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열쇠
우리가 운영하는 병원을 찾아오기 위해 하루나 이틀, 또는 삼사 일을 걸어야 하는 환자들의 불편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매주 수요일마다 먼곳의 숲속 마을로 이동 진료를 나간다.
지프차에 약품상자와 물, 그리고 비스킷과 옷 등을 싣고 아침 일찍 출발해 마을에 도착하여 차 경적을 울리면 ,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앞 다투어 모여든다. 진료를 받아 약도 받고 운 좋으면 주사까지 맞을 수 있는, 두세 달 만에 한 번 오는 소중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5년 전 ‘초나’ 라는 나환자 마을로 진료를 나갔던 그날의 일은 아직도 나의 가슴에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다. 진료를 마친 뒤 나환자들에게 다달이 배급하는 강냉이와 식용유를 나누어 주었다. 한 어머니가 예닐곱 살 정도의 딸아이를 데리고 와 나병이 아니냐며 몸에 난 반점들을 보여주었다. 피부의 신경검사를 해보니 간단한 체부백선(무좀)이었다.
어머니에게 “다행히 나병이 아니네요, 축하합니다!”라고 하자 기뻐할 줄 알았던 어머니가 아주 서운해하며 딸아이의 손을 잡고 힘없이 돌아섰다. 어머니의 손에 쥐어져 있던 강냉이와 식용유를 담아가기 위해 미리준비한 비닐포대와 작은 깡통이 눈에 들어왔다.
아뿔싸! 모녀가 슬퍼하는 이유를 그때서야 알아차렸다. 허탈하게 되돌아가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뒤로 살짝 불러 강냉이와 식용유를 주긴했지만 집에 남아 있는 아이들의 입에 풀칠이라도 해보려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 나병에 걸렸기를 바랄 수 밖에 없었던 그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려보니 가슴이 저려왔다. ‘원수 같은 가난이 사람을 이렇게도 비참하게 만드는구나’ 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대상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왠지 화가 치밀어 올라온다. 인간의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해주지 못하게 하는 나눔의 정신이 부족한 이기주의적인 사회 구조가 그 ‘화’의 대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빈(貧)만 있고 부(富)가 없는 이곳은 말 그대로 빈부의 차가 없는 곳이다.
모두가 가난한 곳이지만 그중에서도 정말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나환자들이다. 감각을 못 느껴 손과 발에는 항상 상처들이 있고 고름이 터진 상처 때문에 악취 또한 대단하다. 차마 집이라고 할 수 없는 움막에서 거처하는 이들은 가족들로부터, 그리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아 마음의 상처또한 깊다. 이들에게 식량을 배급하고 집을 지어주며 ,간단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땅을 마련해주고 가끔씩 마을에 들러 치료도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의 친구가 되도록 노력을 해보지만 그들의 안과 밖의 깊은 상처를 어루만지기엔 턱 없이 부족함을 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도움을 줄 수 없고 오직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만 살아가는 그들이지만, 그들과 지내면서 그들은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중에 하나는 조그마한 것에도 감사를 느끼고 그것을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이다. 보통 이곳 주민들은 약, 주사, 음식 등 모든 것을 무료로 베풀어도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다. 조그마한 것이라도 들고 와서 고마움을 표현하는 경우는 더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의 문화의 벽을 깨고 직접 농사지은 호박이나 날씬한 아프리카 토종닭을 들고 와 고맙다는 인사를 한 사람이 6년동안 딱 세 사람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두 명이 놀랍게도 나환자들이다. 과부의 헌금처럼 닭 한 마리는 그들에게 엄청난 재산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정말 육체적으론 문드러지고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이들이지만 마음만은 어느 누구보다도 부유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감각신경이 마비되어 뜨거운 것 아픈 것을 느끼지 못해 손과 발에는 화상이나 상처가 가득하지만 감각 신경의 마비를 보완이라도 하듯 보통사람보다 수십배나 민감한 영혼들을 지니고 있다.
자그마한 것에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아는, 그 감사를 기어코 그 무언가로 표현을 하고 싶어 하는 아름다운 영혼 말이다. 그들을 보면서, 육체적으론 완전한 감각을 지니고 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받고 그것들이 나의 것인 양 당연히 여길 뿐 전혀 감사하는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들의 무딘 마음은 혹시 나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들은 흉측한 상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멀리하게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을 주위로 불러 모아 하나로 하는 신비스러운 능력도 가지고 있다.
1999년 여름, 전쟁 중이던 이곳을 처음 찾아왔을 때 많은 것들이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해 뼈만 앙상히 남아 있는 사람들, 전쟁으로 인해 부서진 건물과 수족이 없는 장애인들, 거리를 누비는 헐벗은 사람들, 한 동이의 물을 얻기 위해 몇 시간을 걸어야만 하는 아낙네들, 학교가 없어 하루 종일 빈둥거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전기에 감전된 듯한 충격으로 며칠을 멍하게 지냈다.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삼사 일이 흘러 있었고 이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한 의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나환자 마을을 방문하면서는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단순한 인간적인 의지를 넘어서 다른 차원의 특별한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삶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고 가장 버림받은 삶이 분명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서 그들을 위로하며 함께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존재를 느낄 수가 있었다.
그때 느낀 예수님의 존재는 슬픔의 늪에서 피어난 한 송이의 아름다운 꽃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예수님의 부족한 손과 발이 되어 그들과 함께하며 살고 싶은 강한 소명도 느끼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톤즈에서 열흘을 지낸 뒤 떠나오면서 ‘서품을 받은 후 이곳으로 꼭 돌아오리라’는 강한 다짐을 가지게 한 것은 가난과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인간적인 동정심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안에 살아 움직이고 계시는 신비스러운 힘을 지닌 ‘나환나들의 삶’ 때문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로 하여금 소중한 많은 것들을 뒤로 한 채 이곳 수단까지 오게 한 것도, 열악한 환경이지만 후회 없이 기쁘게 살 수 있는 것도, 모두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 주위로 모이게 하고 주님의 존재를 체험하게 만드는 보잘것 없는 나환자들의 신비스러운 힘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머리숙여 감사하게 된다.
이러한 나환자들의 특별한 능력을 보면서, 식물인간, 뇌성마비, 뇌졸중, 자폐증 등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환자 가족들과 함께하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가끔 묵상을 하게 된다. 환자들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아픔을 가슴에 품고 평생 그들을 보살펴야 하는 가족들의 고통은 당해보지 않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보다 더 큰 멍에나 십자가가 이 세상에 또 있으랴.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들이 다른 가족구성원들에게 미치는 힘은 때로는 상상을 초월한다.
가족을 하나되게 만들고 가족들에게 참된 신앙을 가지게 하며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깊게 체험하게 하는 그들의 힘은 신비스럽기 이를 데 없다. 물론 시간이 많이 걸리고 엄청나게 큰 고통의 문을 통과해야 하겠지만, 결국은 아무런 힘도 없는 환자들이지만 우리에게 뜻밖의 큰 은총의 선물을 주는 그들에게 우리가 오히려 감사를 해야 하고 그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느님께도 감사를 드려야 되자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에게 오신 작은 예수님일 수도 있고, 마지막 심판에서 우리가 오른쪽으로 분류되게 하기 위해 미리 파견된 천사일 수도 있으며, 우리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줄 천국의 열쇠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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