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책에서 옮긴 글

가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어라. - 한비야

김레지나 2009. 8. 17. 22:50

가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어라.


                                2007년 9월~12월 짐바브웨에서


2007년 9월, 짐바브웨로 4개월간 파견 근무를 오게 됐다. 이곳은 가장 높은 수위의 재난인 카테고리 3 지역으로, 수년간 계속된 가뭄 때문에 수십만 명의 아이들이 굶어 죽고 있는 현장이다. 그러나 국가비상사태까지 선포된 급박한 현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9월의 짐바브웨는 라일락 모양의 보라색 자카란다가 만개하여 눈부시게 환하다. 여학생들이 보라색 가디건 교복 색깔이 자카란다와 어우러져 여자아이들이 꽃처럼 예뻤다.

 나는 이곳에 130만 명에 대한 긴급구호 식량 지원을 하러 왔다. 와 보니 식량도 식량이지만 물가 문제가 더 심각했다. 한 사람의 독재자가 국민들을 얼마나 못살게 굴 수 있는지, 어떻게 나라 전체에 돌이킬 수 없는 해악을 끼치는지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정부가 물가 안정 대책이랍시고 실제 거래 가격의 3분의 1 선에서 물가를 동결하는 바람에 상인들이 가게에 물건을 내놓지 않아 큰 가게건 작은 가게건 금방 이사를 나간 것처럼 선반이 텅텅 비어 있었다. 실제 거래는 모두 블랙마켓에서 이루어지니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을 수밖에. 물가가 올랐다고 돈을 마구 찍어내기까지 해서 물가는 오전 다르고 오후 다르게 뛰고 있었다. 물가 상승률은 연일 세계 신기록을 갱신 중이었다. 이곳에선 일상적으로 쓰는 지폐가 20만불짜리 신권인데, 현지 직원들과 저녁이라도 한번 먹으려면 이런 고액권을 작은 배낭 가득 채워 가도 될까 말까다.

 내가 머물고 있는 월드비전 국제 직원 숙소는 무가베 대통령이 권력을 잡자마자 보란 듯이 빈손으로 쫓아낸 백인 농장주가 살던 곳이다. 호텔 앞마당 같은 멋진 정원과 수영장까지 딸린 그럴듯한 2층 저택이지만 수돗물도 안 나오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전기를 옆 나라인 남아공과 잠비아에서 수입해왔는데 최근 정부가 전기세를 내지 못해 그 나라들에서 공급을 제한했다고 한다. 몇 달 동안 전기 없이 지내려면 얼마나 불편할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숙소에서의 첫날, 올빼미 체질인 나는 밤늦게까지 뭘 좀 하고 싶었지만 촛불 아래서 저녁밥을 먹은 후 일기만 겨우 쓰고 11시고 되지 않아 잠자리에 들었다. 그랬더니 다음 날 새벽 5시에 눈이 떠지는 게 아닌가. 잠이 완전히 깼는데 깜깜한 방 안에 멀뚱멀뚱 앉아 있는 게 싫어서 밀크 커피를 한 잔 만들어 들고는 새벽어둠이 가시지 않은 푸르스름한 정원으로 나가보았다. 형체만 어렴풋한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동트기 직전의 하늘은 장엄하고 경건했다.

 아침 기도를 하려고 성호를 긋고는 하느님, 하고 불렀더니 갑자기 마음이 따뜻해졌다. ‘내 딸아, 나 여기 있단다’하며 하느님이 바로 곁에 서 계시는 것 같았다. 괜히 신이 나서 정원 한 구석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평소 하던 대로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오늘 하루를 선물로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오늘도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함께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식구들, 가까운 친구들, 우리 팀원들과 짐바브웨를 위한 기도를 드렸다. 이어서 이곳에 제발 비를 내려 달라고 간청한 후 특별히 오늘은 짐바브웨 파견 근무 첫날이니 마치는 날까지 나를 준비하신 대로 써달라는 기도를 했다.

 왠지 여기서 일을 하는 내내 하느님이 함께하실 것만 같아 시작부터 기분이 상쾌했다.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떠보니 아침의 첫 햇살이 발치에 와 있었다. 출근할 때까지 아직 시간도 남았고 날도 환하게 밝았는데 별다른 읽을거리도 없으니 내친 김에 성경을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선하고 경건한 짐바브웨의 새벽 기도와 성경 읽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고백컨대 내 평생 넉 달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두 시간씩 기도하고 묵상하고 성경을 읽은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시골로 현장 근무를 나가는 날도 기도와 성경 읽기를 빼먹지 않았다. 이른 아침마다 하느님, 이라고 부르기만 해도 그 즉시 그분과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하느님과 일대일로 면담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일과가 시작되기 전에는 읽는 성경 말씀은 꿀처럼 달고 가시처럼 따끔했다.  새벽에 몸은 더 자고 싶다고 아우성인데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에 벌떡 일어난 날도 많았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나 같은 아침 잠꾸러기가.

