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나누기와 소공동체 운영원리(아래 pdf 파일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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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동체와 레지오 마리애*
- 차동협(노르베르또) 신부 -
[서론 : 소공동체와 레지오 마리애의 신학적 자리매김]
소공동체와 레지오 마리애는 한국 천주교회에서 가장 비중 있는 교회 조직으로서 공존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에서 이 두 가지가 없는 본당 사목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근자에 들어와서 이 양자의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조직, 구성원, 회합 시간 등의 면에서 서로 간섭하거나 충돌하거나 경합을 벌이는 일들이 드물지 않게 일어났던 것이다.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여러 가지 접근과 처방이 도모되었으나 양자를 동시에 만족시켜줄 만큼 시원스런 방안은 아직까지 제시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사정을 배경으로 하여 '소공동체와 레지오 마리애의 신학적 자리매김'이라는 결코 만만치 않은 과제를 수행함에 있어서 필자(논자)는 철저하게 '소공동체와 레지오 마리애의 신학적 자리매김'이라는 논점에 머물고자 한다. 따라서 실제 본당에서 모색되고 있는 다양한 처방들, 곧 현실적인 고민들은 일단 괄호 안에 묶어두기로 한다. 즉, '신학적 자리매김'이라는 과제를 풀어야 하는 본 고찰은 철저히 이론적인 담론의 성격을 띨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들어간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신학적 자리매김'이라기 보다는 '신학적·사회학적 자리매김'이라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학문적으로 이 문제는 사회학의 조직론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소공동체와 레지오 마리애라는 조직 개념이 신학적 함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신학적'이라는 관형어는 그대로 유효하다 할 것이다. 따라서 일단 전체적인 접근법으로서 우리는 '신학적·사회학적' 이라는 테두리를 전제하고 들어가기로 한다.
고찰의 객관성과 학문성을 담보 받기 위하여 다음의 과정을 거칠 것이다.
첫째, 사회학에서 거론되고 있는 조직이론들을 일별하면서 소공동체와 레지오 마리애를 조직적인 면에서 자리매김해 줄 수 있는 판별 준거를 추출할 것이다.
둘째, 앞에서 추출된 판별 기준들에 상응하는 소공동체 및 레지오 마리애의 특성들을 가려낼 것이다.
셋째, 첫 번째와 두 번째 작업의 결과를 상응 관련시킴으로써 소공동체와 레지오 마리애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힐 것이다. 이를 토대로 이 양자의 바람직한 관계 모색을 위한 원론적인 방안을 제시할 것이다.
[조직론]
사회집단 및 조직의 분류는 사회학자들에 따라 다양한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구성원의 결합 의지에 따른 퇴니스(T nnies)의 분류, 구성원의 접촉방식에 따른 쿨리(Cooley)의 분류, 구성원의 공통 관심에 따른 매키버(MacIver)의 분류, 구성원의 소속감에 따른 섬너(Sumner)의 분류, 조직의 주요 목표에 따른 에치오니(Etzioni)의 분류 등이 있다. 다음의 (표 1)은 그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기 준 |
유 형 |
내 용 |
구성원의 결합 의지 F. Tönnies |
공동집단 Gemeinschaft |
구성원의 무의도적,본능적 의지에 의한 자연 발생적 집단 (가족, 친족, 촌락 ) |
이익집단 Gesellschaft |
구성원의 의도와 목적에 의해 선택적으로 형성된 집단 (회사, 정당, 조합) | |
구성원의 접촉 방식 C.H. Cooley |
1차집단 primary group |
장기적인 친밀한 대면 접촉을 통해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집단 (가족, 놀이 집단 ) |
2차집단 secondary group |
부분적인 인격관계(간접적인 접촉)과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적 만남으로 결합, 집단상호작용이 일시적이고 사무적인 집단 (회사, 각종 단체 ) | |
구성원의 공통 관심에 따른 결합 R.M. MacIver |
공동체 community |
사회적 응집력으로 특징지어지는 사회생활의 지역. 함께 생활하고, 소속되고, 함께 공유하는(living together, belonging together, sharing together) 공동체 의식을 가진 집단. |
결사체 association |
몇몇 특정관심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집단. 서로 협력하고 목표를 추구함. 공공집단, 교회의 단체, 노동조합, 정당, 회사 | |
구성원의 소속감 W.G. Sumner |
내집단 in-group |
자신이 소속된 집단→우리 집단 (아군 ) |
외집단 outgroup |
자신이 소속되지 않은 집단→그들 집단 (적군 ) | |
주요한 목표 A. Etzioni |
규범적 조직 normative organization |
학교나 교회와 같이 구성원들이 조직의 이념과 규범을 내면화하고 실현하려고 하는 조직 |
공리적 조직 utilitarian organization |
회사처럼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 | |
강제적 조직 cohesive organization |
군대와 같이 명령과 지시에 의하여 유지되는 조직 |
이 표를 훑어보면 금새 퇴니스, 쿨리, 매키버의 분류 사이에 어떤 보이지 않는 중첩(overlapping)이 있지만 그밖의 섬너와 에치오니의 분류법은 이들과는 상당한 차별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앞의 세 학자들의 견해에 주목하면서 성찰의 실마리를 풀어가고자 한다. 그들의 이론을 일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퇴니스는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Gemeinschaft und Gesellschaft, 1887)에서 인간의 의지를‘본질의지'(자연적 의지)와‘선택의지'(합리적 의지)로 구분하면서 이 두 의지에 상응하는 실재적·유기적인 게마인샤프트와 관념적·기계적인 게젤샤프트라고 하는 사회적인 범주를 제시하였다.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 공동사회(共同社會)]란 본질의지(本質意志: Wesenswille)에 기초한 전인격적(全人格的) 결합체를 의미한다. 본질의지란 사고작용보다 의지의 작용이 지배적인 것으로서 실제적으로는 공감(共感), 습관 등으로 나타나고 그 복합적·사회적 형태는 일체성(一體性), 관습, 종교 등으로 구체화된다. 이와 같은 본질의지에 따른 사람들의 결합관계는 감정적이고 매우 긴밀하다. 감정의 대립이나 증오와 같은 분리적 요소를 가지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사람들이 항상 결합해 있는 사회를 게마인샤프트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그 점에 있다.
