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수난성지주일 복음묵상
(루까 복음 19:28-40절 말씀)
(앞부분 생략, )
말씀의 숲 (테이프로 들은 강의내용을 옮긴 거라 문장이 불완전합니다. 줄거리만 담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리코에서 자캐오의 환영을 받으시고, 사람들에게 돈 맡는 관리자들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입성에 대한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진술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세 번 예루살렘에 등장하십니다. 하지만 공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단 한 번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우리는 탄력있게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공관복음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한 번만 기록한 것은 ,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행을 클로즈업시켜서 강조한 것이지, ‘딱 한 번만 입성하셨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특히 루카복음은 ‘예루살렘’을 둘러싼 이야기 속에서 그 절정에 이릅니다. 루카는 자신의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님을 완성의 도시, 하느님의 모든 약속을 받은 도시인 예루살렘을 향해 순례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향해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루카는 자신의 여행 보도에서 예수님의 길을 우리의 길을 위한 모범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의 영도자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보다 앞서 가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그분을 따라가는 것 뿐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참된 삶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타니아와 벳파게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루살렘을 입성하기 위한 준비를 하십니다. 바로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를 끌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즈카르야 예언자의 말을 기억나게 합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 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예수님의 예견대로 파견된 두 제자는 새끼 나귀를 발견하고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어린 나귀 등에 자신들의 겉옷을 깔고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시자 서로 다른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가난한 백성은 예수님을 정의와 평화를 확립하고 가난한 이들과 약자들을 자유롭게 할 메시아(왕)으로서 환영하고 환호합니다. 마침내 자유와 생명을 숨쉬고 누릴 때가 왔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바리사이인들은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거짓고 허위, 삶과 동떨어진 종교, 기회주의, 술수의 종언을 고할 때가 온 것입니다. 즉 자기네 특권에 위협을 느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불만을 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입을 닫는다면 무생물이 당신의 왕권과 메시아 신분을 외치며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더 잘 알아들을 것이라고 그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지상에서의 그분 생애의 마지막 단계로 고난의 시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립니다.
((수난복음 중에서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복음만 묵상합니다.
예수님이 공생활을 출발하신 곳은 벽지였던 갈릴래아였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북쪽에서 대구쯤으로 내려오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3년간의 행적을 단순하게 말하자면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기에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거기서는 반대자들하고 크게 부딪칠 일이 별로 없는 곳이었습니다. 갈릴래아에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드물게 있었지만 예루살렘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본거지였습니다.
공관 복음서에서는 이 길을 강조하기 위해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해서 한 번만 가신 것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근데 재밌는 점은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세 번 가신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성경이 서로 차이가 있는 겁니다.
요즘 도올 김용옥씨가 여기에 대해서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봐라. 이야기가 서로 다른데, 이걸 어떻게 믿느냐?” 요한복음은 세 번 갔다고 기록하고 있고 공관복음은 한 번 갔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어떻게 믿느냐, 라고 도올이 이야기합니다. 아주 유치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신 사건은 세 번이 될 수도 있고, 네 번이 될 수도 있고, 다섯 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 뒤를 따라 다니면서 일일이 비디오에 찍어서 담아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기억을 더듬어서 쓰다가 보면, 구도를 가지고 쓰는데 어떤 사람이 세 번 가신 것을 한 번이라고 기록했을 때는 그 한 번 가신 길을 클로즈업시킨 겁니다.. 나머지 두 번이 빠진 것은 빠진 것이지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얘기할 때 기억이 안 나는 부분 빠뜨리고 기억나는 부분을 이야기합니다. 그럼 그게 틀린 말입니까? 아닙니다. 기술하는 방식을 가지고 유치원생 이야기하듯이 한 곳에서는 세 번, 한 곳에서는 한 번인데 어떻게 믿느냐 라고 하는 것은 아주 유치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탄력적으로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신자들 중에서 “어머, 내가 잘못 믿고 있었네”하고 말려드는 사람이 있을 까봐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할 때 예루살렘은 성도, 완성의 도시, 세계의 배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사람들은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듯이.
