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전삼용 신부님

내가 '나'가 되는 길

김레지나 2010. 3. 25. 22:49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순 5주간 화요일 - 내가 ‘나’가 되는 길

 


 

 

아마 제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인 것 같습니다. 외할머니 댁은 부산입니다. 어머니는 저를 데리고 부산에 잠깐 오셨습니다. 외가에 간 첫 기억입니다.

경상도 말을 처음으로 듣는지라 저는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렴풋이 들리는 말은 어머니가 저를 놓고 가면 당신들이 대신 저를 키워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른들 말에 어리둥절해하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집 안팎을 돌아다녀 봐도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정말 저를 두고 가셨다는 생각에 서럽게 많이 울었습니다.

외할머니께서 놀라셔서 나와서 왜 우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없어서 그런다고 대답했습니다. 할머니는 웃으시며 어머니는 목욕을 하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외가댁이 목욕탕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말 조금 있다가 어머니가 목욕하고 나오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안정되었습니다.

저는 이 기억을 마음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안해질 때마다 이 기억을 되살려내곤 합니다.

 

이 경험은 원초적인 불안이 나 혼자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생긴다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어머니의 심장소리를 듣는다고 합니다. 그 심장소리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이 안정된다고 합니다. 실제로 우는 아기를 달래는데 어머니의 품만큼 빠른 방법은 없습니다. 어머니만이 아이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목소리와 심장박동소리, 향기 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 몇 달 동안 익숙해져있는 아기에게 어머니가 그만큼 안정을 준다면 언제인지 모를 때부터 주님과 함께 있었던 우리의 ‘영혼’이야 주님의 존재가 함께 한다고 느낄 때 얼마나 큰 안정을 줄 수 있겠습니까?

아이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우리 영혼도 하느님을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어린 아이가 어머니가 함께 있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것과 같이 우리 영혼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끼지 못하면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임마누엘’이란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 전에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좀처럼 느끼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죄를 없애주시기 전까지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는다고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죄를 짓는 인간 스스로 하느님께 합당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고 느끼고 자신이 하느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공기와 같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고 또 공기처럼 우리 안에도 계시지만 우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너무나 많이 잊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즉, 당신께서 그분의 뜻대로 사시기 때문에 그분께서 당신을 절대 버리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반대로 하느님 뜻대로 살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나의 자아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뜻이 살아있으면 내 안에서 아버지의 뜻이 죽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뜻을 죽이고 아버지의 뜻을 살리신 신비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내가 나’임을 깨닫는다는 말은, 모세에게 당신 이름이 ‘나는 곧 나다.’라고 일러주신 대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눈으로는 가장 나약한 모습이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때문에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 그분의 ‘나’를 공유하고 또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내가 내가 되는 이 신비는, “나를 따르려거든 네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라는 말씀 속에 집약됩니다. 우리도 매일매일 지고가야 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나의 나를 버려야합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존재적 안정감입니다. 아이에게 어머니만큼 중요한 존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존재만큼 안정감을 주는 존재는 없습니다. 내 자신을 죽일 때 비로소 하느님 안에서 내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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