게젤샤프트[Gesellschaft: 이익사회(利益社會)]란 선택의지(選擇意志:K rwille)에 기초한 수단적·일면적(一面的) 결합체를 의미한다. 선택의지란 사고작용이 지배적으로 작용하여 의지작용을 포함하고 있는 의지를 말하며, 실제적으로는 타산, 의식성(意識性) 등으로 나타나고, 또 복합적·사회적 형태는 협약(協約), 정치, 여론 등으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선택의지에 따른 사람들의 결합관계는 관심이 일치하는 데가 있고 등가(等價)의 교환이 전제가 되는 경우에만 성립한다. 게젤샤프트가 합리적·계약적 성질을 가지고 여러 결합요소를 지니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사람들이 항상 분리되어 있는 사회라고 여겨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남이 일정한 범위를 넘어서 자기 영역에 들어서는 것을 거부하고, 이성적 자유를 보유하면서 생활을 영위하는 게젤샤프트는 근대사회에서 게마인샤프트 시대 다음으로 성립하지만 이는 항상 사람들 사이에 긴장관계를 만들어내고, 개인의 원자화와 소외를 초래하기도 한다.
둘째로 쿨리는『인간본성과 사회질서』(Human Nature and Social Order, 1902)에서 구성원들간의 접촉방식에 따라 1차집단(primary group)과 2차집단(secondary group)으로 분류하였다. 1차집단은 대면적(對面的:face to face) 접촉에 따른 친밀한 결합이 있는 집단으로서 구성원들은 심리적으로‘우리'라는 단어로 표시되는 강한 공속감(共屬感), 일체감(一體感), 친밀감을 공유(共有)한다. 이는 자발적이고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집단으로서 가족, 어린이들의 놀이집단, 이웃, 동료 등이 이에 속한다. 1차집단은 규모가 비교적 작으며 성원들이 상호 인접해 있고 성원들의 관계가 지속적일 때 성립된다. 이같은 집단의 구조적인 특성이 어린이의 사회성(social nature)이나 이상(사랑, 봉사, 자기희생, 페어플레이 정신, 자유와 시민적 정의 등의 관념)을 형성한다. 1차집단은 규범, 가치, 상징 등을 성원에게 학습시키는 일종의 배움터로서 문화를 전수하는 기능을 한다. 성인이 된 후에도 정서적 만족을 누릴 수 있는 토대가 되어 사회적인 인간관계를 강화·안정시키는 기능을 다한다는 점에서 1차적인 중요성을 가진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의 근대화·도시화와 함께 1차 집단의 인간관계는 구조적으로 보다 광범한 규모의 인간관계 속에 확산되어 중요기능이 차차 쇠퇴하고 있다. 최근에는 거대한 사회조직 속의 소집단(클럽·동아리·그룹 등)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1차 집단적 구조나 기능을 분석해내려는 시도가 지배적인데, 후에 쿨리도 이러한 집단을 의사적(擬似的) 1차 집단(pseudo primary group)으로 분류하였다.
이에 반해 2차집단은, 특정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집단으로서 성원간의 관계가 공식적(formal), 비인격적(impersonal), 분절적(segmental), 도구적(instrumental)이다. 쿨리는 사회계급, 국민사회, 지역집단, 많은 관심집단 및 이해집단, 연령이나 성(性)에 의한 집단, 군중과 같은 일시적 집단 등을 2차집단의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2차집단의 지배적인 추세는 1차집단이 가지는 인간감정이나 사회기능의 쇠퇴를 의미하지만, 반대급부로 근대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집단은 1차집단과 2차집단의 성격을 모두 가질 수 있으나 집단에 따라서 어느 한쪽의 성격이 강한 경우가 보통이다.
셋째로 매키버는 『커뮤니티론』(Community, 1917)에서 조직을 구성원의 공통관심에 따라 공동체(community)와 결사체(association)로 분류한다. 공동체의 개념에는 영토적인 공간, 개인간의 긴밀한 친숙함과 접촉 그리고 이것을 인근집단과 구별시켜 주는 특별한 통합적 기반 등의 특성이 포괄되어 있다. 즉, 같은 지리적 지역 내에서 상호 연관된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그 성원들의 최소한의 기본 생물학적 내지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여러 상호의존적인 사람들의 자기충족적인 결사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 성원들은 같은 지역에서 긴밀하게 얼굴을 맞대고 상호작용을 하면서 일체감 또는 소속감을 갖게 된다는 특징이 있다. 공동체의 자급자족능력은 사회에 비해 훨씬 제한되어 있지만, 그 한계 내에서 보다 밀접한 관계와 깊은 상호이해를 갖고 있으며, 이 특수한 통합의 접착제로는 인종, 국적, 종교 등이 있다. 공동체는 어느 정도의 사회적 응집력으로 특징지어지는 사회생활의 지역 내에서 함께 생활하고, 함께 소속되고, 함께 나누는(living together, belonging together, sharing together) 공동체 의식을 가진 집단으로서 대표적으로 지역사회가 이에 속한다.
결사체는 특정한 관심을 추구하며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인위적·계획적으로 형성되는 집단이다. 한 두 가지의 특정관심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집단을 형성해서 서로 협력하고 그들의 목표를 추구할 때 결사체가 형성된다. 결사체는 그 종류도 다양하고 조직의 형태나 운영 방식도 일정하지 않지만 조직의 관심과 목표의 성격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소속원의 교양이나 취미 또는 친목에 관심을 두는 '친목집단', 소속원의 이익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이익집단',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사회봉사집단'이 있는가하면 국가사회적인 문제 해결이나 인류의 복지 또는 사회정의와 같은 사회적인 목표에 관심을 두는 '시민운동단체' 등이 있다.
결사체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점에서 다른 조직체와 구별된다.
① 강제나 경제적·물리적 보상 때문이 아니라, 구성원 각자가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② 자발적 소속원들은 다른 조직체성원에 비하여 조직의 목표에 대한 신념이 뚜렷하고 조직 활동에도 애착을
가지고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경향이 있다.
③ 전담 직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생활의 일부분으로 가외 시간을 이용하여 참여한다.
④ 소속원의 자격이나 범위의 제한 조건이 까다롭지 않으며, 가입 의사가 있고 시간과 돈 그리고 노력을 많이
투여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운영되고 업무가 추진된다.
⑤ 소속원들의 지위와 역할 분담이나 위계서열이 엄격하지 않고, 구성원의 토론과 합의를 통하여 업무의
지속성이 유지된다.
이상의 고전적 조직 구분을 종합적으로 조망(眺望)할 때 우리는 조직을 크게 유사범주Ⅰ과 Ⅱ로 나눌 소지가 충분히 있음을 보게 된다. 즉, 공동집단(퇴니스), 1차집단(쿨리), 공동체(매키버)는 유사범주Ⅰ로, 이익집단(퇴니스), 2차집단(쿨리), 결사체(매키버)는 유사범주Ⅱ로 묶을 수 있겠다. 확실히 유사범주Ⅰ에 속하는 조직들 사이에는 공통 특성이 지배적인 가운데 다소의 분산요인들이 발견되고 유사범주 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조직론적 판별근거]
이제 남은 절차는 조직의 판별 준거로서 특성 인자들을 추출해내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많은 변수들을 체계적으로 범주화하기 위하여 편의상 『한국사회와 개신교-종교사회학적 접근』에 제시된 다섯 가지 사회학적 준거를 원용하고자 한다. 그 다섯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준거는 인간적 준거이다. 이는 조직이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에 기초하며 그 집합적 전기(collective biography)가 자원(自願)적이냐 강제적이냐에 따라서 조직의 성격을 규정한다. 즉 어떤 인구학적·생태적 상황으로부터 어떤 상호작용이 '우리'를 형성하는가를 파악함으로써 인간관계의 특성을 분류해 낸다.
