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전삼용 신부님

사랑은 낮아짐

김레지나 2010. 3. 25. 22:44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순 제 4 주간 수요일 - 사랑은 낮아짐

 

 

 

저의 조카가 매우 어릴 때였는데 (유치원 들어가기 전일 것 같습니다) 동생이 또 태어났습니다. 저는 아기를 보고 “아이고, 귀엽다!”라고 했더니, 그 말을 들은 큰 조카가 자기도 어린 줄 모르고, “애들은 원래 다 예뻐요!”라고 당연한 듯이 말해 웃은 기억이 납니다.

정말 사람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은 어릴 때 모습이 가장 예쁩니다. 그런데 모든 동물들의 새끼들 가운데 인간의 아기만큼 무능력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부모에게 보호를 받아야 하는 동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동물의 적자생존 방식 때문에 대부분의 동물들은 새끼를 낳자마자 이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새끼도 어미도 잡아먹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약 그런 환경에 처하게 된다면 바로 멸종해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아기들도 살아남기 위한 가장 큰 무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기도 한데 부모에게 예쁘게 보이는 것입니다. 아마 아기가 울며 보채는 것들을 다 받아 줄 동물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는 부모에게 어떤 요구를 해도 살아남을뿐더러 부모는 아기에게 주기만 하면서도 아기가 잘 커주는 것을 보면 마냥 행복하기만 합니다.

아기가 부모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기는 태어나기 전부터 부모에게 사랑을 받기 시작합니다. 부모는 아무리 귀찮은 것이라도 아기를 위해 감수합니다. 그리고 아기가 한 번 방끗 웃어주면 그 행복이 온 집안에 퍼집니다.

사랑을 받기 위해 뛰어난 능력을 소유하거나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 부모의 자녀가 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것은 비록 동물이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 안에서도 또 하느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서도 똑같이 벌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사랑의 작아짐의 신비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의 관계에 대해 설명해 주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당신의 아버지라 하며 당신을 아버지와 대등하게 만든다고 예수님을 죽이려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읽어보면 예수님께서는 전혀 아버지와 당신을 동등하게 말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예수님도 전능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도 당신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당신 자신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아드님께 모든 권한을 주십니다. 모든 것을 주신다는 의미는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즉, 아드님께 생명도 주시고 하느님으로서 심판하는 권한도 주신 것입니다. 성자께서 하느님이 되시는 것은 높아지려 해서가 아니라 자녀로서 이렇게 자신을 낮추었기 때문에 아버지께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 아버지와 같은 분이 되시는 것입니다.

 

낮아지는 것, 이것이 부모에게 사랑받는 비결입니다. 부모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를 위해서 부모는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식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아기처럼 아버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아버지의 모든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당신께 붙어있지 않으면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을뿐더러 우리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주시며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한 것을 너희들도 하라고 모범을 보여 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내가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계명을 주신 것은 “서로 낮아져라.”, 혹은 “서로 발을 씻어주어라.”하시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요즘은 남녀평등이라 하여 유럽에서는 미사포를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으면 자신의 머리인 남편을 욕보이는 것이라 합니다.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에페 5, 22-23)

아기가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결코 부모보다 낮다거나, 또 성자께서 아버지께 사랑받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낮추는 것이 결코 아버지보다 작아지는 것이 아니셨던 것처럼, 아내도 사랑받아 한 몸이 되려면 남편에게 순종해야합니다.

이는 당시 상황이 그래서 그렇게 쓰인 것이 아니라 진리입니다. 성가정에서도 이집트로 피난 갈 때, 혹은 돌아올 때 천사가 마리아가 아닌 요셉성인에게 나타났고, 또 성전에서 잃었던 예수님을 찾으셨을 때도, “네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너를 찾았는지 아느냐?”하시며 당신보다 남편을 먼저 앞에 놓았던 것처럼 일치는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상대 앞에서 자신을 버리는 것, 즉 낮아짐으로써 시작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앞에서 낮아진 것처럼 당연히 하느님 앞에서 또 우리 서로서로 안에서도 낮아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