예수님은 그 완성의 도시로 올라가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앞장서서 가셨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 말씀은 예수님께서 앞에 가셨다는 얘기도 되지만 , 결국 우리가 갈 길을 먼저 가셨다. 우리의 본보기이시다. 그러니 우리도 진정한 예루살렘, 천상의 예루살렘을 가려면 그 가시밭길을 피할 수는 없다.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가서 결국 부활의 영광을 차지하는 것이다. (생략)
거기서 지역적으로 오늘 이야기 전개되는 동네 베타니아와 벳파게라는 동네가 나옵니다. 우리나라 북쪽에서 내려온다고 치면 판문점 쯤에 해당되는 지역입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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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셨을 때 두 가지 반응이 있었습니다. 군중들, 무리들은 예수님을 환영하면서 예수님께 겉옷까지 깔아서 찬양을 했고, 바리사이들은 거기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따졌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든 양면적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메시지가 던져지면 그 메시지가 기쁨이 되는 사람이 있고, 그 메시지가 불행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되는 것은 없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쁜 소식이 전해졌을 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복음이지만 안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비극입니다.))))
말씀의 나무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다.”
“앞장서서”
방금 말씀 드린대로 제자들이 가야될 길을 본을 보이신 것, 우리 신자들이 가는 길을 본을 보이신 것,
루까복음 원어에 예루살렘은 ‘예로솔리마?’ 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다른 복음에는 예루살렘이라고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표기는 원주민들, 유다인들이 자부심을 갖고 쓰는 용어입니다. 즉, 예루살렘은 성도다, 모든 것의 중심이고 목표다라는 생각으로 사용했습니다..
루까복음은 이방인들이 부르는 이름으로 ‘예로솔리마’ 라고 썼다. 왜 그랬냐면 예루살렘은 어두움의 측면이 있기에.. 예수님을 박해한 곳, 십자가에 못 박은 곳. 이런 의미가 있기에 약간 반감을 드러내면서 이방인들이 부르는 이름으로 ‘예로솔리마’를 선택했습니다.
“올리브 산이라고 불리는 곳 근처 베타니아와 베파게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성서에서 보면 올리브 산이 자주 나온다. 예루살렘 약간 동쪽에 위치한, 예루살렘 성전 동쪽과 올리브산 사이에 깊은 히드론 골짜기가 있다. 성전이 골짜기 위,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성전에 올라가 보면 골짜기가 보인다. 그 골짜기 건너에 맞은 편이 올리브 산이 보인다. 예루살렘 입성하는 사람들은 그 동네를 거쳐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올리브 산은 예루살렘의 바로 이웃해 있는 산인데, 메시아(구원자, 구세주)가 나타날 때 그 곳에 나타나실 거라고 유다인들이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올리브 산이라고 굳이 명시한 것이다. 메시아와의 연관성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베타니아와 베파게는 먼저___(생략)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며 말씀하셨다. 맞은 쪽 동네로 가거라 그 곳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풀어 끌고 오너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자캐오를 만나셨고, 베타니아라는 동네에서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날이 예루살렘에서 과월절 지내기 일주일 전이다. 거기서부터 예수님께서 마지막 장정에 오르시는데 베타니아의 맞은 편이라고 했으니 베파게라는 동네이다. 마지막 과월절을 지내기 위해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마을이었다. 거기서 나귀를 풀어 오너라,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왜 뜬금없이 나귀를 풀어오라고 했을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즈카르야 예언서에 나귀 이야기가 나온다. (즈카르야 9.9)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 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메시아가 나귀를 타고 오신다라는 말을 이미 즈카르야 예언자가 했다. 바로 그 예언의 완성으로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왜 어린 새끼 나귀일까? 새끼는 겸손한 것, 순수한 것을 상징하고, 나귀는 겸손한 것을 상징한다. 나귀가 원래 짐나르는 짐승이고,(중략), 겸손을 표현하기 위해서, 어리다,,라는 표현은 순수하다라는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누가 너에게 왜 푸는 거요? 하고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여라.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표현하실 때 늘 ‘사람의 아들’이라고 표현하셨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당신을 명백히 “주님” 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권한이 있다. 메시아다. 내가 생사화복, 흥망성쇠의 권한을 쥐고 있는 메시아다. 라는 말씀을 하신 겁니다.
(생략)
“분부를 받은 이들이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다.”
