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동엽신부님의 복음묵상 테이프를 듣고 일부만 옮겨 적은 것입니다...
예수 부활 대축일 복음 묵상 (루카 24, 1 - 12)
1. 말씀의 숲
오늘 복음은 부활의 아침에 일어난 일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부활의 빛은 주간 첫날 아침 일찍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들은 아침 일찍 미리 마련해둔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기 위해 무덤으로 간 여자들은 뜻밖에 빈 무덤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인들은 빈 무덤을 보고 당황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 침묵을 깨고 눈부시게 차려 입은 남자들이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루카 24, 5-7)
천사들의 이 말씀은 여인들에게는 마치 처음 듣는 말씀과도 같았습니다. 적어도 이 순간에는 말입니다. 하지만, 곧 여인들은 이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내용을 기억해 냈습니다. 옛날에는 알아들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말씀이 지금 여기 빈 무덤에서 천사들의 말을 통해 다시 살아나고 있었습니다.
이야기 시작 때 우리는 오늘은 주간 첫날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오늘이 ‘사흘째’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살아 있는 사람을 무덤에서 찾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분이신 예수님을 만나려면, 우리는 그분을 과거나 죽은 문자들 혹은 굳어버린 법과 계명에서 찾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삶이 있는 곳에서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의 말을 들은 여자들은 즉시 사도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그 말이 헛소리처럼 여겨져서 믿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수난으로 인한 충격이 너무 컸던 탓일까요? 베드로가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갔지만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의 눈에는 수의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사흘 만에 부활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들에게까지도 얼마나 믿기 어려운 일인가를 역력히 보여 주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부활을 믿고 이해하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어느 종교에서도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부활 사건 안에서 발견되는 첫 번째 요소는 바로 빈 무덤이었습니다. 이는 모든 복음서가 같이 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여인들이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먼저 만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발현은 그 다음의 일입니다. 곧 빈 무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결정적 물증이고, 예수님의 발현은 그러한 물증을 재차 확인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이 내용을 있는 그대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교회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에 대하여 유다 지도자들이 퍼뜨린 소위 <부활 사기극 설>의 흑색선전에 대항하여 사실을 사실대로 가르치는 어려운 일에 당면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이 부활 후 50일이 되는 오순절에 설교한 첫 내용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이었고 이 복음 설파는 가식 없이 부활 당시에 있었던 일 그대로는 사람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얼마 후 각 복음서도 부활 당시에 일어났던 사실 그대로는 순박하게 글로 전하고 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가장이나 가식이 필요했다면 예수님께서 무덤 속에서 일어나 무덤 덮개돌은 열고 천사들과 함께 무덤을 나오는 굉장한 광경을 지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설교에도 복음서 어느 구석에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광경을 전하는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네 복음서는 하나같이 안식일 다음날 아침 예수님의 무덤이 시체 없이 비어 있었다는 기사로 예수님 부활복음을 시작합니다.
(독일어 속담에 “예수님께서 백번을 부활하셔도 내가 한 번 부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이 부활의 기쁜 소식이 오늘 우리들 삶에서 메시지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나의 안식일 다음날 새벽 이른 아침이라고 생각해보자. 사순절 내내 기다리다가 이른 아침, 내가 무덤에 갔더니,, 무덤은 비어있고, 예수님은 안 계셨던 나의 체험을 기억해보자.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라는 나의 증언을 생각해보자. 남들의 증언만 듣지 말고,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라고 외칠 수 있는 ‘나’의 증언을 생각해보자...)
2. 말씀의 나무들
(생략)
안식일 다음날 부활하셨기에 주일이 생긴 것......(생략)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거라고 돌아가시기 전에..말씀하셨는데, 누구도 알아듣지 못했다. 모든 상황이 끝났다고 여겨지는 때에 그 비싼 향료를 들고 간 일은 순수한 사랑과 충절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여자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이제 아무것도 우리에게 해주실 수 없지만, 우리 기억 속에서 살아계신다.3년간 우리에게 너무 고맙게 해 주셨다.. 그 마음 하나로 무덤으로 간 것이다.. 그 마음이 감동적이다. 그것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있을 수 없는 일을 하신 것, 당시에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은 사실은 불리한 일이었다. 예수님이 의심받기 딱 좋은 일이었다. 별 이야기가 다 나올 법... 그리고 여자들의 말은 증인으로서 역할을 못했다. 여인들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이른 아침, 향료를 들고 가는 영성, 그 마음 때문이다.
오늘 우리들도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이 부분을 묵상해보면 길이 보임..
무덤문-- 동굴처럼 굴을 파고,,,,,, (생략)
무덤 돌이 굴려져 있었다. 마태오에는 천사들이 굴려냈다고 되어 있다. 여자들이 그 일로 당황하공 있는데..... 전에는 그냥 ‘예수님’이라고 부르다가 오늘 ‘주 예수님’이라고 부른다. 부활 이후부터 우리의 주님으로.....
