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4주간 토요일 - 말의 한계
남녀탐구생활, 헐, 핸드폰 통화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애인 관계인 남녀가 이런저런 이야기로 오랜 시간 핸드폰 통화를 하고 있습니다. 거의 여자가 이야기를 하며 벌써 밤늦게까지 2시간을 통화하였고 남자는 듣는 것도 지쳐있습니다.
그러다가 여자가 내일 약속이 1시라고 하고 데리러 오라고 합니다. 남자는 마지막 말인줄 알고 그러자고 하며 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벌써 끊으려고 하냐고 따집니다. 남자는 끊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을 합니다.
여자는, “어! 난 할 이야기 다 했고 이제, 니 이야기 해 봐!”라고 말합니다. 남자는 마땅히 할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 때 여자가, “아우! 우린 왜 이럴까, 우린 할 말이 없는 커플이네.”라고 합니다.
남자는 “벌써” 두 시간이나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여자는 “뭐? 벌써? 너 시간 재고 있었구나, 그치? 언제부터 우리가 그렇게 시간 재 놓고 통화했어? 너 변했어. 너 권태기 왔구나, 그치?”라고 따집니다.
남자는 핸드폰이 뜨거워져 그것을 얼굴에 얹고 “아니야, 나 너 무지 사랑해!”라고 하다가 핸드폰이 얼굴에서 땅으로 떨어집니다. 여자는 그것을 눈치 채고 자기 핸드폰만 뜨겁냐고 하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그런 자세로 하냐며 화를 냅니다. 그리고 불만을 이야기 해보라합니다. 남자는 용기를 내어, “지금 같은 별것 아닌 것 가지고 오해하고 화내는 거...”
“뭐? 별거 아닌 거? 난 엄청 심각하다고.”
그리고 남자는 미안하다고 하며 집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여자는 오지 말라고 하며 전화를 끊어버립니다. 남자는 황당해 합니다. 그 때 여자에게 다시 전화가 옵니다.
“너 아직도 집이지. 안 올 거면서 말만 그런 거지. 거 봐. 너는 진심이 없어.”
“아...니... 오지 말라며?”
“야? 너 내가 죽으라면 죽을 거야? 됐어, 절대 오지마, 이제 와도 다시는 안 받아줄 거야. 우리 헤어져, 끊어, 끊어!”
중간에 많은 말들이 빠져서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 잘 표현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구조적으로 남자는 말싸움에서 여자에게 지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뇌의 언어 영역이 여자가 더 발달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말이 비약이 되고 오해가 됩니다.
말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 결코 옳아서 이기는 것만은 아닌 것입니다. 저도 제가 확신하는 것으로 말싸움을 해서 상대의 말문을 막아버린 경우도 있지만 결국 나중에 제 생각이 잘못되었던 것을 알게 된 적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똑똑한 사람들과 단순한 사람들이 대비되어 나옵니다.
군중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인정하지만 어떤 이들은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수 없다고 하며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들도 그것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반박을 하지 못합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경비병을 보내어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경비병들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라고 하며 그 분을 믿게 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율법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판결을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못 배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공부한 사람들의 말에 반박을 할 수 없습니다.
결국 배운 사람 중에 니코데모가 그들의 말에 반박합니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역시 말로는 그들을 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도 이 말을 듣고는 입을 다뭅니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왜냐하면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성경에 없기 때문입니다.
말싸움을 해서 이기는 것이 바로 자신이 옳아서 그렇다고 착각하지 맙시다. 오늘 복음에서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말싸움에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 졌습니다. 진리는 말이 아니라 삶이고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글을 쓰지 않은 것입니다.
논쟁이 있다면 웬만하면 그 논쟁에 끼어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결국 받아들일 마음이 있으면 받아들일 것이고 그런 마음이 없으면 예수님이나 스테파노처럼 말하더라도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말싸움에서 지면 미워하여 해하려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말이나 논쟁으로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삶으로 증거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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