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투병일기-2006년

용서의 기도' - 5월 5일

김레지나 2008. 8. 31. 17:10

용서의 기도

 

 

5월 5일 금요일

 

강마리아님은 오늘 많이 힘들어하셨다. 나는 손잡고 기도해 드릴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냥 내 자리에서 조용히 기도했다. 몸 여기 저기 성난 상처에 약을 발라드리지도 못했고, 간호하는 딸을 잠시 쉬게 하지도 못했다. 딸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강마리아님은 미음 몇 숟가락을 삼키고, 기침 가래약을 먹고, 많이 아프신지 소리를 질렀다.

"아이구, 하느님 아버지, 저 벌 좀 그만 주세요. 벌 좀 그만 주세요. 너무하십니다. 하느님."

나는 환자가 너무 불쌍해서 울기만 했다.

"하느님이 벌주시는 게 아니에요." 하고 말씀 드리고 싶었지만 믿지 못하실 것 같아서 아무런 말도 못했다.

 

 

병실이 너무 덥고, 속이 메슥거리고, 어찌해야 할지 막막해서 병실을 나와 버렸다. 친구에게 그 병실을 달라고 한 걸 후회했다. 불편하게 짐만 되지 않았나 싶었다. 병원에서 걸어서 2분 거리인 엄마 집에 와서 괴로운 마음을 잊기 위해 잤다.

 

 

한 숨 자고 일어났는데도 머리가 아팠다. 환자 본인의 기도도, 레지오 단원들의 기도도, 딸의 기도도, 내 기도도 환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토록 오래 질병에 시달렸는데 하느님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닌가? 병자성사? 봉성체? 더 오래고 끈질긴 기도? 뭐가 더 필요할까? 환자 스스로의 마음가짐?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 용서하는 마음? 뭐가 빠져있나? 환자는 신앙심이 거의 없기 때문에 고통을 봉헌하라는 둥, 예수님도 더한 고통을 견디셨다는 둥 하는 말들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다.

 

 

어제 샀던 '미사를 통한 치유'라는 책에 나온 아주 긴 용서의 기도문을 내일은 환자에게 읽어 주기로 했다. 마음을 낫게 하는 데는 화해와 용서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던가. 환자는 눈이 침침해서 책을 읽을 수가 없다고 했다. 내일은 더 오래 기도를 해 드리기로 했다. 기도는 응답을 받을 때까지 해야 한다고 하니.

 

 

강마리아님 딸에게 아빠 방 책꽂이에서 발견한 로사리오의 묵상이라는 책을 주었다. 20년 만에 다시 읽어보니 기독교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맨 처음 접하기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지 않나 싶었다. ‘내가 왜 이 책을 대학교 다닐 때 친구들에게 주었을까?’하고 잠시 뒤늦은 걱정을 했다. 하지만 마음이 급해서 다른 책을 고를 여유가 없었다.

 

 

마음이 너무 괴롭고, 광주에 있을 남은 기간 동안 무거운 마음으로 어찌 지낼까 싶어 무섭다. 속이 메슥거리는 것도 참기 힘들었다. 지금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강마리아님의 고통을 잊고 싶다. 모른 체 하고 싶다. 내일 우리 애들이 오면 잊을 수 있겠지. 그 때까지만 버티자.

 

 

5월 6일 토요일 

 

 

병원으로 가면서도 마음이 괴롭고, 내가 무슨 도움이라도 줄 수 있을까 걱정했다. 나에게 능력과 용기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걸었다.

 

 

병실에 가서 강마리아님와 딸 소영씨의 모습을 한 동안 지켜봤다. 소영씨는 아직 신앙이 없다고 했다. 강마리아님은 성당에 가본 적도 신부님을 만난 적도 없었다고 한다. 대세를 준 대모님이 00동 성당에 다닌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나는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다. 내가 기도문을 읽어 주면 소0씨가 괜히 심각한 분위기 만든다고 싫어할 것만 같았다. 외로운 마음이 들었다. 호스피스들에게 도움을 청할까도 생각했다. 기도한다고 나설 자신이 없어서 30분이 넘게 눈치만 살피고 앉아 있다가 ‘에라 모르겠다. 작정했던 거 해 보기나 해야 후회가 없겠지’생각하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저어...., 저,.... 어제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기도문을 하나 발견했거든요. 읽어드릴까요?”

나는 긴장되어서 마리아님의 반응이 어쨌는지 모르겠다. 눈빛으로 허락하는 듯했던 것도 같다.

바로 책을 들고 마리아님의 침대 옆으로 가서 접어놓은 부분을 펴서 읽어 나갔다.

초상집 분위기 만들면 안 되는데, 처음부터 눈물이 나서 똑똑한 발음으로 읽을 수가 없었다. 환자에게 필요 없는 부분은 빼고, 머릿속으로는 기도문을 편집해 가면서 알아듣게 읽으려고 애를 썼다.

