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책에서 옮긴 글

장영희(마리아)교수의 글

김레지나 2009. 5. 11. 15:01

지난 9일 하느님의 품에 안기신 장영희(마리아)교수님의 글을 몇 편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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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느 잡지와 인터뷰를 했다. 최근 몇 년간 나에 대한 기사는 거의 암 환자 장영희, 투병하는 장영희에 국한되어서 그냥 인간 장영희,  선생으로서의 장영희에 초점을 두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나는 문학의 중요성, 신세대 대학생에 대한 생각 등을 열심히 성의껏 말했다. 오늘 온 잡지를 보니 기사 제목이 ‘신체장애로 천형(天刑) 같은 삶을 극복하고 일어선 이 시대의 희망의 상징 장영희’였다. 


기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난 심히 불쾌했다. 어떻게 감히 남의 삶을 ‘천형’이라고 부르는가.  맞다.  나는 1급 신체장애인이고, 암 투병 생활을 했다. 그렇지만 한 번도 내 삶을 천형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신체장애가 끔찍하고 비참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말이 있듯이 나름대로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 큰 불편을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  장애인이 ‘장애’인이 되는 것은 신체적 불편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장애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건 단지 신체적 능력만을 능력으로 평가하는 비장애인의 오만이다.


 서울 명혜학교 복도에는  윤석중 씨가 쓴 다음과 같은 시가 걸려 있다. 


   장애를 천형이라 말하는 오만

   사람눈 밝으면 얼마나 밝으랴

   사람귀 밝으면 얼마나 밝으랴

   산 너머 못 보기는 마찬가지

   강 너머 못 듣기는 마찬가지

   마음눈 밝으면 마음귀 밝으면

   어둠은 사라지고 새 세상 열리네

   달리자 마음속 자유의 길

   오르자 마음속 평화동산

   남 대신 아픔을 견디는 괴로움

   남 대신 눈물을 흘리는 외로움

   우리가 덜어주자 그 괴로움

   우리가 달래주자 그 외로움.


 영어 속담에 ‘Count your blessings. (네가 누리는 축복을 세어 보라)’ 라는 말이 있다.   누구의 삶에나 많은 축복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하는 말이다. ‘천형’이라고 불리는 내 삶에도 축복은 있다. 


 첫째, 나는 인간이다.

개나 소, 말, 바퀴벌레, 엉겅퀴, 지렁이가 아니라 나는 인간이다.   지난 여름 여섯 살배기 조카와 함께 놀이공원에 갔는데   돈을 받고 어린아이를 말에 태워 주는 곳이 있었다. 예닐곱 마리의 말이 어린아이를 한 명씩 등에 태우고  줄지어 원을 그리며 돌고 또 돌았다.   목에는 각기 평야 질주 번개 무지개 바람 등 무한한 자유를 의미하는 이름표를 달고 말들은 직경 5m나 될까 말까 한 좁은 공간을 종일 터벅터벅 돌았다. 아, 그 초점 없고 슬픈 눈.   난 그때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축복에 새삼 감격하고 감사했다.


둘째, 내 주위에는 늘 좋은 사람만 있다. 좋은 부모님과 많은 형제 사이에서 태어난 축복은 말할 것도 없고, 내 주변에는 늘 마음 따뜻한 사람, 똑똑한 사람, 재미있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들을 만난 것을 난 천운이라고 생각한다. 


셋째, 내겐 내가 사랑하는 일이 있다. 가치관의 차이겠지만, 난 대통령 장관 재벌보다 선생이 훨씬 보람 있고 멋진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한국에서 손꼽히는 좋은 대학에서   똑똑한 우리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것도 내겐 천운이다. 


넷째, 난 남이 가르치면 알아들을 줄 아는 머리, 남이 아파하면 나도 아파할 줄 아는 마음이 있다. 몸은 멀쩡하다손 쳐도 아무리 말해도 못 알아듣는 안하무인, 남을 아프게 해 놓고 오히려 쾌감을 느끼는 듯한 이상한 사람이 많은데, 적어도 기본적 지력과 양심을 타고난 것은 이 시대에 천운이다. 


누가 뭐래도 내 삶은 축복,  그래서 나는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이 멋진 세상에 사는 축복을 누리며 살아간다. 얼마 전 다시 본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마리아가 대령과  사랑에 빠져‘그 무언가 좋은 일’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었다.


 ‘내 어린 시절 난 나쁜 애였고,  내 청소년기는 힘들었지만  이제 이렇게 당신을 만났으니   내가 과거에 그 무언가 좋은 일을 했음에 틀림없어요….’ 


이렇게 많은 축복을 누리며 살고 있으니 전생에 난‘그 무언가 좋은 일’만 많이 하는 천사였는지….  누가 뭐래도 내 삶은‘천형’은 커녕‘천혜(天惠)의 삶이다.