두 번째 준거는 신념적 준거이다. 이는 조직이 공동목표로서 추구하는 가치구조 또는 신념체계의 양상에 따라 조직의 성격을 규정해 주는 준거이다. 여기서는 어떤 가치이념이 사회화되어 신념노선 또는 이데올로기를 이루고 있는가 하는 것을 분별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즉 어떤 가치 체계가 집단의 정체성(group identity)을 이루고 있는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세 번째 준거는 문화적 준거이다. 이는 조직이 지향하는 핵심 가치를 어떤 문화적인 매체를 통하여 표현하고 구현하는가 하는지를 판별하여 조직유형을 구분하게 하는 준거이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상호소통의 근간을 이루는 언어와 상징이다.
네 번째 준거는 제도적 준거이다. 이는 조직이 어떤 제도적 규범 또는 장치에 의거하여 운용되는가에 관심을 모은다. 자율성, 계획성, 역할 분담, 조직체계 등의 정도와 양상에 따라서 한 조직의 성격을 규정하는 준거이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준거는 도덕적 준거이다. 이는 어떤 도덕적 가치가 한 조직의 집단적 행위를 이끌고 공동체 구성원의 집합적 결속을 증대시키는 행동 규범으로 작용하는가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이상의 다섯 가지 준거에 입각하여 앞에서 고찰한 퇴니스, 쿨리, 매키버의 조직론에서 명시적(explicit)으로 또는 비명시적(implicit)으로 언급된 특성들을 체계적으로 범주화하면 다음의 (표 2)와 같이 정리된다.
|
사회적준거틀 |
특징요소 |
퇴니스 |
쿨리 |
매키버 |
유 사 범 주 I |
인간적 준거 |
본질의지(자연적 의지)-자연발생 |
◎ |
◎ |
◎ |
긴밀한 인격적, 감정적 인간관계 |
◎ |
◎ |
◎ | ||
일체감(강압적 '우리'의식) |
◎ |
◎ |
◎ | ||
신념적 준거 |
일반적 가치(포괄적 이상) : 관습, 전통에 따라 사회성 및 이상을 형성시킴 |
◎ |
◎ |
◎ | |
문화적 준거 |
전통 문화의 생활, 축제, 상징 요소 |
○ |
○ |
○ | |
제도적 준거 |
비공식적이고 개방된 구조와 절차 (자유로운 의사소통 체계) |
◎ |
◎ |
◎ | |
역할의 미분화 |
◎ |
◎ |
◎ | ||
도덕적 준거 |
전통(관습, 종교)으로 행위 규제 |
◎ |
◎ |
◎ | |
유 사 범 주 II |
인간적 준거 |
선택의지(합리적 의지)-인위적으로 조직 |
◎ |
◎ |
◎ |
간접적 접촉(부분, 일면적)에 따른 형식적, 분절적, 계약적, 한시적 인간관계 |
◎ |
◎ |
△ | ||
연대의식(자율적 '우리'의식) |
○ |
○ |
◎ | ||
신념적 준거 |
특정한 가치(이데올로기) : 사무적, 부분적 상호작용으로 사회성 및 이상을 형성시킴 |
◎ |
◎ |
◎ | |
문화적 준거 |
인위적·계획적·의도적 상징 요소 |
○ |
○ |
○ | |
제도적 준거 |
공식적이고 폐쇄된 구조와 절차 (하향적 의사소통 체계) |
◎ |
◎ |
△ | |
역할의 엄격한 분화 |
◎ |
◎ |
◎ | ||
도덕적 준거 |
규범적 질서(규칙)로 행위 규제 |
◎ |
◎ |
△ |
(상호 일치하는 특성은 ◎, 상호 유사한 특성은 ○, 관련성이 모호한 특성은 △로 표시한다)
그렇다면 소공동체와 레지오는 어떤 조직론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앞에 진술된 내용들을 염두에 두고 양자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들을 종합분석하면서 상응하는 특성인자를 찾아내는 것이 당면한 과제이겠다.
먼저 소공동체의 특징요소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인간적 준거에 비추어 볼 때 소공동체는 '선택의지'(신앙의 선택)를 기조로 하여 교회공동체라는 조직을 이룬다고 볼 수 있으나, 일단 한 개인이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 이후에는 가족관계(예수님께서는 자주 교회공동체가 형제자매적 운명공동체임을 강조하신 바 있다)와 같이 '본질의지'로 관계가 지속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최초 신앙의 선택에서는 유사범주Ⅱ의 특성(선택의지)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으나 그 이후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오히려 유사범주Ⅰ(긴밀한 인격적 인간관계, 일체감)의 특성을 지닌다고 판단된다.
둘째로 신념적 준거에 비추어 볼 때 소공동체는 전통적 교회이상(교회론)의 연장선(延長線)상에서 시대와 상황에 부합하는 교회의 존재방식으로서 부각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천 년 역사를 통해 존속해 온 교회가 어떻게 하면 전통(성서)과 사회와 시대여건에 부응하여 최적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 대한 여러 대안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소공동체는 확실히 유사범주Ⅰ의 신념적 특성(일반적 가치=포괄적 이상)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셋째로 문화적 준거에 비추어 볼 때 소공동체는 말씀을 통한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현과 구성원들의 친교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룹 말씀나누기 안에 역동적으로 현존하시는 예수님의 체험, 친교(정서적인 친교, 음식의 친교)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백성의 일치가 소공동체가 지니는 대표적인 문화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흘러나온 축제적인 기쁨과 환희, 충만, 일치 등이 소공동체를 지배하는 문화적 분위기라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확실히 유사범주Ⅰ에 속하는 것들이다.
넷째로 제도적 준거에 비추어 볼 때 소공동체는 본래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 발생하고 자라나는 '아래로부터의 교회'의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성향은 특히 남미나 유럽, 일부 아시아권 등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러나 교회 교도권이 소공동체의 가능성과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점차 '위로부터'의 지원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비공식적이고 개방된 구조와 절차'(유사범주Ⅰ)를 특성으로 지니고 있었던 소공동체가 '공식적이고 폐쇄된 구조와 절차'(유사범주Ⅱ)를 중히 여기는 일사불란한 조직체계(구역반 조직)로 탈바꿈 해왔다고 볼 수 있다.
