다고 오만 원을 주며 출출할 테니 집에 들어가기 전에 뭘 좀 사먹고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중고등학교 학생이기에 그 정도는 되어야 떡볶이라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그 아이들이 저를 다시 찾아와서는 그 돈을 다시 내밀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많은 액수라 신부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옳다고 판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저는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받는 것도 사랑이고 받지 못하면 주지도 못하게 된다고 다시 가져가 함께 무엇을 좀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받는 연습도 하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아이들의 마음이 착해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제가 주는 사랑을 거부한 것입니다. 사랑은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시작됩니다. 그러나 받지 않는다면 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만 줄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저는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요.”하는 것은 “저는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하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는 사랑의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베드로도 처음에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기적을 체험하고는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하고 주님께 청을 드립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시려고 하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사랑하면 주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겐 자신의 목숨까지 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신 것입니다. 따라서 주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떤 관계도 형성되지 않습니다. 주는 것도 자신을 잊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받는 것도 사실은 자신을 버려야 하는 어려운 일입니다.

 

사제는 신자들에게 많은 선물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신자들은 자신들이 준 선물을 신부님이 사용해 주기를 원합니다. 저도 누구에게 준 선물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마구 대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의 마음이 어떤지를 알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잘 사용하고 싶지만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야합니다. 그러나 가능한 한 선물한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그것을 잘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선물은 그저 물건을 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물하시고 싶었던 것은 당신 자신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아드님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아셨다면 어떻게 그 분을 세상에 주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적어도 한 사람만이라도 그 분을 온전히 받아들일 사람이 있어야 그 분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려운 신학 강의를 해야 하는데 그것을 듣고 싶어서 앉아있는 사람들이 유치원생이라면 그 강의는 하나마나이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단 한명, 그것을 알아들을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만을 위해서라도 신학강의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에 당신 아드님을 주실 때 바로 단 한 명 온전히 자신을 비운 성모님 한 분을 보셨던 것입니다.

 

오늘 축일을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이라 부르는데 사실 ‘예고’라는 말은 오늘의 신비를 충분히 표현해주지는 못합니다. 예고는 그렇게 일어나리라고 알려준다는 의미가 있지만 실제로, 성모님께서 받아들이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의 탄생은 예고대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도 당신 자신을 세상에 주시고 싶어 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준다는 뜻은 모든 것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주는 사랑은 사랑의 정점인 ‘혼인’의 신비를 의미합니다. 혼인은 서로가 자신의 전부를 줄 만큼 사랑하고 상대의 전부를 받을 만큼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는 신비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도 인간과 한 몸을 이루시기 위해 당신 자신인 성자를 세상에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성자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한 몸이 되어서 그가 받을 고통까지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에게 앞으로 구세주의 수난이 어때야 하는지는 감추어져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이는 마치 혼인 서약처럼 한 번 “예!” 함으로써 평생 일어날 모든 일을 감수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지금 한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수난, 또 부활의 영광을 넘어 당신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지속될 서약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종을 하란으로 보내며 아들인 이사악의 아내를 구해오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우물가에서 레베카를 만납니다.

우물가는 혼인이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모세가 아내를 만난 곳도 우물가이고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과 참 남편에 대해 이야기 한 곳도 우물가입니다. 우물은 성령님을 나타냅니다. 성령님의 열매가 사랑입니다. 따라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은 성모님을 통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을 상징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결국 레베카로부터 이사악의 아내가 되겠다는 동의를 받아냅니다. 이 장면이 바로 성모님께서 천사에게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동의하는 장면과 같은 것입니다.

교부들은 이렇게 이 내용을 오늘 축일을 지내고 있는 가브리엘 대천사의 방문과 비유하였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이 종을 보내듯이 당신 아들의 신부의 동의를 받도록 천사를 보낸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에게와 마찬가지로 우리와도 혼인하기 위해 당신 자신, 즉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것이 성체와 성혈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한 몸을 이루는 신비입니다. 그것을 받아 모신다는 것은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우리 신랑과 한 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 분과 한 몸이 되어 그 분이 사신 것처럼 살지 못한다면 아직 우리는 성모님처럼 온전히 그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또 온전히 그 분과 한 몸을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오늘 있었던 “혼인서약”의 완전한 모델을 닮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그 분과의 온전한 혼인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성모님처럼 당신 자신을 온전히 비운 승낙을 매 순간마다 그 분께 드려야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모든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 위해 내 뜻을 매 순간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그 분이 삽니다.

오늘 성모영보 축일은 이런 의미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모든 영성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자신을 온전히 버린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는 그리스도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와 함께 우리 영성의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