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책에서 옮긴 글

풍금 위에 어린 예수님 미소

김레지나 2009. 6. 18. 21:16

 

이태석 신부님 글.hwp

 

풍금위에 어린 예수님 미소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적 무척이나 음악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시절 목소리가 가늘고 높아 청년 성가대의 소프라노로 활약을 했고 중학교 땐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독창과 작곡을 배워 콩쿠르에 나가 여러 번 입상을 하기도 했던 걸 보면 음악적 끼가 어느 정도 있었던 모양이다.


어떤 종류이든 악기만 보면 나의 가슴은 콩닥콩닥 설레기 시작했고 한 고집 했던지라 악기를 처음 대할 땐 식음을 전폐하고 오직 그것 하나만 물고 늘어져 며칠 내에 결판을 내곤 했다.


악기 중에서 유난히도 나를 설레게 만든 악기는 피아노다. 피아노의 빠르고 경쾌한 소리는 혀에서 살살 녹는 달콤한 솜사탕 같은 느낌이었고 깊고도 장엄한 베이스 건반의 소리는 마치 피아노의 나무망치가 내 영혼 깊은 곳의 베이스 현을 사정없이 두들겨대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강렬했다.


하지만 피리나 기타 같은 간단한 악기야 꼭 사지 않아도 주위에서 빌리든지 하여 어떻게 해볼 수 있었지만, 많아야 동네에서 한두 집 정도만 피아노를 가지고 있던 때라 레슨을 받는 것 외에는 피아노를 배울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 시절엔 피아노 레슨은 부잣집 아이들만이 받을 수 있었던 하나의 특권과도 같은 것이었다.


배우고 싶은 마음이야 강렬했지만 10남매의 학교 공납금을 대기도 빠듯했던 집안 형편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부모님을 조를 수는 없었다. 옳게 한번 떼를 써보지도 못 한 채 피아노에 대한 열정을 스스로 포기하는 데 적지 않은 아픔을 겪어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다행히 성당엘 가면 피아노는 아니지만 풍금은 칠 수가 있었다. 성가책을 교본 삼아 혼자서 레슨 아닌 레슨을 시작했고 몇 달 후엔 어린이미사 반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풍금 연습을 위해 오후 대여섯 시쯤에 성당에 가곤 했는데 풍금은 진노랑 오후 햇살이 내려앉는 그런 곳에 놓여 있었고, 묘하게도 제대 위 십자가의 예수님 시선도 풍금이 있는 곳으로 내리꽂혔다.


풍금을 치면서 내 얼굴을 강하게 비추던 오후 햇살을 자주 의식하곤 했고 때로는 내 얼굴을 비추던 것이 햇살만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바라보던 예수님의 따스한 시선이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성당에서 가졌던 그 시간들이 단순한 풍금 연습시간이 아니라, 피아노를 짝사랑하며 풍금을 치던 가난한 한 소년을 달래며 지켜봐주시던 예수님의 인간적인 부성애를 피부로 느낀 소중하고 은혜로운 순간들이었던 것 같다.


어느덧 30여 년이 흘러 지금은 지구의 반대쪽 아프리카 수단이라는 곳에 와있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건물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마음도 상처받고 부서져 있었다. 음악을 통해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씨앗을 쉽게 심을 수 있을 것 같아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피리와 기타 그리고 오르간으로 시작했다.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생전 처음 들어보는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는 것이 많이 어려우리라 생각했지만 예상 외로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몇몇은 피리는 물론이고 기타를 배운지 하루 이틀 만에 노래를 불러가며 제법 빠르게 쳐대기 시작했고 아이삭과 바보야라는 천재 같은 아이들은 일주일 만에 오르간을 양손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어릴 적 처음 악기를 대할 때 콩닥거리던 가슴이 이 아이들을 보면서 다시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진흙에서 진주를 찾은 느낌이었고,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눈을 바라보며 ‘주님, 감사합니다. 당신께서 먼저 이곳에 오셔서 이곳 아이들에게 작은 씨앗들을 미리 뿌려 놓으셨군요. 당신이 뿌린 작은 씨앗들이 싹을 잘 틔우게 물과 거름을 잘 챙겨 주겠습니다.’ 하는 기도가 나도 모르게 나왔다.


은인들의 도움으로 2년 전에 브라스밴드 악기들을 준비했다.