  [동아광장]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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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희 교수의  - [문학의 숲을 거닐다] 중에서 -


  유학 시절에 쓰던 자료들 사이에서 성경책 한 권을 발견했다. 거의 새것과 다름 없었는데, 앞에는 ''영희에게 브루닉 신부가...'' 라는 서명이 있었다. 오래 전 내가 유학을 떠나기 바로 전 날, 브루닉 신부님이 내게 선물로 주셨던 성경책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 브루닉 신부님은 나의 대학 스승님이다. 아니, 단지 스승을 넘어 내 삶의 은인이시다.  신부님이 안계셨으면 나는 아예 대학에 다니지도 못했을지 모르니까.


 아직 우리나라에서 신체장애에 대한 사회인식이 전혀 없던  70년대 초반, 내가 대학에 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초등학교 졸업후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너무나 힘들었으니, 대학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행히도(아니, 아이로니컬하게도) 내 학교 성적은 좋았고,  나는 꼭 대학에 가고 싶었다.


 내가 고3이 되자 아버지(故 장왕록 박사)는 여러 대학을  찾아다니시며 입학 시험을 보게 해 달라고 구걸하듯 사정하셨지만, 학교측은 어차피 합격해도 장애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번번히 거절했다.


 아버지는 당시 서강대학교 영문과 과장님이셨던 브루닉 신부님을 찾아가 제발 시험만이라고 보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셨다. 신부님은 의아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말씀하셨다.

 "무슨 그런 이상한 질문이 있습니까?  시험을 머리로 보지 다리로 보나요.   장애인이라고 해서 시험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하고 반문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두고두고 그때 일을 말씀하셨다.

 "마치 갑자기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기쁜 바보가 어디 있겠느냐!"고......,


 약간 불그스레한 얼굴에 순진하고 맑고 큰 눈, 늘 만면에 미소를 띠시던 신부님은 1학년 전공필수인 영문학 개론을 강의하셨다. 그때 나는 서양문학 최고의 고전은 성경과 그리스 로마 신화이며, 성경에 관한 지식이 없이는 영문학을 공부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신부님은 문학작품을 마치 무슨 모노드라마를 하듯이 온몸으로  연기하시며 강의하셨다.  프란시스 톰슨의 [하늘의 사냥개]라는 시를 강의하실 때는  온 교실을 정말 사냥개처럼 코를 킁킁거리고 다니셨고, [라 만차의 사람]이라는 돈키호테에 관한 연극을 소개하실 때는  말을 타고 가며 창을 던지는 시늉을 하셨다. 교실 밖에서 나를 보시면 신부님은 두 팔을 벌리면서  "마리아(나의 세례명), 마리아, 사랑하는 마리아..." 라고  당시 유행하던 패티 김의 노래를 부르곤 하셨다.


  - 중략 -


 신부님은 성품이 더할 나위 없이 착하고 온화한 분이셨지만 나는 신부님이 불같이 화를 내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당시 서강대학교에서는 체육이 대학 4년 내내 교양 필수과목이었는데, 담당이신 고 교수님은 내게 그 과목을 면제해 주시지 않고 체육관까지 와서 견학을 해야 점수를 주겠다고 하셨다.


 수업이 있는 본관에서 노고산 밑의 체육관까지는 꽤 거리가 멀고 부분적으로 비포장도로라 사실 내게는 그곳까지 가는 것 자체가 ''체육''을 넘어 에베레스트 등정보다 더 힘들었다.  게다가 비나 눈이 올라치면 문자 그대로 악전고투였다.  그러나 고 교수님은 그렇게 힘들게라도 견학을 하고 페이퍼를 써내야 겨우 낙제점수를 면한 D를 주곤 하셨다.


  한 번은 소나기가 오는 날 체육관으로 오다가 비포장도로에서 넘어져 진흙투성이가 된 나를 보시더니 비 오는 날은 오지 않아도 결석으로 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대학 3학년 되던 해 여름, 일찍 찾아온 장마 때문에 세 번 결석한 내게 교수님은  당신이 하신 말씀을 잊으시고 내게 가차없이 F를 주셨다. 나의 충격은 컸다.


  교수님에 대한 원망, 억울함, 부당함, 그리고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운명 때문에 ''F'' 라는 굴욕적인 점수를 내 성적표에 담게 되었다는 사실이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또 과목 낙제를 하면 다른 과목 성적이 좋아도 장학금 수혜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학칙 때문에 그 학기에 나는 장학금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당시 영문과 과장님이시던 브루닉 신부님을 찾아갔고, 내 이야기를 들으시다가 신부님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셨다. 너무나 화가 나셔서 얼굴은 빨개지고 말까지 더듬으셨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그건 네 잘못이 아닌데......,"


  그리고 나는 그때 분명히 보았다. 신부님의 눈에 고인 눈물을.


  이제 20년이 흘렀고, 나는 2002학번 새내기들에게 그때 신부님이 담당하셨던 영문학 개론을 가르친다. 알량한 체면 때문에 나는 학생들 앞에서 신부님처럼 그렇게 재미있는 모노드라마를 연출하며 가르치지 못하지만, 오랜만에 신부님을 기억하며 새삼 생각한다.