빈무덤..- 당황, 사건이 암시된 잠재적인 상황, 우리들의 빈 무덤은 기도 후 무응답의 시간...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은데 답답하고.. 빈무덤의 시간을 잘 보내야한다.
천사한 분 -마르코, 마태오복음. 루카 요한복음에서는 -천사 두분 서로 달리 나타난다. 천사 앞에 관사처리가 되어 있다. 천사가 나타났다. 라고 하면 몇 명인지 관심 없을 때는 그냥 a 붙여 표현.. 천사가 몇 명이냐고 물으면 두 명이라고 대답했을 것... 기록하는 사람이 몇 명인가 관심 가져서 두 천사라는 것을 알았을 것.. 성경이 3,40년 후에 기록하니까..... 그런 것을 두고 성경을 틀렸다고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놀라운 것은 편집자의 양심이다. 편집자는 마태오, 루카, 요한 복음 가지고 와서 어디는 둘, 어디는 하나, 라고 표현되어 있다면 나중에 읽는 사람이 헷갈릴까 봐서 손을 댔을 것이다. 그런데 편집자는 그대로 두자, 나중에 읽는 사람들이 알아서 받아들일 것이라고 고치지 않고 편집했다. 편집자가 몰랐을 리가 없다. 성경은 객관적인 진술 인데 관점의 차이와 기술방식의 차이에 따라서 다르기도 하지만 사실을 부인할 근거가 될 수가 없다.
예루살렘 여정시작하시면서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받으신 다음.. 사흘만에 살아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천사들이 그 말을 상기시킴.. 그 말 들을 당시에는 못 알아들었었다.
제자들에게 이 일을 알렸다. - 무덤이 비어있습니다. 천사들이 살아나셨답니다... 라고 보고함.. 여자들이 여러 명 나옴. 루카복음은 막달라 마리아 사건을 소상하게 알고 있지 못했다. 다른 복음서의 내용은 또 다르다. 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맨 먼저 나타나심.. 루카에게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이 제일 의미가 깊고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그것만 기록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려가 ----개신교에서 베드로 사도를 격하하는 표현을 쓰는데. 초대교회에서는 베드로 사도의 행적, 동태에 대해 민감했다. 그래서 베드로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있는 것.
3. 오늘 우리에게도
1) 사흘만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그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루카 24,1)
칠흑의 밤, 여인들은 동이 트기만 기다렸습니다. 엊그제 금요일 늦은 오후에 십자가형으로 돌아가신 주님의 시신을 수습하여 무덤에 안장할 때, 경황이 없어 시신에 향료를 발라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으나 그 다음날 토요일은 안식일이라 모든 활동이 금지되었기에 주간 첫날 새벽이 오기만을 뜬눈으로 기다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 향료를 준비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희망을 접었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에게 더 이상의 미련도 욕심도 두지 않았지만, 지난 날 그분으로부터 받은 은총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당시에 집 한 채 값에 해당했다는 ‘향료’를 장만하여 무덤을 찾았습니다. 이를 테면 어떤 기대도 계산도 없는 순수한 정표였던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로 그 시간, 사도들은 자신들에게도 불똥이 튀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락방에서 문을 닫아걸고 선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바로 얼마 전, 예수님께서 한창 잘 나가실 때, 곧 머지 않아 정치적인 메시아로서 왕위에 등극하리라는 기대감이 고조되고 있을 때, 그들은 서열다툼을 했더랬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급전직하 상황이 예상 밖으로 위태로워지니까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려는 구차한 궁리를 하느라고 머리를 맞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적인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도들의 처신에 비할 때 여인들이 보여준 태도는 참으로 순수하고 의리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여인들의 사랑에 감복한 것일까, 주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부활의 기쁨을 가장 먼저 누리는 영광을 선사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절망이 희망으로, 죽음이 새 생명으로 , 불의의 폭행이 정의의 승리로 종식되는 극적인 3일간의 역전극이 당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 우대의 특별한 선택으로 장식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 우리는 극도의 절망이 엄습할 때마다 이 역사적인 3일을 기억합니다. 한 노인의 예화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합니다.
한 마을에 꽃을 파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노인은 가난했습니다. 복장은 허름했고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굴 전체에 항상 행복한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노인을 ‘행복한 할머나’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보지요?‘
노인은 특유의 밝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내게 행복의 비결이 하나 있지요.“
노인의 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 나이에 어찌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고통을 당할 때마다 저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금요일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흘만에 부활의 새벽을 맞지 않았습니까. 저는 고난이 다가올 때마다 마음 속으로 ‘사흘만 기다리자’고 다집합니다. 그 때부터 제 삶이 한결 행복해졌지요.”