 그러던 어느 월요일 아침, 학교 급식 배분 상황을 체크하러 갔을 때였다. 아침인데도 아이들 대부분이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이 마을에 전염병이 도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모두 배가 고파 쓰러져 있는 거였다. 2학년 교실에 들어가 아침밥을 먹고 온 사람이 있는지 물었더니 마흔일곱 명 중 겨우 다섯 명만 손을 들었다. 나머지 아이들에겐 우리가 점심 급식으로 지원하는 옥수수 죽이 그날의 유일한 음식이라고 했다. 그나마 평일에는 이렇게 한 끼라도 먹을 수 있지만 주말엔 꼼짝없이 물로 배를 채운단다. 금요일 점심에 죽 한 그릇 먹은 후 이틀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으니 저렇게 쓰러져 있을 수 밖에. 아이들에게 이 옥수수 죽은 그야말로 생명줄이다. 한참 자라는 아이들이 죽 한 그릇에 배가 부르거나 키가 쑥쑥 크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굶어 죽는 건 면할 수 있으니까.

 이런 현장에서는 하루 종일 입에서 단내가 나고 파김치가 되도록 일하지만 매일 아침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는 두 시간 동안만은 파견 근무가 아니라 영성 훈련이나 장기 피정을 온 것 같았다. 아침마다 하느님께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더 잘 도울 수 있을지 지혜를 달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

 짐바브웨에서의 주일 예배도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곳에서 첫 번째 맞는 주일에 근처 성당으로 데려다주기로 한 현지 직원이 성당 미사는 너무 조용해서 지루하다며 그날 딱 한 번만 ‘다이나믹한’ 자기 교회에 가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아프리카에 왔으니 아프리키식 예배를 경험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그가 다니는 오순절 교회에 따라갔다. 정말 그곳의 예배는 정신을 쏘옥 빼놓았다. 예배가 아니라 버라이어티쇼 같았다.

 대형 극장을 빌려 하는 예배는 잘 차려입은 성가대가 밴드 반주에 맞춰 춤을 곁들인 신나는 복음성가를 부르면서 시작되었다. 사십대 에너지 덩어리인 목사님과 3백여 명의 교인들은 성가대의 노랫소리에 질세라 두 손을 높이 들거나 몸을 흔들며 목청껏 합창을 했다. 그날의 주제는 ‘겸손하라’ 목사님은 이 단순한 메시지를 하듯 마이크를 들이대며 반복해 따라 하게 했다.

 그뿐인가. 목사님이 “오늘 이 설교를 들었으니 하느님께 지금보다 더욱 겸손한 삶을 살겠다는 결심 기도를 드립시다.” 하니 교인들은 몸을 흔들면서 극장이 떠내려갈 정도로 크게 통성 기도를 하지 않나. 손을 하늘로 뻗어 덜덜 떨면서 방언 기도를 하지 않나. 심지어 기도 중 성령을 받았다며 눈앞에서 앞으로 옆으로 뒤로 팍팍 쓰러지기까지 했다. 이런 일은 세 시간 내내 계속되었다. 잡음이 심한 앰프는 또 얼마나 큰 소리를 내던지. 혼이 쏙 빠진 나는 그날 극장을 나가면서 결심했다.

 ‘아유, 정신없어...... 이 교회에 다시는 오지 말아야지.’

 그러나 결국 파견 근무 내내 그 교회에만 나가게 되었다. 짐바브웨가 아니면 언제 이런 요란뻑적지근한 교회에서 예배를 보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보다는 예배에 참석하고 나면 다음 일주일간 행동을 할 때나 말을 할 때나 말을 할 때나 그 내용을 생각하고 실천하게 하는 ‘다이나믹’ 목사님의 단순 명료한 설교 메시지에 더 끌렸다. 현장에서 가슴 아픈 일을 겪은 주에는 그 단순함이 큰 위로가 되기도 했다.

 도시 빈민가의 에이즈 말기 환자들을 위한 식량 지원을 나갔을 때는 특히 더 그랬다. 이 프로그램의 대상자는 모두 11,403명. 그런데 놀랍게도 그 가운데 열 살 미만이 천여 명이고, 한두 살짜리 딸을 꼭 껴안고 정성껏 밥을 먹여주는 모습이 짠했는데, 이틀 후 다시 찾았을 때는 그 엄마를 볼 수 없었다. 그날 점심을 먹고는 오후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는 거다. 우리가 돕는 에이즈 말기 환자 가운데 이렇게 죽는 사람이 한 달에 3백 명도 넘는다. 돌보던 사람을 눈앞에서 허무하게 떠나보내는 일, 이런 일들은 아무리 여러 번 겪어도 가슴 아프고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하느님이 여기서 내가 뭘 하길 바라시는 걸까 더욱 애타게 기도하게 된다.