 

 

 

용서의 기도

 

"주님, 저는 오늘 당신께 용서의 은총을 구합니다. 주님, 우리 가정에 죽음이나 질병이나 경제적인 곤란이 닥쳤던 모든 일에 대해 주님을 용서합니다. 또한 주위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하여 저 역시 당신의 형벌이라고 여겼던 모든 일에 대해 당신을 용서합니다. 당신에 대한 저의 마음은 반항과 원망으로 가득했습니다. 오늘 저의 마음과 영혼을 깨끗이 씻어 주소서,...........

주님, 저는 어머님께서 저에게 상처를 주시고, 저를 원망하시고, 저에게 화를 내시고, 저에게 벌을 주시고, 저보다 다른 형제들을 귀여워하셨던 그 모든 것에 대해 어머니를 용서합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저를 도와주시지 않고, 사랑을 충분히 주시지 않고, 애정을 표현하지 않고, 관심을 두지 않으시고, 시간을 함께 나누어 주기 않으신 것에 대해 아버지를 용서합니다.

주님. 저는 저를 따돌리고.... (중략 - 이웃, 친구, 선생님,,. 성직자들,... 살면서 만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용서의 기도문이 계속된다.)

주님, 특히 제 인생에 있어서 제게 가장 큰 상처를 준 그 사람을 용서할 은총을 제게 주소서. 또한 제 자신이 부모님들에게 상처를 입힌 것에 대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게 해 주소서, 무절제한 생활을 하고, 나쁜 책을 읽고, 음란한 생각과 타락한 행동을 하고, ..... 거짓말을 하고, 남을 속인 것에 대해 스스로를 용서하게 해 주소서.

주님, 제가 상처를 준 모든 사람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특히 부모님과 아이들과 저의 배우자에게 용서를 청합니다. 주님, 그들을 통해서 제게 내려 주신 사랑에 대하여 당신께 감사합니다. 아멘."

 

 

긴 기도문을 읽어 주면서 강마리아님이 안쓰러워서 울면서도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사람은 동시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더니 사실인 모양이다.

‘이런 기도문을 누가 모르는가?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내용인데. 이걸 읽어 주는 일이 강마리아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누구를 용서할 수 있을까? 아무런 느낌도 없다면 괜히 나 혼자서 심각하게 울고 끝나는 거 아닌가?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미안하고 멋쩍은 일이겠다. 에고, 반듯이 서서나 읽을 걸, 엉거주춤하게 서서 울면서 읽는 폼을 소영씨가 보고 별꼴이라고 하겠다.’

 

나는 몹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기도문을 읽어주며 한 기도 

 

 

성모님.

언제나 엄마로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성모님.

저에게는 이분을 위한 많은 시간이 없습니다.

마음이 급합니다.

제가 지금 이분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이분은 지금까지 너무 오래 고통을 겪으셔서

마음이 굳어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걸 탓하지는 마세요.

이분은 아직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지 못합니다.

제가 이렇게 울고 기도하니

제 마음이 이분을 대신할 수는 없을까요?

제 마음을 대신 받아주세요.

그래서 하느님께 이분을 위해 빌어주세요.

불쌍하게 여겨주세요. 

 

 

자신이 없고, 가슴이 아파서 겨우 겨우 읽어 나가는데 강마리아님이 우시는지 얼굴을 찌푸리셨다. 눈물이 마르고 힘이 없어서 우실 힘도 없으신 것 같았다.

 

다 읽고 나서 마리아님의 팔을 잡고 한참을 더 기도했다. 이왕이면 마리아님이 알아 듣게 해야 되겠다 싶어서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 앞에서 소리를 내어 기도했다.

“하느님, 이분은 아직 하느님을 잘 알지도 못하고, 기도를 어찌 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하느님, 하느님께서 먼저 이분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시오. 이분이 청하지 못하셔도 먼저 필요한 은총을 주십시오."

 

고통 받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이렇게 힘들고 눈물 나는 것인지 미처 몰랐다. 기도를 끝내고 딸의 얼굴을 보니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소0씨, 미안해요. 괜히 기도해 준다면서 분위기만 심각하게 만들어서,”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한테 괜한 일을 했나 싶어서 눈물도 제대로 못 닦고 병실을 나왔다.

 

 

오후 늦게 우리 가족과 남동생 가족이 모처럼 엄마 집에서 모였다. 어버이날이 가까워서 부모님께 카네이션과 선물을 드렸다. 우리 애들과 조카들은 좋아라고 이 방 저 방 다니면서 쉴 새 없이 놀았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캠코더에 담았다. 올케는 나를 위해서 떡잡채를 만들어 주었다. 음식 냄새가 아직은 싫어서 많이 먹지 못했다.

 

 

마음 한 구석은 강마리아님의 고통 때문에 여전히 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