다섯째로 도덕적 준거에 비추어 볼 때 소공동체는 전통(성서)으로 집단의 행위를 규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복음과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존중하고 있다. 이는 유사범주Ⅰ에 속하는 특성이다.
다음으로 레지오의 특성요소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로 인간적 준거에 비추어 볼 때 레지오는 '평신도 사도직 수행'이라는 특수한 목적을 가진 이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직된 단체로서 이 목적에 헌신하고자 하는 신앙인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레지오 단원이 된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구성원들은 전인격적인 관계를 맺는다기보다는 활동을 위한 부분적인 관계만을 맺는다. 이들은 자신들의 원의(願意)와 선택에 입각한 특수한 연대의식(자율적 '우리'의식)을 형성한다. 이는 확실히 유사범주Ⅱ에 속하는 특성이다.
둘째로 신념적 준거에 비추어 볼 때 레지오는 단원들의 성화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단원들은 교회의 지도에 따라 성모님과 교회의 사업에 기도와 활동으로 협력함으로써 이 목적을 달성한다. 이를 위해 각 단원들은 마리아의 정신으로 무장되어야만 한다. 결국 레지오 마리애는 유사범주Ⅱ에 속하는 신념적 특성(특정한 가치: 이데올로기)을 지닌다고 판단된다.
셋째로 문화적 준거에 비추어 볼 때 레지오는 '성모님의 강력한 지휘 아래, 세속과 그 악의 세력에 맞서는 교회의 싸움에 참가하기 위해 형성된 군대'로서, 뱀을 밟고 있는 성모상, 단기(벡실리움 Vexillum Legionis), 그림 등을 통해 악의 세력과의 싸움을 상징화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묵주기도, 까떼나(Catena) 등의 기도문들은 험한 영적 전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승리할 것을 확신하는 믿음과 소망의 표현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 때문에 레지오에서는 영적 긴장, 투쟁, 단합, 일사불란, 희생 등의 측면이 부각된다. 종합적으로 유사범주Ⅱ에 속하는 문화적 특성(인위적·계획적·의도적 상징요소)들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넷째로 제도적 준거에 입각하여 볼 때 레지오의 구조는 공식적이고 폐쇄적인 군대조직과 유사한 것으로 드러난다. 성모님을 총 사령관으로 하여 최하위 조직인 쁘레시디움(Praesidium), 쁘레시디움의 상위조직으로서 20-25개의 쁘레시디움을 관리하는 '평의회'인 꾸리아(Curia), 꾸리아의 상위조직으로서 몇 개의 본당에 있는 꾸리아를 관리하는 '상급 평의회'인 꼬미씨움(Comitium), 꼬미씨움과 세나투스의 중간 단계인 레지아(Regia), 국가 차원의 '최상급 평의회'인 세나투스(Senatus), 그리고 전 세계의 레지오 마리애 조직을 관장하는 관리 기관인 꼰칠리움 레지오니스(Concilium Regionis)로 편성된다. 이들 조직은 체계를 갖추어 관리 운영되고 있으며, 지시 및 순명의 군대식 조직의 특성을 지니고 있어 모든 결정이 상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하향식으로 전달된다. 구성원들의 역할이 엄격히 분화되어 있다는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 결국 유사범주Ⅱ에 속하는 제도적 특성을 지니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섯째로 도덕적 준거에 입각하여 볼 때 레지오의 집단행위를 규제하는 규범은 레지오의 교본이다. 교본은 레지오를 하나로 결집시키는 행동의 기틀로 작용한다. 레지오 단원들은 교본에 따라 모든 회합, 기도, 활동 등 레지오와 관련된 모든 일을 수행한다. 물론 레지오 교본은 교회의 전통(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겠으나 확실히 레지오의 일차적인 규범이 교본임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이는 레지오가 유사범주Ⅱ의 도덕적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내준다.
Ⅳ. 소공동체와 레지오의 조직론적 자리매김
소공동체와 레지오의 조직론적 자리매김은 Ⅲ에서 고찰된 특성인자를 Ⅱ에서 설정된 준거에 비추어 성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 성찰의 결과는 다음의 (표 3)으로 요약된다
사회적준거 |
특징요소 |
소공동체 |
레지오 | |
유 사 범 주 I |
인간적 준거 |
본질의지(자연적 의지)-자연발생 |
◑(공동체 생활) |
|
긴밀한 인격적감정적 인간관계 |
●(대면 친교) |
◑(부가적 특성) | ||
일체감(강압적 '우리'의식) |
●(형제자매적가족 공동체) |
| ||
신념적 준거 |
일반적 가치(포괄적 이상): 관습, 전통에 따라 사회성 및 이상을 형성시킴 |
●(교회론적 전통의 연장) |
◐(구원론) | |
문화적 준거 |
전통 문화의 생활, 축제 상징 요소 |
●(말씀을 통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현과 축제적 친교) |
◐(전통적 성모신심) | |
제도적 준거 |
비공식적이고 개방된 구조와 절차 |
◐(소공동체의 본래적 특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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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의 미분화 |
●(카리스마 중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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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준거 |
전통(관습, 종교)으로 행위 규제 |
●(복음) |
◐(복음적 전거) | |
유 사 범 주 II |
인간적 준거 |
선택의지(합리적 의지)-인위적으로 조직 |
◐(신앙의 선택) |
●(입단, 탈퇴의 자유) |
간접적 접촉(부분, 일면적)에 따른 형식적, 분절적, 계약적, 한시적 인간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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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수행을 중심으로한 만남) | ||
연대의식(자율적 '우리'의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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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적 동지의식) | ||
신념적 준거 |
특정한 가치(이데올로기): 사무적, 부분적 상호작용으로 사회성 및 이상을 형성시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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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적 마리아 신학) | |
문화적 준거 |
인위적·계획적·의도적 상징요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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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상, 단기) | |
제도적 준거 |
공식적이고 폐쇄된 구조와 절차 (하향적 의사소통 체계) |
◑(소공동체의 부가적 특성) |
●(공식·형식적 군대 식 조직체계) | |
역할의 엄격한 분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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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부, 평단원, 협조 단원) | ||
도덕적 준거 |
규범적 질서(규칙)로 행위 규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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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본) |
( ●은 명확하게 부합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내고, ◐은 본래 특성상 부분적으로 부합할 경우를 나타내고, ◑은 부가적으로 발생하거나 부여된, 부분적으로만 부합하는 특성을 나타낸다)
대체로 사회학자들은 유사범주Ⅰ의 조직체를 시대를 초월한 사회의 기반 조직체로 보면서 사회가 분화되고 특화될수록 다양한 형태의 유사범주Ⅱ의 조직체가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유사범주Ⅱ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능인 소속감, 안정, 형제애 등을 온전히 충족시켜줄 수 없기 때문에 유사범주Ⅰ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역으로 유사범주Ⅰ에 속하는 조직체는 유사범주Ⅱ의 출현을 필요로하는 시대적·정황적 요청을 효율적으로 충족할 수 없기 때문에 유사범주Ⅱ의 조직체를 대신할 수 없다고 본다. 말하자면 이 양자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공동체와 레지오 마리애도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결론]
결론적으로 소공동체와 레지오 마리애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자리매김할 수 있겠다.