음미할 가치가 있는 부분입니다. 그대로 였다. 즈가르야가 예언한 것이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대로 이루어진 이 말씀을 삐딱한 사람들은 삐딱하게 본다. 이 말씀이 진리인가? 이게 이대로 이루어지나? 그런 사람들한테는 오묘하신 하느님께서 그대로 안 이루어주신다. (생략) 인터넷에 보면 젊은 이들 사이에서도 도올 김용옥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내용들이 그들에게는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면 그들은 안 받아들이니까.. 하지만 우리에게는 기적이 일어난다. 우리에게는 생명이 된다. 이게 무슨 행복이야? 하고 거절하는 사람들한테는 결국 안 일어난다. 그러나 이것이 생명이다. 행복이다. 진리다.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한테는 그대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그들이 어린나귀를 푸는데, 그 주인이 ”왜 어린 나귀를 푸는 거요?“하고 물었다.~~~~”
겉옷을 깔았다. 우리는 겉옷이 여러벌이지만, 그 당시 유다인들은 많아야 두 벌, 세벌, 두벌, 세벌 되는 사람은 부자, 겉옷은 다기능을 갖고 있었다. 이불도 되고, 어떤 때는 담보역할 도 했어요. 굉장히 중요하니까. 급전이 필요하면 담보도 되었다. 겉옷을 깔았다, 라는 것은 예수님께 대단한 존경의 표현을 하고 있는 거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종려나무 가지를 깐 것으로 되어 있는데, 루까복음에서는 겉옷만 깐 것으로 되어 있어요. 여기도 마찬가지이다. 이 성경을 유치하게 읽으면 다르지 않느냐? 라고 한다. 사실은 겉옷과 종려나무를 같이 깔았다. 근데 어떤 사람들은 종려나무만 기억이 나는 거고, 어떤 사람은 겉옷만 기억이 나는 거고, 자기들이 본 것만, 강조하는 것만 기록을 한 거다. 그리고 루까는 종려나무가 깔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이방인들은 종려나무 그거 왜 깔았어? 문화적인 차이로 설명하기가 복잡하다. 그런데 겉옷이라고 하면 누구나 이해를 한다. 야. 저 사람들 예수님에 대해 대단한 마음을 품고 있었군,이라고...
“예수님께서 어느덧 올리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이르시자 제자들이 무리가 다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 때문에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기 시작하였다.
여기 제자들의 무리라고 되어 있어요. 열두 제자가 란 12명이지만 무리라고 하면 100명이 넘는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이 말씀은 시편이다. 시편 118장 26절을 노래한 것이다. 이 시편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내용을 담고 있기에 이 시편을 노래하면서 예수님을 메시아임을 고백하고 찬양하고 있는 것
“하늘의 평화 ,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 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지만 정치적인 욕심으로 찬양하고 있다.
찬미하는 소리를 듣고 있던 바리사이가 화가 나서 예수님께 와서 따짐.“아니, 스승님”이라고.. 예수님은 당신을 “주님”이라고 하셨는데 바리사이들은 “랍비”라고 함. 예수님이 무명시절에는 다 랍비라고 불렀다. 바리사이들은 다시 ‘랍비’ 라고 부름, ‘당신이 무슨 주님이요? 당신이 어떻게 왕이요? 제자들을 꾸짖으시오. 당신을 찬양하도록 놔두는 것은 독성죄요...’ 라고 예수님께 가서 따집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때가 있다. 누군가가 말해야할 때 말하지 않으면 무생물이 말할 것이다. 역사의 진리를 믿어야한다. 사람이 말하지 않으면 언젠가 역사가 말해준다. 진리는 언젠가는 드러난다.
오늘 우리에게도.
1) 사명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다. (루카 19, 28)
오늘 예수님께서는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 길은 사명을 향한 길이었습니다. 어떤 고난과 박해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면 기꺼이 나아가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눈앞의 역경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감당하려는 자세, 이것이 사명자의 자세입니다. 그그로 투신할 만한 사명을 발견한 자만이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의 열정과 목숨을 쏟을 만한 사명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사명이 없어도 ‘친구따라 강남 가듯’ 길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명이 없는 사람은 당자아 눈 앞에 어려움이 닥치면 이내 포기하고 돌아서기 십상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세 때, 어느 수도원에서 하느님께 다가가기 위하여 수련을 하던 많은 수련자들이 수도원을 떠나갔습니다. 그러자 어느 한 수련자가 수도원을 떠나가는 자기 동료들을 말리다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수도원 원장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왜 그들이 떠나가는 것을 말리지 않으십니까?” 원장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사냥꾼이 수많은 사냥개를 풀어 토끼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 가운데서 맨 처음 토끼를 발견한 사냥개는 마구 짖어대며 그 토기를 쫓아갑니다. 그러면 토끼를 보지 못한 다른 사냥개들도 짖어대며 그 사냥개를 따라갑니다. 그러나 토끼를 직접 보지 못하고 따라가기만 했던 개들은 힘이 들거나 어떤 장애물이 나타나면 포기하고 되돌아옵니다. 그렇지만 토끼를 직접 본 개는 자기 목표를 확인하였기 때문에 어떠한 어려움이나 힘든 일이 있어도 꿋꿋하게 토끼만 보며 쫓아갑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련자는 아무 말없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오늘날 신자들 가운데서도 다른 신자들이 싫다고, 교회의 단체가 자기 뜻에 맞지 않는다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제법 있습니다. 남들이 하느님을 보았다고, 하느님을 체험했다고 해서 무턱대고 좇아만 간다면, 교회를 떠나고 싶은 이런 이유들이 생길 때 쉽게 주님을 포기하고 외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왜 성당을 다녀야 하는가, 왜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뒤따라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스스로 답할 수 있는 자신의 사명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명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명을 깨달아야 할까? 이 물음에 오프라 윈프리가 적절한 도움말을 줍니다. 윈프리는 최근 타임지가 선정한 미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 가운데 1위를 차지한 여성 토크진행자입니다.
