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 5 주일 - 자비 안에서의 정의
한 때 형이 하는 ‘투다리’라고 하는 닭 꼬치 음식점에서 일을 도와준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합동단속으로 미성년자 음주단속이 한창일 때였습니다. 주위 가게 중에 우리 가게만 걸리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더욱 주위를 기울일 때였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 걸리면 2개월 영업정지, 혹은 2개월 치의 매출액을 전부 벌금으로 물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날이 수능이 있던 날인데 마지막으로 술을 먹는 한 팀 중에 수능을 끝내고 온 여학생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얼굴을 대충 보아서 미성년자가 없는 것 같으면 손님들에게 혹시 미성년자가 없느냐고 확인을 하고 그들이 없다고 하면 그들 말을 믿었습니다. 방금 수능보고 온 여학생이 그렇게 늙어 보일 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순진하게 그 사람들 말을 믿었던 거죠.
너무 늦어서 좀 가시라고 하는데도 가지도 않고 끝까지 앉아 있었고 저희는 다른 테이블들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그 때 경찰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술을 먹은 미성년자는 집에 가서 부모님께 수능 끝나서 선배들과 한 잔 했다고 하면 끝나지만 책임은 술집 주인이 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있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 다 꺼내가며 여러 가지로 경찰들에게 사정을 해 보았습니다. 두 경찰서가 동시에 나왔던 것인데 한 명은 젊은 사람 둘이 빚을 내서 하고 있고 미성년자인지 알고 받은 것도 아닌 것을 알아서 봐주자고 했는데 한 명은 정석대로 해야 한다고 절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정석이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정의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저는 마지막에 그 경찰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저씨는 학생 때 이런 데 와서 술 안 드셨어요?” 물론 마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안 걸렸었고 지금은 걸렸기 때문에 법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경찰은 자신을 가장 정의로운 사람으로 여겼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참 인정머리 없는 경찰이었습니다. 과연 진정한 정의는 무엇일까요?
살아가면서 ‘정의’란 말을 참 많이 듣고 많이 쓰고 합니다. 그런데 “정의가 뭐야?”라고 물으면 그것이 뭐라고 선뜻 대답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어떤 사람은 어떤 종류의 정의를 말하는 거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한 분이시듯 정의도 하나일 텐데 말입니다. 그 의미는 정의의 본질적 의미는 잊고 각자 나름대로의 의미를 정하고 적용해가며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공부할 때는 정의란 100원을 주면 100원 만큼의 물건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정의의 여신은 항상 저울을 들고 있습니다. 100원을 주었는데 50원짜리를 100원짜리인 양 속여서 주었다면 정의롭지 못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정의에 따르면 모세의 법은 매우 정의롭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바로 모세의 법(탈출 21,23-25)이고, 함무라비 법전 이후부터 지금의 이슬람교에 이르기까지 적용되어오는 정의의 기본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이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하십니다. 예수님 앞에 유다인들이 끌고 온 여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현행범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그런 죄를 지은 사람은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꼼짝없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그 여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치기 위해서 그 여자를 끌고 온 것입니다. 만약 그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한다면 자비와 용서를 외치시는 당신 말씀과 모순이 되는 것이고 그렇다고 용서해주라고 한다면 모세의 법을 어기는 것이니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대답하든 그 돌들이 예수님께 날라 올 게 뻔 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다그치는데도 땅에 계속 무언가를 쓰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돌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죄들을 하나하나 쓰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래도 대답을 재촉하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치시오.” 어떤 누구도 용기 있게 돌을 던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도 모세의 법을 어기며 살고 있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돌을 놓고 돌아가자 제 생각으론 땅에 썼던 그들의 죄를 지웠을 것입니다. 그들의 죄는 하느님만이 알고 하느님이 지웠으면 영원히 누구도 모르게 지워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돌을 던졌다면 그들의 죄는 땅이 아닌 하느님의 마음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장 정의로운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간음하다 잡힌 여자도 아니고 돌을 든 유다인들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세의 법을 거부하시지는 않으면서도 결국 사람들이 그 법을 따르지 못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법대로 하는 것만이 정의로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간음을 하는 여자는 그 상대방 뿐 아니라 그 상대방의 가정까지도 파괴하는 큰 죄이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겠지만 예수님조차도 그 여자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냥 돌아가도록 놓아두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셨으니 그 모범이 정의로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과연 돌을 들고 있던 유다인들이 생각하던 정의와 예수님의 정의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홀리데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주제는 ‘무전유죄, 유전무죄’였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집이 철거되는 것에 반대하는 동생을 총으로 쏘아서 죽이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이 들어간 교도소의 소장으로 오면서 국가의 힘을 등에 업은 공무원과 가진 것 없는 한 좀도둑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결국 탈옥하고 마지막에 그의 총에 동생처럼 죽고 맙니다. 이 영화는 돈이 없어 좀도둑질을 하다가 잡힌 사람들은 20년씩 살아야 하는데 큰 정치인 아들이라고 해서 수십억씩 횡령하고도 잠깐 들어가 있다가 버젓이 나와서 잘 사는 것이 과연 법이고 정의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정의라 불리는 법 앞에서 피해자가 되어야 했던 그들을 보면서 누구도 법대로만 사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미국이 세계의 경찰이라고 주장하면서 테러집단을 없애겠다고 아무나라나 전쟁을 일으켜서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이는 것이 과연 정의입니까? 한 사람을 죽이면 열 명을 죽이겠다고 보복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과연 정의를 실천하는 것입니까?
오늘 예수님의 눈에 가장 부정의하게 보였던 사람들이 바로 정의를 실천하겠다고 돌을 들고 왔던 그 유다인들이었습니다. 본인들은 법을 따른다고 생각하겠지만 유일한 심판자이신 예수님의 눈에는 그들만큼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왜 그들이 정의롭지 못합니까? 바로 자신들은 법을 어기면서도 남이 법을 어긴 것을 보고 심판하려 들었기 때문입니다.
IMF를 초래했던 우리나라의 모 대통령은 임기가 끝나갈 때 사형수들을 모조리 자기 임기 내에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임기를 마치며 하는 상례적인 절차이기는 하지만 대통령들이 과연 그들의 죽음을 결정할 정도로 깨끗한 사람들입니까? 어떤 대통령은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도 잘 살고 있고 어떤 대통령은 수천억을 횡령하였습니다. 만약 그런 돈들의 100분의 1만 있었어도 그 사형수들이 그런 죄를 짓고 그들의 손에 죽어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도 그런 죄를, 아니 더 큰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단죄하기 때문에 정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단죄하는 사람은 단죄하는 즉시 자신도 단죄 받습니다. 왜냐하면 죄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죄가 있는데 다른 사람을 단죄하기 때문에 정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건 그 간음한 여자에게 돌을 던진 사람은 그것으로써 정의롭지 못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자신들도 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갔기 때문에 그들도 예수님께 단죄 받지 않은 것입니다. 정의는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할 때 바로 세워집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 심판은 유일하게 정의로우신 예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당신의 기준으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마다 다른 기준을 가지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이 똑 같은 환경에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각 개인이 지니고 있는 심판의 기준으로 그 사람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래야 가장 공정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을 심판한 것처럼 그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고 다른 사람을 용서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도 용서할 것입니다. 따라서 심판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심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는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않는다면 예수님도 우리 죄를 심판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자비한 사람은 무자비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보 2,13).
사람이 하느님 앞에 정의롭게 되는 길이 유일하게 하나 있습니다.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판단하지 않으니 하느님도 그 사람을 심판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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