첫째, 소공동체는 교회의 기반조직체이고 레지오 마리애는 교회의 특수목적 사도직 수행 조직체이다. 전자가 교회의 존재(being)에 비중을 둔 조직체 유형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교회의 사명수행(doing)에 비중을 둔 조직체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소공동체가 교회의 존재방식(The question of being: How to exist)에 대한 대안이라고 한다면 레지오 마리애는 교회의 사명수행(The question of doing: What to do)에 대한 대안인 것이다. 즉 소공동체는 최적의 교회 존속을 위한 교회의 기반조직체로서 의의를 지니는 반면 레지오 마리애는 그렇게 존재하는 교회가 역점을 두어 수행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결성된 특수목적 조직체로서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존재(being)가 행위(doing)에 우선하며 행위의 기반인 것과 같이, 엄밀히 말해서 소공동체가 레지오 마리애에 우선하는 존재 기반임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소공동체는 전신자의 문제요 레지오 마리애는 가입 의사를 지닌 특정 신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소공동체와 레지오 마리애는 상호 대체 불가능하며 오히려 상호보완적이다.레지오 마리애가 소공동체 조직으로 흡수되어 소공동체가 레지오 마리애 체제를 취하는 것은 존재방식 또는 존재기반을 등한시하고 목적추구만을 강조하는 기형적 현상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또한 소공동체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기고 레지오만을 강조하는 본당의 사목 정책도 같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역으로 소공동체만을 강조하고 레지오를 등한시하거나 해체하는 조치는 교회의 다양한 사도직 활동(apostolic action)을 무력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셋째, 본당에서 발생하는 이 양자의 경합 내지 갈등의 해결을 위해 양자택일의 방식을 피해야 한다. 사명수행(doing)은 존재(being)의 기반이 탄탄할 때 제대로 이루어지고, 존재(being)는 사명수행(doing)으로 보람을 누린다.
넷째, 조직적인 면에서 소공동체와 레지오 마리애는 원칙론적으로 상호 제휴나 통합을 배제한다. 조직적인 면에서 볼 때 소공동체는 본당-교구의 교계체제에 예속되는 반면 레지오 마리애는 그 밖에 있는 꾸리아(Curia)-꼬미씨움(Comitium)-레지아(Regia)-세나투스(Senatus)-꼰칠리움 레지오니스(Concilium Regionis) 에 예속되어 있다. 즉 전혀 다른 지휘계통의 조직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공통목표를 접촉점으로 하여 한 영역 안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양자는 적절한 상호배합이나 변형을 원칙적인 면에서는 서로 허락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경계선을 지니고 있다.
다섯째, 레지오 마리애에 대한 객관적인 접근이 요망된다. 엄밀히 말해서 교회의 사도직 수행(apostolic action) 단체는 레지오 마리애 이외에도 무수히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 MBW(Movement for Better World), 성령쇄신(Charismatic Movement), 꾸르실료(Cursillo), 포콜라레(Focolari), CLC(Christian Life Community), ME(Marriage encounter), 네오카테쿠메나토(Neocatecumenato), 지속적인 성체조배회, 빈첸시오, 연령회(선종봉사회), 성모회 등이 있다. 이들은 교구 또는 본당차원에서 교회의 사명을 풍부하고 다양하게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는 조직체들이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레지오 마리애는 한국의 본당 사목에 도입되어 거대한 조직을 형성하는데 성공하였다. 본당 사목에 있어서 풍요롭고 다채로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사실 타사도직 단체들도 사목적인 지원을 균형있게 받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본질에 부합하고 형평성을 갖춘 교회의 조직 운용을 위해서는 위에서 제시된 원론적인 제안들을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처방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 애당초 이 글이 지니는 한계였음을 아쉬워하면서, 향후 소공동체와 레지오 마리애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 정립을 위해 미천한 토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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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교회다
인간은 이성(異性)이나 동성(同性)을 불문코 ‘옆구리가 시린’ 존재입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하고 누군가와 무언가를 나누고 싶어 하는 그 이끌림에서 친목계, 동창회, 향우회, 전우회, 취미 동아리 등이 생겨났는가 하면 소위 서로 원하는 파트너를 소개해주는 부킹문화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만남, 대화, 관계에 대한 인간의 향수를 교회차원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수용할 때 ‘공동체’가 가장 효과적인 대안으로 떠오릅니다.
왜 ‘공동체’를 말하는가
사람은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더불어’ 살아야 사람답게 산다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 어떤 삶이 ‘인간의 완성’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 크게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홀로’의 길을 택합니다. <숫타니파타>경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서로 사귄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 사랑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르는 법 / 연정에서 근심 걱정이 생기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숲 속에서 묶여있지 않은 사슴이 / 먹이를 찾아 여기 저기 다니듯이 /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어떤 이들은 ‘더불어 함께’의 길을 택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이 길을 택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模像)’을 지녔다고 얘기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본성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본성은 ‘삼위일체’로 드러납니다. 곧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풍요로운 나눔과 친교가 하느님의 본 모습입니다. 이들 세 위격(位格)이 각각 서로에게 ‘너’(=삼위)이면서 동시에 ‘나’(=일체)라는 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서로 ‘너’이면서 ‘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사랑의 연대가 있을 때에 만이 가능합니다. 이 나눔, 친교, 사랑의 연대를 본성으로 하는 하느님의 모상을 인간이 지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너’를 필요로 하는 존재요, 너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격의 완성에 이르는 길도 ‘더불어 함께’의 길입니다.
이 관계는 사람과만 맺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도 맺는 것입니다. 이 관계는 ‘하느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를 통해서 충족이 됩니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양자가 동시에 충족이 될 때 비로소 온전하게 채워집니다.
교회는 이상적인 만남의 장이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충족시켜 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서 인간과 하느님과의 친교가 완성되고 인간 상호간의 친교가 이루어집니다. 교회의 궁극적 근거는 자체 안에 이미 관계이신, 사랑을 나누시는 하느님이고, 이것의 ‘외적 나타남’이 형제 자매적 공동체입니다.