 한번은 설교 도중 목사님이 매일 시간을 정해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보라며, 그런 사람들만이 하느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아, 바로 나잖아? 쑥스러워 손을 들지는 않았지만 약간 우쭐해졌다. 그러나 우쭐함도 잠시, 내 입에서는 이런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근데 그 음성이 도대체 언제쯤에나 들린단 거야?”

 그 무렵 나는 짐바브웨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문제와 함께 어떻게 사십대를 마무리하고 다가오는 오십대를 준비해야 할지를 놓고 매일매일 기도하고 있었다. 오십대에도 재난 현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나의 소망이 하느님도 원하시는 바인지 확실히 알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기도가 부족해서 내가 다 정해놓고 하느님 뜻대로 하세요, 하든지 하느님 왜 날 이런 잘못된 길로 인도하셨나요, 하며 원망을 퍼붓지나 않을지 걱정되었다.

 그래서 그해 첫날부터 ‘제가 무엇을 하오리까?’라고 기도 제목을 정해놓고 아침마다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였지만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답답하고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매일 두 시간씩 기도도 열심히 하고 성경도 꼬박꼬박 읽는데, 하느님은 왜 속 시원하게 말씀해주시지 않는 걸까? 왜 이렇게 애를 태우며 뜸을 들이시는 걸까? 이제 그만 말해주시면 안 되나?

 어느덧 4개월간의 파견 근무가 끝나고 짐바브웨에서의 마지막 주일 예배 시간이 왔다. 평소 같으면 강단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할렐루야를 외치고 과장된 몸짓과 목소리로 한껏 예배 분위기를 고양해야 할 목사님이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조용했다. 성가대에게도 율동은 자제하고 잔잔한 곡만 부르라고 부탁하면서 “오늘은 기도를 좀 해야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목사님의 이런 진지한 모습은 낯설었지만 요란하게 설교할 때보다 훨씬 카리스마 넘치고 멋있었다. 그러고는 예배 세 시간 내내 세계 평화를 위해, 남아프리카의 가뭄 해갈을 위해, 짐바브웨 위정자들을 위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결혼 생활이니 경제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해 등등 한 제목 당 10분 정도씩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기도도 큰 소리 내지 말고 혼자고 속으로 하라는 주문이었다.

 그러길 한두 시간쯤 했을까? 목사님이 느닷없이 “다음은 앞으로 10년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했다. 깜짝 놀랐다. 바로 지난 1년 동안 매일 아침 간구했던 내 기도 제목 아닌가. 더욱 놀라운 건 그 다음 말이었다.

 “영어나 쇼나어(짐바브웨 현지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은 속 시원하게 자기 모국어로 기도하십시오.”

목사님이 나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했을 리는 없었다. 내가 유일한 외국인이긴 했지만, 예배 시작 시간에 딱 맞추어 갔다가 끝나면 제일 먼저 나왔기 때문에 목사님은 내 존재 자체도 알 리가 없었다. 혹 다른 사람들이 말해줘서 알고 있었다고 해도 그날은 불도 켜 있지 않은 깜깜한 2층 구석에 박혀 있었기 때문에 무대에서 내가 보일 리가 없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평소처럼 내가 무슨 일을 하길 바라시는지 알고 싶다며 간절히 기도를 하고 있는데 아무 이유 없이 굵은 눈물방울이 뺨으로 뚝, 떨어졌다. 그 순간 가슴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지면서 어떤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가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어라.”

 아, 드디어, 마침내 침묵하시던 하느님이 내게 말씀을 해주셨다. 놀랍기도 하고 벅차기도 하고 황송하기도 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건 바로 이것이었구나. 가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내가 지금 짐바브웨에서 할 일이고 앞으로 10년간 해야 할 일인 것이다. 앞으로 어디에 가서 누구의 눈믈을 닦아주라시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여기서 할 일은 분명하다. 끼니를 굶고 학교에 가는 자식을 보며 마음 속으로 흘리는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 에이즈로 죽어간 스무 살 엄마처럼 병들어 오갈 데 없는 사람이 생애 마지막 음식을 먹으며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는 일, 그리고 엄마를 잃고 혼자 남은 두 살짜리 어린 딸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이다. 벅찬 가슴으로 나는 하느님께 대답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 말씀 순종하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