그녀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시청자는 어림잡아서 천만 명이 넘습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미국사람들은 감동을 합니다. 그녀가 가난한 보육원을 방문하여서 그곳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10초만 이야기하면 다음날 수십억의 기부금이 들어옵니다. 그녀가 어느 책을 읽었다고 하는 말 한마디만 하면 다음날 그 책은 미국의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그녀의 이런 영향력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요? 그녀의 자서전 <이것이 사명이다>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윈프리는 사명에 관한 그녀의 네 가지 인생철학을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첫째,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둘째,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아파본 사람만이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남보다 설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넷째, 남보다 부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강요가 아니라 사명이다.”
그녀는 혼혈아로 태어나서 가난과 아픔 속에서 자랐지만 성경 속의 인물들을 모델로 삼아 그녀의 사명을 깨달았고, 그 사명에 대한 충실함이 오늘날 그녀를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명은 우리의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고 의미 있게 해줍니다.
남보다 더 많이 가졌습니까? 그것은 단순한 축복이 아니라, 남을 도우라고 하느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입니다.
남보다 더 큰 아픔을 지니고 있습니까?
그것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고통 받는 사람을 도우라고 주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입니다.
남보다 더 설레는 꿈이 있습니까? 생각만 해도 신이 나고 왠지 의욕이 솟는 일이 있습니까? 그것은 헛된 망상이 아니라, 그 것을 이뤄 세상에 유익을 끼치라고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입니다.
남보다 더 부담이 되는 것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은 그냥 넘어가는데 꼭 나에게만 마음이 걸리는 일이 있습니까? 가난한 이를 보면, 냉담바를 보면, 비신자를 보면 그냥 지나쳐지지 않는 이상한 연민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내가 예민함의 발로가 아니라, 주님께서 특별히 내게 주신 사명인 것입니다.
사명이 없는 삶은 죽은 삶입니다. 사명이 없는 삶은 허망하게 흘러가고 맙니다. 사명이 없는 삶은 쉽게 절망합니다. 사명이 우리에게 의욕과 활력과 용기와 인내심을 줍니다. 그러므로 가던 길을 멈추고 잠깐 자신의 사명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저희보다 앞서서 예루살렘을 향햐 가셨습니다. 그것은 사명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난으로 장식된 영광의 길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이었지만 종국에는 부활의 영광을 향한 길이었습니다.
주님, 저희 각자가 자신의 사명을 깨달을 수 있도록 빛을 비추어 주소서, 무엇이 되었건 각자의 처지에서 자신에게 주시는 주님의 사명을 깨닫게 하소서. 내가 가진 것이, 내가 부담을 느끼고 있는 그 무엇이 바로 주님께서 내게 주시는 사명입을 자각하게 하소거.
주님, 그 사명으로 제 가슴이 끓게 하소서. 아멘!
2) 제 겉옷을 깔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아가실 때에 그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루카 19, 36)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 자신들의 겉옷을 깔아드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2000년 전 이스라엘 민족의 의류문화를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당시에 같옷은 아주 귀한 것이었습니다. 부자나 겉옷을 여러 버러 가지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 겉옷은 밖에서 잠을 잘 때 이불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담보물로도 가치를 지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해 자신들의 겉옷을 깔았드렸다는 것은 자신들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기꺼이 내어 놓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이런 마음들을 그냥 지나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소중한 것을 내어 놓을 줄 아는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때가 되면 특별한 이벤트 선물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지난 구정 전 주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자매 두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중략)................................... “신부님, 사실은 제가 경제사정이 좋아서 봉헌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좀 답답한 일이 있지만, 믿음으로 봉헌하는 거예요.” 저는 얼떨결에 격려해드렸습니다. “자매님, 그 믿음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여기셔서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 이 일이 있고서 바로 이틀 후에 저는 주님께서 벌이신 특별 이벤트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여수 선원동 본당에서 ‘선교’특강을 하던 중 잠깐 쉬는 시간에 그 자매로부터 전화 전갈이 왔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 사이에 세 사지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빚지고 잠적했던 사람이 갑자가 나타나서 상환 약속을 해주어 다시 빚을 돌려받게 되었고, 집과 땅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입에서는 절로 “할렐루야”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물론, 이 자매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입니다. 하지만 이 체험 속에는 우리를 향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모든 정성을 어여삐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시간과 지면 때문에 다 밝히지 못해서 그렇지 제 주변에는 꼭 거짓말 같은 은총 체험 사례가 차고 넘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기도와 정성에 반드시 응답해주십니다. 방금 자매의 경우 그것이 속성으로 응답을 받은 점이 특이할 뿐이고, 사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든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에 하느님의 방법으로 꼭 응답해 주십니다.