노인이 누리는 행복의 근원은 부활의 소망이었습니다. 봄이 오면 앙상한 나뭇가지에도 새순이 돋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이렇게 속삭입시다. “사흘만 기다리자!”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3일’이라는 희망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 저희도 여인들처럼 절망의 끝자락에서도 순수한 사랑, 끝까지 충실한 믿음의 정절로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소서.
주님, 저희의 가난한 마음, 그러나 모든 것 팔아 ‘향료’를 살 마음만은 여전한 저희의 알량한 충절 속으로 당신의 부활을 드러내소서. 아멘!
2) 절망의 무덤에서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루카 24.5)
(영성적인 의미, 부활하신 후에 지금도 여전히 살아서 역사하시고 활동하시고 우리 안에 임재하시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계신다. 그 때 한 번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다 2000년전 사건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 계시고 감동을 주시고, 치유해주시고 어루만져주시고 살아계신 분이다.)
예수님은 돌무덤 속에 묻혀 있습니다.. 아무리 불러도 응답이 없습니다. 하느님 역시 침묵의 무덤 속에 은둔하시어 잠잠하기만 하십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묵묵부답입니다.
주변을 돌아보아도 내 손을 잡아줄 사람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 고독합니다. 세상에, 이 지구상에, 나에게 삶의 의욕을 불어 넣어줄 존재가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습니다. 허무한 바람만 휑하니 방향을 바꾸어 스쳐갑니다.
살다보면 이런 무드에 젖을 때가 누구에게든 있을 것입니다. 오늘만 해도, 이별의 고통으로 우울증에 걸린 딸내미를 걱정하는 모정 속에서, 그 딸의 심정에 안타까움과 함께 공감이 갔습니다.
우리는 흔히 ‘절망의 늪’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딱 맞는 말입니다. 절망은 마치 늪과 같아서 한 번 빠져들면 그 안에서 몸부림칠수록 더욱 깊이 빠져 듭니다. 유일한 탈출 방법은 무엇이 되었건 희망의 줄을 잡는 것입니다. 절망 언저리에서는 벗어나려 아무리 바둥거려도 더욱 사태가 악화될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가 바로 이 메시지를 전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죽은 이들이 누워있는 무덤에서는 ‘살아계신 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절망의 늪에서 아무리 살 길을 찾아 봐도 거기에는 방도가 없습니다. 그 때에는 밖에서 던져지는 희망의 끈을 잡아야만 살아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무지개 원리에 이런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오스트리아 출신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이 겪은 이야기이다. 그는 어느 날 새벽 2시경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착 가라앉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당신이 그 유명한 정신과 의시안 프랭클인가요?”
“그렇습니다만...”
“밤 늦게 죄송해요. 그러나 전 살 힘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구요. 그래서 지금 죽으려고 제 손에 약을 한 움큼 갖고 있어요. 전 이제 죽어요.”
프랭클은 ‘어떤 경우에도 자살할 필요는 없다, 죽을 각오로 노력하면 극복하지 못할 어려움은 업ㅈㅅ다’하며 다급하게 부인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그녀는 프랭클의 말대로 자살을 미루는 대신, 지금 좀 만나자고 했다. 프랭클은 허락하고 그녀를 기다리면서 몹시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말이 그녀로 하여금 자살할 마음을 멈추게 했을까?
그 여인을 만난 프랭클은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저는 선생님이 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제가 자살할 마음을 바꾼 것은, 생판 오르는 여자가 밤 늦게 전화해 죽겠다고 넋두리를 늘어 놓는데도 전혀 싫은 기색 없이 애쓰시는 선생님을 생각하니, 이런 사람이 있는 세상이라면 아직은 살아볼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신과 전문의들은 자살의 이유로 ‘우울증’이란 내적 요인에 주목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봉착해도 우울증이 없으면 자살하지 않고 반대로 우울증이 있으면 사소한 충격에도 쉽게 생명을 끊는다는 것입니다. 통계상 자살 기도자의 70-80%가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현대의학은 이러한 우울증을 정신질환이 아니라 고혈압처럼 약물로 치료해야 하는 뇌질환으로 봅니다.
저는 우울증의 묘약으로 ‘의미’를 꼽고 싶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면 삶에 대하여 긍정적인 사고를 하게 마련입니다. 제가 졸저 <무지개 원리>에서 적었듯이 긍정적인 사고는 우리에게 행복감을 가져다주는 뇌내 모르핀을 분비시켜 줍니다. 약을 먹지 않아도 우울증을 몰아내는 엔돌핀이 형성된다는 말입니다.