트럼펫, 트롬본, 클라리넷 등의 악기들로 구성된 32명의 제법 큰 밴드였다. 나도 직접 만져보기는 처음인 악기들이었다. 새 악기를 대하는 나의 가슴, 여전히 콩닥거리기는 했지만 그때는 달랐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지! 진정하자 진정해!’ 라고 자신을 억누르며 악기에 끼어 있는 설명서를 읽어가며 이렇게도 불어보고 저렇게도 불어보고 이리 뚝딱 저리 뚝딱, 일주일 후에 모든 악기들의 기본 스케일(음계들의 자리)과 악기를 제대로 부는 요령을 터득해 아이들의 레슨 준비가 완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니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첫 곡을 합주하려면 적어도 두세 달은 걸리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하루 이틀 만에 적어도 한 옥타브 음계의 소리를 쉽게 불어대고 있었다. 대단한 아이들이었다. 둘째 날 저녁, 부랴부랴 첫 곡 ‘주 찬미하여라’(Laudate Dominum)를 편곡하여 맹훈련을 시작했는데 아이들은 어려운 금관악기들을 소 치는 아이들이 풀피리 불듯이 쉽게도 불어댔다. 합주연습 후 4일째 되는 날 첫 합주곡을 다같이 연주해냈다.


그날 그 감격을 어떻게 글로 표현할 수 있으랴! 그날은 이 곳 톤즈에서 수십 년간 울려 퍼지던 총성 대신 클라리넷과 플루트 그리고 트럼펫으로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처음으로 울려퍼진 의미 깊은 날이었다.


연주가 끝난 후 ‘총과 칼들을 녹여 그것을 클라리넷과 트럼펫을 만들면 좋겠다.’ 라고 표현하는 아이들의 눈망울 속에서 음악을 통해서도 활동하시는 주님의 흔적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밴드를 시작한 지 두 달째 되던 즈음 ‘천사의 양식(Panis Angelicus)’ 이라는 클래식 성가를 시도해보았다. 아이들이 빠르고 경쾌한 음악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곡을 시작하면서 심금을 울리는 장엄하고 느린 곡들을 오히려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파트별 연습이 끝난 후 합주를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이 곡을 여러 번 들었지만 그렇게 거룩하고 장엄한 느낌으로, 아니 마치 깊은 관상기도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기는 그날이 처음이었다. 툭툭 불거져 나오고 싶어 하는 교만의 본성을 절제하며 애절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아름다운 선율이 피아니시모로 나오다가, 후반부엔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감동을 표현하기라도 하듯 소프라노 색의 트럼펫이 클라이막스를 선동하고, 그 뒤를 바리톤 색의 트롬본이 뒤따르는 군중처럼 반복하며 따라온다.


감동이 나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고 음악에 무아지경 몰입되어 뜨겁게 상기된 아이들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몇몇 아이들의 눈에 맺힌 진주 같은 이슬도 보였다. 형언 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 그리고 충만함이 나를 전율케 만들었다. 천상낙원의 음악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짧은 시간에 나의 삶이 하나의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릴 적 피아노 레슨을 받고 싶어 했던 것, 가난 때문에 성당에서 풍금만을 쳐야 했던 것, 얼굴을 따갑게 내려 비추던 성당의 오후 햇살과 십자가 위에서 따스한 시선으로 지켜봐주시던 예수님의 모습도 스쳐 지났다. 그리고 이곳의 가난, 전쟁, 파괴 등이 하나의 영상처럼 지나갔고 가난하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소중한 탤런트를 받은 이곳 아이들의 모습이 나의 어릴 적 모습과 겹쳐지기 시작했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주체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한국에서의 나의 과거와 수단에서의 선교사로서의 현재가 시공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었음을 느낄 수가 있었고 그것은 마치 하느님에 의해 짜여진 하나의 ‘짜깁기’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풍금을 치고 있을 때 십자가 위에서 나를 바라보던 예수님은 그때 이미 훗날 내가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오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이며, 그때부터 나의 삶을 짜실 계획을 하셨고 필요한 것들을 준비시켜주셨으며 지금껏 계속 곁에서 지켜봐주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보잘것없는 미천한 나에 대한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감사의 눈물이 장맛비 내리듯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주님의 거대한 사랑의 물결이 ‘음악’이라는 내 삶의 작은 틈을 통해 흘러 들어와 이젠 내 삶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내 삶이 독립된 나 혼자의 삶이 아니라 이 곳 사람들의 삶의 일부이기도 하며 이곳 사람들의 삶도 내 자신의 삶의 일부라는 것을, 그리고 시공을 초월한 각기 다른 삶들의 조화로운 섞임이 십자가 위에서 바라보고 계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이었다는 것을 아프리카의 한 작은 마을에서 ‘천사의 양식’ 이라는 성가를 들으며 깨달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진작 깨달았으면 이 먼 곳까지 오지 않았아도 되었건만.


 머리 나쁜 중생에게 이 간단한 깨우침을 주기 위해 이곳 아프리카까지 보내셨으니 머리가 나쁘면 수족이 고생한다는 말이 바로 나를 두고 한 말인가 보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이곳 아이들의 삶을 한 올 한 올 짜실 것이다. 각기 다른 형태와 색깔의 짜깁기를 하시겠지만, 나의 삶이 이곳 아이들의 삶의 짜깁기에서 작지만 꼭 필요한 구석의 한 부분으로 남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태석 신부님 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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