신약성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명사 ‘아가페’가 거의 항상 ‘특정 공동체 내에서’의 형제애를 지칭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가페는 원래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신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신적인 사랑인 아가페가 ‘공동체’ 안에서 형제 자매들과 음식을 나눌 때 이루어진다고 믿었다는 것은 참으로 오묘한 공동체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단어는 아주 특별한 ‘공동체 정신’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곧 신적인 사랑이 형제자매적인 나눔을 통해서 실현되도록 하는 장이 바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런 공동체를 교회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역사의 흐름과 함께 대중화 과정이 전개되면서, 교회 공동체가 그 구성원을 공동체적 삶의 주체에서 수동적인 익명의 사목 대상으로 전락시키면서 이 바닥 공동체는 점차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21세기 사회가 원한다
영혼의 안식처가 그립다
20세기 하반기에 우리 사회는 뿌리 채 흔들리는 변화를 겪었습니다.
- 무엇보다도 뽕나무밭이 아파트 바다가 되는 도시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졌습니다.
- 다음으로 인구유동이 심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첫째, 인간이 뿌리를 내리고 살수 있는 ‘원(元)공동체’ (Urgemeinde)가 붕괴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장기의 추억이 서려있고 가족적인 친밀감, 유대감, 소속감을 가져다 주던 이 원초 공동체에 대한 본능은 언제나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대가족 중심, 부락 문화 중심의 원시 공동체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 위해 계모임, 동창회, 취미 동아리 등의 대안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이 갖고 있는 이러한 욕구는 교회가 기존의 ‘대형교회’에서 ‘공동체’교회로 세분화될 필요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긴밀한 인간적인 친교가 불가능한 본당 공동체가 ‘소공동체’ 체제로 재조직되어 이 원초공동체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한국 사회의 ‘안정도’(stability)를 극도로 저하시켰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모든 한국인에게 심한 ‘불안’을 야기 시켰습니다. 종교사회학자들은 이 ‘불안’이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를 찾게 한다고 합니다. 불안을 해소할 영적 안식처 또는 보금자리를 찾아나서는 데 그것이 바로 종교라는 것입니다.
아직 마땅한 ‘종교’ 선택하지 못하고 이 종교 저 종교를 기웃거리는 ‘유랑하는 종교심’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위압적이고 실속 없는 대형교회 보다는 친근감 있고 알찬 소공동체가 제격입니다.
나도 참여하고 싶다
만나고 싶다
흔들리는 정체성을 공동체가 잡아준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여러 가지 요인들이 현대인의 (신앙)인격을 흔들리게 합니다.
이런 때 소공동체 교회가 신앙생활에서의 ‘정체성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구체적인 인격적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해주고, 신뢰와 협동심 등을 촉진함으로써 서로를 하나로 묶어주기 위해서는 소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일치와 친교의 성령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교회를 통해서 자신들의 삶의 위기가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위로를 주지도 않고,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주지도 않고, 고독을 메꿔 주지도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교회가 보다 따뜻하고 아늑하며 신뢰할 만한 공동체를 대안으로 제공할 수 있다면 그들은 교회에 머무르기를 원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안에서 개인들이 의미 없거나 상처받은 대인 관계들로 고통을 받고 있음을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사람들이 서로에게 유익을 끼치며 의미충만한 대인 관계를 정립할 수 있는 인격적 대화의 장이 소공동체입니다.
함께 가는 길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내가 있는 이 세상을 원하셨다
당신은 하느님과 공동체에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가족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서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는 골칫거리가 아니다. 그는 나의 형제이다. 그녀는 골칫거리가 아니다. 그녀는 나의 자매이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또 한 지체가 영광스럽게 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1고린 12,21-28)
당신이 짊어지라
독일의 신학자 메츠(J. B. Metz)는 1980-90년대 교회 안팎에서 움직이고 있는 기류를 진지하게 관측한 결과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시대’는〔…〕이제 더 이상 위대한 예언자들의 시대도 아니요, 위대한 성인들의 시대도 아니요, 탁월한 신학자의 시대는 더욱이 아니다. 교회의 시대는 바야흐로 작은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점차 주역의 자리를 차지하는 시대, 곧 작은 예언자들의 시대요, 작고 이름 없는 성인들의 시대이며, 이런 의미에서 바닥의 시대인 것이다”(Metz, Suchbewegungen, 149쪽).
그는 21세기를 염두에 두고 이 선언을 한 것입니다.
‘교회의 시대’는 항상 똑같지 않습니다. ‘교회의 시대’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그 시대의 도전과 위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도전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딱히 몇 가지로 정체를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방팔방에서 ‘양의 탈’을 쓰고 교묘하게 침투해오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보이지 않는 종교’(invisible religion)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과거처럼 ‘위대한 예언자’, ‘위대한 성인’, ‘탁월한 신학자’들만 가지고는 안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모든 이가 무장하고 깨어서 자신의 신앙을 지켜야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한편, 21세기는 소시민 연대의 시대, 참여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의 지도력은 위대한 한 사람에게 편중되지 않고, 시민들에게 공유됩니다. 이런 관점에서도 신자 각자가 교회의 주체로 불리움 받고 있다하겠습니다.
이 시대가 바로 ‘위대한 지도자’의 시대가 아닌 작은이들의 시대, 작고 이름 없는 소시민들의 시대라고 한다면, 이것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 무대가 소공동체요, 이를 실현하는 주체가 소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단 소공동체가 아니더라도 모두가 작은 예언자, 작고 이름 없는 성인, 진지하게 진리를 찾아나서는 신학자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잔 아누이즈 버켓(Jean Anouilh's Becket)이 말했다는 다음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내 어깨 위에 전교회를 짊어지고 왔다. 그 어느 것도 결코 그것을 내려놓으라고 나를 설득하지 못할 것이다.”
(본문 중 짙은 글씨는 전부 ‘오이코도메’의 파생어임에 유의할 것)
∙모든 것을 합해 최우선적으로: “모든 것은 교회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1고린 14,26). 공동체 건설을 최우선 사안으로 삼고 ‘모든 것’(=삶의 전반적인 요소)을 집결해야 한다는 비전이다.
∙그날을 대비해 함께 흐트러짐 없이: “어떤 사람들처럼 모이는 일을 폐지하지 말고 서로 격려해서 자주 모입시다. 더구나 그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아는 이상 더욱 열심히 모이도록 합시다”(히브 10,24 이하). 종말을 향하는 비장함과 단호함으로 공동체를 건설하자는 비전이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집을 향해: “사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건설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건설합니다)”(2고린 5,7). 지상적인 외형교회에 만족하지 않고 천상의 성전을 향해 부단히 질적인 향상을 꾀해야 한다는 비전이다.
∙사랑과 분별로써 공동체에 유익을: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공동체를) 건설합니다”(1고린 8,1). “모든 것이 허락되었으되 모든 것이 (공동체를) 건설하지는 않습니다”(1고린 10,23). 오직 사랑과 분별로서 공동체를 건설하는데 힘써야 한다는 비전이다.