‘의미’를 심리요법에 도입한 사람은 빅터 프랭클 입니다. 그는 인간은 원초적으로 ‘의미’를 갈구하는 욕구를 지녔다고 봤습니다. 인간은 흔히 사람들이 말하듯 쾌락에의 의지와 권력에의 의지를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보다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욕구는 ‘의미를 향한 욕구’라는 것입니다. 앞의 두 가지가 충족되어도 이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할 수 없고 앞의 두 가지가 결여 되어도 의미를 향한 욕구가 충족되면 인간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미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관계에서 발견되는 존재의 보람을 말합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 나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생각, 이런 느낌과 생각들이 ‘의미’를 발견하는 계기가 됩니다.
저는 남을 기쁘게 해 주고, 절망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때 의미를 발견합니다. 사실 진정한 의미를 이런 것들보다 훨씬 큰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작은 일들에도 분명코 의미가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아봅시다. 절망한 이웃들에게 의미를 발견하도록 따뜻한 관심을 베풀어 줍시다. 의미가 나를 행복하게 하고, 사회를 우울증이라는 고질병에서 구해 줄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혹여 저희가 절망의 늪에 빠질 때에 저희에게 ‘의미’라는 희망의 끈을 발견하게 하소서. 가족, 친지,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살아야할 터럭만한 이유가 있어도 그것이 내 존재의 진정한 ‘의미’임을 깨닫게 하소서.
주님, 제가 악을 선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허무를 의미로 이기도록 제게 삶의 지혜를 주소서. 아멘!
3) 그러나
사도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루카 24,11)
예수님께 향료를 발라드리기 위해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은, 그곳에서 빈 무덤을 보고, 천사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전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여인들의 이야기를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다’. ‘너무 충격이 심해 헛소리를 하는군’ 이런 식으로 생각하며 그 이야기를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그러한 모습은 현대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교를 비판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그런 자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내용들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아라” “맹신이다.이성을 상실한 사람들의 소리다.”등등 자신들의 잣대로 신앙인들과 신앙 교리를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다음과 같은 글들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예수부활은 그 제자들에 의한 희대의 사기극이었지요. 그런 소문을 내고 자기들이 만든 성경으로 교세를 확장한 것이지요.”(네이버 지식인, FOOOT)
"별의 별 마법과 환술이 다 횡횡하는군요. 그런 거 없으면 종교가 너무 무미건조해지나? 무협지에는 장풍도 나오고 검풍도 나와야 맛이지만, 종교가 무슨 무협지 수준도 아니고...“
“저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지 절대 반종교 주의자, 이런 사람 아닙니다. 그냥 성경과 예수에 대해 말도 안되는 소리가 너무 많아서 그렇습니다.. ..... 예수 부활이란게 말이 됩니까?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를 찬양하는 이유를 말해주세요. 이게 제일 궁금, 예수께서 평화운동을 전개했습니까? 불쌍한 사람들 위해 치료했습니까? 가난하고 죽어가는 사람들 위해 위양소를 건설했습니까? 기부금을 많이 냈습니까? 인권운동을 했습니까? 이것도 아닌데 왜 그러는지 궁금합니다. 제발 좀 답변해주세요.” (네이버 지식인, NICE....N)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치 제자들이 여인들을 대했듯이 ‘미쳤군’ ‘제 정신이 아니야’ ‘저사람 광신도군’ ‘세뇌당했다’ 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지금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됩니다.
이런 사람들의 질문은 대부분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합니다. 그러니까 이미 입장이 정해져 있고, 그 입장을 고수하면서 닫힌 마음으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다락방 문을 잠갔던 제자들의 심정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 닫힌 문을 관통하여 그들 앞에 나타났을 때, 예수님의 부활을 진실로 믿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객기어린 질문, 예리한 듯 하지만 헛똑똑한 질문에는 어떤 조리 있는 설명도 통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 질문 속에 억지가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면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을 경우, 주님께서 그의 명오를 열어주시도록 기도하면서 때를 기다리면, 반드시 결실이 있을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여인들의 말에 제자들도 믿지 못하였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 저희로 하여금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저희에게 믿음을 주소서.
그 믿음으로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 이웃들, 친지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도록 기도하며 기다리겠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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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복음 묵상은 마지막으로 올립니다. 힘들기도 할 뿐더러,, 저작권 침해 같아서..
00이님이 사람들이 부활을 어떻게 믿겠느냐고,, 글 올리셨길래,, 생각나서 베껴보았습니다.
성경해석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해서..
주문하셔서 들으실 분들은 02- 322- 6109, 322-6158 로 주문하십시오.
운전 중이나, 집안 일 하시면서 틀어놓고 여러 번 들으시면 좋습니다.
이런 말 적으니까 제가 판매사원 같네용. 혼자 듣기 아까워서 그렇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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