열쇠는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일 정성입니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내어 놓는 정성이 있을 때 하늘문은 열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묵상을 해 놓고 보니 왠지 낯설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카톨릭 신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입니다. 진실은 진실입니다. 낯설다고 해서 거부하거나 반감을 가질 일은 아닌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저희가 살아 있는 믿음을 갖게 하소서,
주님, 저희가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이며, 율법주의적인 믿음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주님, 저희로 하여금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복음적인 믿음을 살게 하소서.
주님, 여러 가지 문제와 고민을 안고 사는 저희의 생활 현장에서 저희를 붙들어 주시고 도우시는 주님을 저희가 믿게 하소서.
그리고 그 믿음에 맞갖은 정성을 주님께 바치게 하소서. 아멘!
3) 돌들이 소리치리라.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루카 19, 40)
요즈음 도올이 EBS 외국어학습 인터넷 사이트에서 강의 중인 ‘영어로 읽는 도올의 요한복음’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는 ‘외국어 학습’을 빙자해서 또 다시 그의 혼돈스러운 궤변을 늘어 놓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폐기해야 한다느니, 4복음서도 객관적인 사실이 아닌 복음 전파 목적의 드라마라느니 하며 도올 특유의 극단적인 결론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의 논리전개는 대단히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그가 궤변에 능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궤변은 문장 하나하나를 보면 흠잡을 데가 없으나 전체 주장에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모순이 담겨 있는 말을 의미합니다. 도올의 말이 거의 이런 식입니다.
그는 자신의 궤변을 늘어놓기 위하여 신학서적을 폭넓게 탐독합니다. 탐독하괴 전체 맥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독서법이 아니라, 즉 전체적 구성과 의도를 읽으려는 독서법이 아니라, 비딱한 눈으로 트집거리를 찾아내어 그것을 침소봉대하려는 저의를 갖고 탐독합니다. 그래서 정통으로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면 누구든지 그가 제시하는 논거에 말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몇 가지 비딱한 자료를 대로 나머지 정통자료는 은폐한 채 결론을 내려서 영 엉뚱한 주장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심리적으로 자아망상증에 걸린 사람입니다.
그는 영적으로 무언가 반 그리스도교적인 힘에 의해 점령된 사람입니다.
그는 지혜를 가진 척 하지만 혼돈스런 지식으로 무장되었을 따름입니다.
그는 우주적인 사고를 가진 것처럼 스스로를 내세우지만, 그의 내면은 독선과 무지 그리고 왜곡된 정보고 가득 찬 사람입니다.
그는 영지주의자입니다. 스스로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그의 언행과 그의 저의는 영락없이 영지주의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원을 감추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는 스스로 신학자 행세를 하지만 신학자가 아닙니다. 그는 스스로 “오랫동안 기독교를 비판해봤지만 효과가 없어서 이제는 기독교가 정도로 가게 돕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올바른 길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정도를 가게 돕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는 도를 넘는 사람입니다. 그건 사람이 내뱉는 말을 따라다니며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냥 떠들다 지치게 만들면 됩니다.
이전에는 도올의 발언에 이것저것 대꾸를 해주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성이 없습니다. 여기 저기 시비를 걸고 싸움을 즐기는 시비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라고요.
교회가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입니다. 돌들이 진실을 외칠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저 불쌍한 영혼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주님, 저희는 괜찮사오나, 혹여 심지 얕은 당신의 양들이 저 불쌍한 영혼의 되지 않은 말에 현혹되어 신앙의 문을 닫아 버리거나, 이미 갖고 있는 신앙을 잃는 일이 없도록 부디 지켜 주소서. 아멘!
이상, 차동엽 신부님의 주일복음묵상 테이프에서 옮겼습니다.
주문 문의 02 - 322- 6109, 322- 6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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