 ''삶의 교통순경''인 문학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나는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제자들을 ''지식과 사랑의 욕심꾸러기''로 만들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단 한 번이라도  진정 제자를 위해 눈물 흘린 적이 있는지......,

  먼 훗날 지금 내가 가르치는 많은 학생 중에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지금 내가 브루닉 신부님을 기억하는 것처럼 나를 기억해 줄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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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꿀벌의 무지 ***


꿀벌은 몸통에 비해 날개가 너무 작아서

원래는 제대로 날 수 없는 몸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꿀벌은 자기가 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당연히 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열심히 날갯짓을 함으로서

정말로 날 수 있다는 것이다. (중략)


나는 꿀벌과 같이 그냥 무심히 날갯짓을 한다.

그러므로 나의 글은 재능이 아니라 본능이다.

그래서 머릿속에 있는 말보다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고르지도 다듬지도 않고 생긴 그대로 투박한 글을 옮긴다.(중략)


재능도, 재주도 없으면서 '꿀벌의 무지' 만으로 쓴 글들을

남에게 보인다는 것은 참으로 어불성설이지만,

그래도 스스로 날지 못하는 줄도 모르고 무작정 날갯짓을 하기 시작한

나의 무지와 만용에 스스로 갈채를 보낸다.

못한다고 아예 시작도 안하고, 잘 못한다고 중간에서 포기했다면

지금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 장영희 에세이 '내 생애 단 한 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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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장영희 교수에 관한 기사입니다.)


소녀 같은 단발머리에 옅은 미소, 잔잔한 감동을 주는 글 때문에 사람들은 장영희 교수가 조용하고 나직하기만 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들은 그의 다른 모습도 기억한다. 빠른 서울 말씨로 단칼에 푹 찌르는 촌철살인. 어느 해 가수 조영남이 장 교수 생일잔치를 열어주자 "둘이 결혼하는 거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왔다. 장 교수가 한 마디로 주변을 잠잠하게 했다. "난 처년데 아깝잖아!"


▶장영희 교수는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제대로 앉지 못해 누워만 있던 소아마비 1등급 장애우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엄마 등에 업혀 학교에 갔고, 엄마는 그를 화장실에 데려가기 위해 두 시간에 한번씩 다시 학교에 갔다. 그 후에도 평생을 목발에 의지한 삶이었다. 그러나 장 교수는 '천형(天刑)'이란 말을 제일 싫어했다. 그를 버티게 한 건 삶에 대한 희망과 열정이었다.


▶"대학 2학년 때 읽은 헨리 제임스의 '미국인'이라는 책에는, 한 남자의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는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무서워 살금살금 걸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나는 그때 마음을 정했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살 것이다, 라고."('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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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희 교수 별세… 엄마에게 '마지막 편지'

"엄마, 미안해 이렇게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빠 찾고 있을게… 난 엄마딸이라 참 좋았어"


"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를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고(故) 장영희(57) 서강대 교수가 '엄마'에게 남긴 편지다. 장 교수가 죽기 직전 병상에서 쓴 마지막 글이다. 장 교수의 어머니 이길자(82)씨는 두 다리와 오른팔이 마비된 둘째 딸을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업어서 등·하교시켰다. 진눈깨비 내리는 날이면 딸을 학교에 못 데려다 주게 될까 봐 새벽에 일어나 연탄재를 부숴서 집 앞 골목길에 뿌려놓았다.


장 교수의 편지는 단 네 문장, 100자다. 지난달 28일 병원에서 퇴원해 집에 가기 직전, 병상에서 노트북 컴퓨터로 사흘 걸려서 썼다.


막내 여동생 순복(47)씨는 "통증과 피로감으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라 한 줄 쓰다 쉬고, 한참 있다 또 몇 자 보태고 하는 식으로 쓰느라 그렇게 됐다"고 했다.


암환자와 장애우의 희망이던 장 교수는 9일 낮 12시50분 눈을 감았다. 생애 마지막 8년 동안 장 교수는 세 번 암 진단을 받았다. 2001년 유방암 진단을 받고 완치됐으나 암이 척추로 전이됐고 다시 간까지 번졌다.


장 교수는 지난 2년간 24차례에 걸쳐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내년부터 보급될 중학교 영어 교과서와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집필을 계속했다. 지난달 중순까지 병상에서 교정을 봤다. 수필집 에필로그에 장 교수는 "희망은 운명도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힘"이라며 "난 여전히 그 위대한 힘을 믿고 누가 뭐래도 희망을 크게 말하며 새봄을 기다린다"고 썼다.


어머니에게 쓴 편지를 끝으로 병원에서 퇴원한 장 교수는 어머니, 여동생 순복씨 가족과 함께 살아온 서울 마포구 연남동 집에서 열흘을 보냈다. 지난 3일 이후에는 반(半) 의식불명 상태였다. 어린이날인 5일, 허리가 아파 누워 있던 어머니가 몸을 추스르고 장 교수 다리를 주물렀다. 순복씨는 "의식이 없던 언니가 엄마 손길을 느끼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엄마'라고 불렀다"고 했다.


장 교수는 지난 7일 재입원했다. 8일 조카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9일 오빠 병우(62)씨 등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뒀다. 타계하기 직전 장 교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말은 "엄마"였다고 오빠 병우씨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