∙함께 협의해서: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도울 뿐이지만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람은 공동체를 건설합니다……”(1고린 14,4-5). 상호의사소통만이 공동체에 건설적으로 작용한다는 의미의 비전이다.
∙영성적 전망(전례 중심 공동체): 하느님 말씀을 듣거나 성찬례를 거행하기 위해 모인 집회(1고린 11,18 외)를 의미한다.
∙역동적 전망(가정 교회): 사도 바오로가 세운 가정 집회(로마 16,3 외)를 의미한다.
∙구체적 전망(지역 교회): ‘예루살렘 공동체’(사도 11,22), ‘켄크레아 공동체’(로마 16,1) 등 구체적인 지역 교회를 일컫는다.
∙보편적 전망(세계 교회): 전체 구원 공동체(골로사이서와 에페소서 참조)를 일컫는다.
◆ 하느님 백성과 콤뮤니오 교회관의 비교
∙계약의 백성: 그리스도 교회를 ‘하느님 백성’으로 일컫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바로 구약성서의 ‘계약의 백성’의 명맥을 잇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구세사적 소명: 하느님 백성은 집단적으로 ‘사제직’과 ‘성화직’(출애 19,6; 2베드 2,9)에로 불리웠다. 이는 곧 구세사적 소명을 수행하는 ‘만인사제직’에 대한 자의식으로 연결된다.
∙백성의 평등성: 하느님 백성(가족)은 모두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동등한 신분이다.
∙역사성과 종말론적 성격: 하느님 백성은 역사 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는 존재이다. 결국 현재 완성된 실재가 아니고 종말의 완성을 향하여 끊임없이 자기 발전을 도모해야 하는 실재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느님 백성’의 본질적 특성은 시대와 상황 속에서 세상을 위한 자신의 구원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역동적 소명’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직무와 위계: 콤뮤니오(=사귐, 나눔, 친교)는 전통적으로 ‘수직적 콤뮤니오’에 치중하여 고찰되어 왔다. 이는 그리스도 교회가 “모든 합법적인 지역 공동체에 현존”(교회헌장, 26항)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여기서 ‘합법성’을 매개하는 교계 제도, 곧 직무와 위계의 역할이 부각된다.
∙주교단의 협의체성: 주교단의 협의체성은 수직적 콤뮤니오의 기간(基幹)인 교계직무 내에서의 수평적 콤뮤니오를 의미하며, 전 신자 사이의 콤뮤니오를 위한 바탕이 된다.
∙공동체의 일치: 수직적 콤뮤니오와 수평적 콤뮤니오의 총화(總和)로서 공동체의 일치가 이루어진다.
∙수평적 콤뮤니오: 이는 전체 교회가 결국 ‘공동체들의 친교’로서 존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이 근래에 강조되고 있는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성과이다.
결과적으로 ‘콤뮤니오’의 본질적 특성은 ‘연대의식’으로서 구체적으로 교계에 대한 충실과 지역 교회에 대한 형제애를 동시에 요청하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뉴리더십(New leadership)
시대와 상황이 총체적으로 이른바 ‘뉴리더십’을 요청하고 있다. ‘뉴리더십’의 ‘새로움’(new)은 종래의 리더십을 적당히 개선(改善)한 정도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러 견해를 조합하면 “리더십이란 공동목표를 향해 집단의 활동을 이끌어 나가는 한 개인의 영향력의 행사이다.”라는 정의로 압축된다. 여기서 리더십 유형을 결정짓는 변수로서 지도자, (추종)집단, 공동의 목표 등 3 요소가 부각된다. ‘뉴리더십’의 ‘새로움’은 바로 이들 3변수와 관련하여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1)우선 지도자를 보는 관점의 변화가 ‘새로운’ 리더십을 요청한다: 영웅에서 동반자로, 리더십 독점에서 리더십의 공유로, 통제력에서 친화력에로, 직위 중심에서 역할 중심에로 관점이 바뀌는 추세이다. 이런 양상은 교회 안팎에서 똑같이 전개되고 있다 (2)다음으로 (추종)집단의 변화가 ‘새로운’ 리더십을 요청한다: 기업이나 정부기관은 이미 생산자중심의 서비스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전환했다. 이런 현실에서 구매행위 또는 권리행사의 당당한 주체로서 대우받는데 익숙해진 신자들은 교회 내에서도 자신들의 의사와 제안이 수렴되어 교회운영에 반영되기를 점점 크게 기대하고 있다. 또한 독립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한 N세대가 점차 기성세대권으로 진입하고 있음도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간과할 수 없는 압박요인이라 할 수 있다. (3)그리고 공동의 목표가 ‘새로움’을 요청한다: 새시대의 사람들은 지도자가 선각(先覺)하여 제시하는 목표를 더 이상 공동의 목표로 인정하지 않는다. 21세기의 국민은 ‘잘살아보세’라는 구호로 국가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던 박정희식 지도력에 콧방귀도 끼지 않는다. 개개인(국민)의 복지와 이익을 무시한 정부의 정책에 동의하는 국민은 더 이상 없다. 요컨대, 신자 개개인의 욕구와 바람을 수렴한 ‘공유 비전’이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 내에서도 신자들의 원의를 무시하면서 명분과 당위성만 내세우는 논리로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 미래교회에 전개될 것이다.
종합하자면, 새시대가 요청하는 뉴리더십은 다음의 3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로 새 시대에 요청되는 뉴리더십은 ‘공동참여형 리더십’이다. 지도자가 스스로를 ‘동반자’로 여기며 자신의 리더십을 분담하려는 의지를 지녀서 주체의식과 참여욕구가 높은 공동체 구성원들과 함께 공유비전을 추구하는 리더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조직을 협의체적으로 관리-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로 ‘조정자형 리더십’이어야 한다. 다원적 사고와 개성이 강한 N세대 의식구조 성향을 지니고 있는 교회 구성원들과 함께 공동체를 꾸려나가기 위해서 교회 지도층은 다양한 이해관계와 사고방식의 중재자요 조정자로서 지도역량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로 ‘개척자형 리더십’이어야 한다. 급변하는 시대상황에서 지도자가 ‘신앙의 유산을 지키고 교회를 잘 관리하는 감독자’의 경직된 자세를 탈피하여 새시대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줄 아는 개척적인 리더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신자들의 파견소명과 은사를 일깨우고 독려 내지 조산해주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평신도들로 하여금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붙여놓은 ‘은총의 수혜자’ 즉 미성년자(未成年者)라는 딱지를 떼고 교회사명 수행의 능동적인 주체(선교교령, 15.19항)로 발돋움하게 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에 귀기울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사목자들은〔…〕평신도들의 의견을 참작하고, 그들을 믿고, 교회에 봉사할 일을 맡기고〔…〕평신도들의 창의와 요청과 소망을 자모적 사랑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존중할 것이다.” (교회헌장, 37항)
아름다움 사람들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삶이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은 달리는 사람들입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은 자신의 소질이나 능력을 한껏 발휘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은 사명감으로 가슴이 뜨거운 사람들입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은 땀을 흘리는 사람들입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은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은 이 세상 생명을 다할 때 타다 남은 불씨를 남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아름다운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삶을 기뻐하십니다.
