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셉 대축일 - 그래도 잘 받아들이며!
언젠가 요셉 축일이라 무엇을 쓸까 고민하던 중,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요셉 세례명을 가진 한 신부님께 당신은 요셉 성인의 어느 면이 좋으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 신부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요셉 성인은 엄청 불쌍해요. 아내도 빼앗기고... 그래도 잘 받아들이며 사신 것이 불쌍하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농담도 들어있는 말이지만, “그래도 잘 받아들이며 사신 것”에 요셉의 모든 위대함이 스며있습니다.
요셉은 나이어린 아리따운 처녀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런데 몇 달 친척집에 다녀온다더니 배가 불러서 돌아왔습니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배신감을 억누르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알려 추방당하거나 심하게는 돌에 맞아 죽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래도 잘 받아들여’, 남모르게 파혼할 생각을 합니다.
이러고 있는데 꿈에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결혼의 꿈에 부풀어있는 한 건장한 남자에게 이 말은 어쩌면 평생 한 번밖에 가질 수 있는 결혼의 행복을 포기하라는 말과 같았을 것입니다. 함께 살기는 하겠지만 이미 하느님의 정배가 된 성모님을 지켜주는 일 밖에는 남지 않은 것입니다.
요셉은 ‘그래도 잘 받아들여’, 혼인하기로 결심합니다. 사실 그 때 요셉이 느꼈을 것은 앞으로 생과부로 지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혼녀를 끝까지 믿어주지 못한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었을 것입니다.
추운 겨울 만삭인 아내를 데리고 먼 길을 떠납니다. 베들레헴이 도착하여 만삭인 아내를 위해 방 하나 구할 수 없는 무능한 자신을 느끼게 됩니다. 마구간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낳게 놓아두어야 하는 한 가장의 마음은 손발이 다 잘린 무기력함보다 더 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잘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꿈속에 천사가 나타나서 이집트로 피난을 가라고 합니다. 겨우 여행을 위한 것들만 지니고 왔었는데 낯선 곳에 가서 어찌 가족을 부양해야 할지도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잘 받아들여 모든 것을 버리고 이집트로 피난을 갑니다.’
물론 헤로데가 죽었으니 돌아오라는 천사의 말도 잘 받아들여 다시 돌아와 고향인 나자렛에 정착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12살이 된 아이는 자기 맘대로 사라져서 3일 동안이나 찾아 헤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니 뭐라 할 수도 없습니다. 뭐라 하는 분은 성모님이십니다.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을 몰랐습니까?”
이 말에, 요셉은 ‘그렇지, 내 아들의 아버지는 따로 있었지!’라고 새삼 깨닫습니다. 아버지로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지만 아들은 아버지가 따로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한 마디 하지 않고 잘 받아들입니다.’
성경에 요셉이 한 말은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그래도 잘 받아들인 것들’만 조금씩 나올 뿐입니다. 그런데 요셉 성인의 ‘그래도 잘 받아들이는 모습’은 성모님의,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또 아드님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하신 순종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을 성인들 중 유일하게 전례력에서 한 달, 즉 삼월이 그 분께 봉헌되게 만든 영성입니다. 요셉이 성경에 많이 나오지 않고 요셉의 말 한 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그 분은 교회의 원형인 성모님과 교회의 신랑인 그리스도를 지켜주셨기 때문에 ‘교회의 수호자’가 되었습니다.
그 분이 이렇게 큰 성인일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큰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저도 결혼해서 신혼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어요.’ 혹은 ‘제가 왜 그런 고생을 해야 해요?’라고 주님의 뜻을 거부하였다면 더 이상 요셉에 버금가는 다른 순결한 마리아의 배필을 찾기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순결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으셨던 것처럼 요셉도 당신의 순결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순결함보다도 요셉의 순결함이 더 고귀하게 느껴지는 것은 두 분은 원죄가 없이 순결한 분들이셨지만 요셉은 원죄가 있고 성욕도 있는 우리와 정말 똑 같으신 분이셨는데도 위의 두 분처럼 자신을 버리고 모든 것을 품을 줄 아셨기 때문입니다.
내 뜻일 버리고 주님의 뜻이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순결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주님의 뜻을 거슬러 죄를 지었던 이유는 순결하지 않아서입니다. 오늘 원죄가 있으셨던 분 중 가장 순결하셨던 요셉 성인의 축일을 맞아 우리도 그 분처럼 정결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그분께 간구를 청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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