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4주간 화요일 - 긍정의 힘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햇볕이 너무도 따가운데다가 쉽게 오아시스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물과 식량도 다 떨어져 두 사람 모두 기진맥진해 있었습니다. 아들은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렸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격려하면서 겨우겨우 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쓰러질 만큼 지쳐 있었지만, 아들이 실망할까 봐 내색하지 않고 겨우겨우 걸음을 옮기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앞에 무덤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무덤들을 보자, 아들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울부짖기 시작합니다.
“보세요, 아버지. 사람들이 이 사막을 다 건너지 못해 결국은 저렇게 죽고 말았잖아요. 우리도 아마 곧 저렇게 될 거예요.”
그러자 아버지는 밝아진 얼굴로 아들을 달랬습니다.
“얘야, 무덤이 있다는 것은 이 근처에 마을이 있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는 사막을 거의 다 건넌 것이야.”
두 사람은 용기를 내어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이 나타났습니다.
살다보면 바라던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희망마저 버린다면 더 이상 남는 것이 없습니다. 정말 포기해야만 할 명확한 근거가 없다면 희망은 끝까지 버려서는 안 되는 덕입니다.
미국의 어떤 곳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일을 하다가 잘못하여 냉동 창고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사람들은 모두 퇴근한 뒤였습니다. 다음 날 사람들이 냉동 창고를 열어보았을 때 자신들의 동료가 꽁꽁 얼어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신기했던 것은 그 냉동 창고는 고장 나서 작동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몸이 얼어 있었던 것입니다. 절망은 그 자체로 죽음입니다.
여자에게는 가끔 ‘가상임신’이란 것이 일어납니다. 아기를 갖기를 너무 바라면 아기가 들어서지 않았음에도 배가 커지고 가슴도 부풀어 오르는 등 아기를 가진 것과 똑같은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은 곧 믿음이 되고 모든 것은 믿는 대로 변하게 됩니다.
우유 시음회에 사람들을 초대해 놓고 몇 명이 우유가 상한 것처럼 이상한 반응을 보이도록 시키고 아무 것도 모르는 이들이 어떠한 반응을 하는지 실험을 하였습니다.
연기자들이 우유를 마시다가 토하는 등의 반응을 보이니 시음회에 참가한 이들도 우유가 비려서 못 마시겠다는 반응을 보였고 한 명은 정말 식중독에 걸려 입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우유는 매우 신선한 우유였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38년이나 자신의 병이 고쳐지기를 기원하며 매일 베짜타 연못에 나와 있는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38년이란 숫자는 그 당시 평균수명이 매우 짧았음을 가만하면 평생 기다렸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가 하루 전에 희망을 잃고 그 곳에 나오기를 그쳤다면 그는 그렇게 죽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죽기까지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그 희망에 하느님께서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치유 받은 병자는 이렇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나 한 번 보십시오.
베짜타 연못만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희망을 거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조차 모르고 다른 것에 희망을 두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또 주위에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 있어서 가파르나움에서 고쳐진 중풍 병자처럼 그를 들어 그리스도 앞에 내려놓을 사람들도 없었고, 그리스도의 이름도 몰라 태생소경처럼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소리 지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치유해주셨지만 심지어는 자신을 치유해 주신 분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삶을 바꾸기를 절실히 원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손수 그를 찾아가 구원해 주신다는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희망은 이렇게 종교까지도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수녀님이 이런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 수녀님이 수녀원에 입회하기 전에 대학을 다닐 때는 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하기보다는 성당에 있는 오르간을 치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합니다. 예수님보다 오르간을 더 좋아하는 것이 이상하기는 하였지만 언젠가는 오르간보다 예수님을 더 좋아하게 되리라는 희망이 있었다고 합니다.
몇 년 뒤에 수녀님이 되기로 결심하고 또 성체 앞에서 “이젠 오르간보다 예수님, 당신 앞에 앉아있는 것이 더 좋아요.”라고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생각이 부정적으로 변합니다. 대신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맡기면 그 분이 다 잘 이끌어 줄 것을 믿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면 더 긍정적이 될 것이고 삶도 그래서 그렇게 믿는 대로 변화되어 나갈 것입니다.
'강론 말씀 (가나다순) > 전삼용 신부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씀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0) | 2010.03.25 |
---|---|
사랑은 낮아짐 (0) | 2010.03.25 |
기적은 긴 여정의 출발일 수도 (0) | 2010.03.25 |
아버지 마음 (0) | 2010.03.25 |
죄의 유용성 (0) | 2010.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