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투병일기-2006년

사랑스런 아들들아. - 5월 7일

김레지나 2008. 8. 31. 17:12

사랑스런 아들들아.

 

 

5월 7일 일요일

 

눈을 뜨자 웬일인지 어제의 괴롭고 답답한 마음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했다. 아침은 다른 때 보다는 많이 먹었다.

 

 

남동생 가족은 조카들 외할머니 댁으로 떠나고, 우리 가족과 엄마는 담양의 대나무 축제를 구경하러 갔다.

관방천에 늘어진 벚나무길이 십리가 된다고 한다. 메타세콰이어 길이 멀리 보이고 대나무 숲도 근처에 있었다. 축제 행사로 재밌는 볼거리, 탈거리, 먹거리가 많았다. 루카와 유지니오는 하늘자전거와 수상자전거를 탔고, 대나무 물총쏘기를 했다. 어른들은 애들 노는 모습이 그저 보기 좋아서 즐거웠다.

 

오늘은 날씨가 무척 더웠다. 나는 면으로 된 모자를 쓰고 그 위에 챙이 있는 모자를 쓰고 있어서 더 힘들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애들은 서로 에어컨 바람이 잘 나오는 자리를 차지하려고 장난을 쳤다.

나는 머리와 얼굴에 나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으휴, 정말 이렇게 더운데 여름에 어떻게 살지? 모자 쓰고 살 일이 걱정이네. 벌써부터.”

그러자 둘째 유지니오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모자 벗어”

엥?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그럼 모자 벗고 지내라고”

나는 횡재한 느낌이 들었다.

‘아이고, 이 녀석아. 이제라도 고맙다이.’

 

루카와 유지니오는 내 맨머리를 끔찍하게 싫어한다. 머리를 깎은 후에 모자를 벗어 보이겠다고 해도 극구 싫다고 했다. 애들 자기 전에 이마 부분을 살짝 들어 보였더니 두 녀석이 동시에 “으악. 엄마, 꿈에 볼까 무서워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괜한 짓을 했나 싶어서 거짓말을 했다.

“야, 다들 내 머리 보고 귀엽다고 하던데, 뭘 그래? 니들도 자꾸 보면 귀엽게 느껴질지도 몰라.”

루카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른 것이 미안했던지 대꾸했다.

“그러고 보니 귀여운 것도 같네요. 네, 뭐 그렇죠, 귀엽기도 하네요.”

내 거짓말에 거짓말로 답하는 것이 뻔했지만 대답해 주었다.

“그럼, 귀엽지. 다들 귀엽다고 했거든”

그 후로 애들 앞에서는 늘 두건을 쓰고 지냈다.

 

 

언젠가 한 번은 내가 목욕탕에서 세수하느라 두건을 벗고 있다가 유지니오가 ‘쉬’한다고 해서 무심코 벗은 머리로 문을 열어 줬다. 미처 다 열지도 않았는데 정훈이가 “으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놀라서 나도 “으악, (아이고, 내 두건, 깜박했다.)”비명을 질렀다. 그 날 유지니오는 내 맨머리를 처음 본 거다. 내가 얼른 두건을 찾아 쓰는 바람에 루카는 그 날도 그 이후로도 내 머리를 본 적이 없다.

 

유지니오는 내가 더워서 모자 대신 손수건 한 장을 접어서 머리에 두르고 있으면 자주 지적을 했다. “엄마, 수건 좀 좋게 써 주실래요?” 내가 이마 앞 부분을 만져 보면서 “어? 제대로 썼는데 ”하면 “머리 뒷부분이 조금 보이잖아요”한다. 나는 속으로 ‘저 놈이, 뒷머리 조금 보이는 것 갖고 까탈을 부리기는’하고 생각하면서도 할 수 없이 다른 면모자로 바꾸어 쓰곤 했다. 유지니오 녀석은 존댓말 꼬박 꼬박 쓰는 형과 달리 늘 나에게 반말을 쓴다. 하지만 “모자 좀 똑바로 써 주실래요?”라는 말만 존대를 한다. 저도 나한테 미안한 건 아는 모양이다. 

 

그러던 유지니오가 이제는 모자 벗어도 된다고 한 거다. (다시 반말로. ㅋㅋ) 오늘 있었던 일 중에 가장 기쁜 일은 유지니오가 나를 위해서 싫은 것 꾹 참고 모자 벗어도 좋다고 말해 준 것이다.

루카랑 차 안에서 신나게 게임을 하고 나니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남편과 애들은 다시 집으로 내려갔다.

 

나는 강마리아님 생각이 나서 인터넷으로 자료를 뒤졌다. 호스피스들 이야기, 임종 때 도움이 되는 책들을 찾아보았다. ‘정말이지 모르겠다. 나로서는 더 이상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언제 이 책들을 주문해서 읽어보냔 말이다. 더구나 강마리아님이나 소영씨는 죽음을 아직은 생각하고 있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냥, 즐겁게 해 드려야겠다. 그렇지, 즐겁게. 다시는 그 분 앞에서는 기도해 드리지 말자. 괜히 눈물나게 해드리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