당신이 능력을 다하는 삶을 살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삶을 ‘거룩한 산 제물’(로마 12,2)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당신이 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청년 사울을 역으로 그리스도의 선포자 사도 바울로가 되도록 선택하셨는지 그 이유를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단 하나의 이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로에게 뜨거운 가슴, 곧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율법’을 향한 남다른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원로들에게 자청하여 ‘율법의 파괴자’로 보이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할 요량으로 말을 타고 다마스커스로 떠나기 까지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그 마음을 갸륵히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열정을 그리스도를 위한 열정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하느님께서 속을 끓일 일이 없었습니다. 바울로가 알아서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열정이 있는 자를 좋아하십니다. 열정이 있는 자를 당신의 도구로 쓰십니다. 왜냐하면 열정이 있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방향만 조정해주면 되기 때문입니다.
훗날 바울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그것을 이미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를 부르셔서 높은 곳에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나의 목표이며 내가 바라는 상입니다”(필립비 3,12-14).
이는 당신과 나를 위한 말씀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을 위해, 그리스도를 위해, 교회를 위해, 당신 자신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향해 혼신을 다해 ‘달리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받은 달란트가 다섯이면 다섯을 더 늘려서, 둘이면 둘을 더 늘려서 주님께 돌려드리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3,12).
당신께서 후회 없이 당신의 가능성을 꽃피우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가톨릭 신자는 무엇을 믿는가?>에서)
예수 성심에 취한 열성
청년 송해봉 세례자 요한의 신앙을 소개합니다. 그는 1927년 경기도 부천구 계양면에서 2남 4녀중 장남으로 모태 신앙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는 계산 초등학교, 인천 기계 공고를 거쳐 44년 덕원신학교 중등 4년 과정으로 편입하여 신학생 생활을 하던 중 45년 해방 이후 사제가 되기 위한 학업과정을 중도에 포기하고 고촌 은행정 마을(현 김포시 고촌면 신곡리 은행정)로 들어가 야학을 운영하며 전교 활동을 벌입니다.
이후 몇 년간 은행정과 누산리 공소(현 김포시 양촌면 누산리)를 오가며 펼친 전교 활동은 가히 성인의 수준이 아니고는 이룰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신앙과 열정과 수고는 가는 곳마다 청년이고 어른이고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고 합니다.
“내 별명은 공깃돌이야. 공깃돌이 무슨 뜻인고 하니 누구든 아쉬운 때 갖고 놀고 싶은 만큼 갖고 놀고 필요 없어지면 버리라는 의미지, 여러분은 이제부터 공깃돌 놀이하듯 나와 함께 신나게 공부해보자.”
이렇게 해서 청년 송해봉을 공기돌 선생이라고 불렀는데, 그렇게 사람들에게 버려진 공기돌이 될 때 하느님께서 진주로 여겨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익숙하거나 교훈이 될만한 구절을 뽑아 교리와 병행하여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 가르침이 얼마나 명쾌하고 재미있고 엄했던지 당시의 제자로서 지금 생존하는 이들의 증언을 들으면 오늘날까지 잊히지 않고 기억이 날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청년 송해봉은 50년 6.25전쟁 당시 천주교가 동네에 전파되는 데 반감을 가진 주민 일가의 밀고로 빨갱이로 몰려 총살형을 당하고 맙니다. 그의 죽음은 신앙 전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은 순교였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의 유해를 발굴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이들과 함께 묻혔으나 그의 십자가와 새까만 수단과 묵주가 썩지 않아 신원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의 시체와 함께 있던 널판지에는 장미 넝쿨이 우거져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사실을 여러 사람이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의 유해는 계양산에 묻혀졌다가 김포 성당 묘지로 이장되었다고 합니다.
청년 송해봉 세례자 요한은 평소 세례자 요한처럼 살다가 순교하기를 소원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가 선교 열정을 못다 쏟아냈던 고촌 공소에는 인천 교구 고촌 성당이 들어섰고 그가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던 누산리 공소에는 인천 교구 사목연구소가 들어서 있습니다. 공인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성인의 반열에서 오늘도 살아 활약하고 계십니다.
다음은 그가 괘도에 적어 교우들에게 반복 주지시켰던 일종의 생활 지침입니다.
당신께서 천천히 읽으면서 그 깊은 뜻과 그 강렬한 분발심과 그 큰 안목에 심취하기를 바랍니다.
<공기돌이 전하는 말>
- 스스로 고통을 받고 배고프고 추우면 주님의 수고 수난이 생각날 것이다.
- 외면적으로 주님의 사도가 되고 내면적으로 온전한 수도자가 되어라
- 시간묵상과 화살기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성인성녀가 되고 말 것이다.
- 손과 발을 움직여 일을 하는 순간에도 마음과 뜻은 창으로 찔린 예수 성심 안에 있어야 할 것이다.
- 박애의 근본정신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과 같이 고통을 당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과 같이 눈물을 진실로 흘리며 우는데 있는 것이다.
- 주님의 종 공기돌의 동지는 절대로 혼자 천국에 가기를 원치 않고 여하한 방법으로든지 죄악 중에 방황하는 남녀노소의 수 많은 영혼을 이끌고 가야 할 것이다.
- 보통의 열성은 보통의 일 밖에 못한다. 봉건사상에 젖고 유도사상(儒道思想)에 박히고 미신숭상에 젖은 삼천리강산의 동포의 무리를 진리의 성신으로 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첫째, 보통이 아닌 초자연적 열성과 둘째, 예수성심에 취한 열성으로 피눈물의 희생과 고통을 극복하는 정신이어야 한다.
- 성모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는 다리 없는 강을 건너가는 것과 같아 성모 마리아를 열심히 공경치 않고는 우리들의 사업은 실패할 것이다.
- 근심 고통이 없는 세상은 세상이 아니오 낙원지상이다. 고통의 길을 밟지 않고는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 너 성인성녀 되기를 먼저 원하라. 그리고 변변하지 못한 성인 성녀 되기를 원치 말고 완전한 성인성녀 되기를 원하라.
1950년 은행정(현 고촌성당) 강당에서 공기돌 송해봉 세례자 요한
송해봉 세례자 요한, 그는 한 개인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삶을 살았습니다.
당신께서 “그가 교회였고, 그가 교회를 세우는 또 다른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가톨릭 신자는 무엇을 믿는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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