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와 하느님과 엄마의 병
2006년 말 항암을 한 후 일주일 입원해있다가 집에 돌아온 다음날 쓴 편지글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가득 찬 아침이에요
오늘 아침에도 가슴이 마구 설렜다가, 눈물이 났다가, 감사로 가슴이 먹먹해졌다가, 2,3분 만에 감정이 반복되어요. 저 이러다 정말 잘못 되는 거 아닌지 몰라요. 그럴 때는 자리에서 빨리 일어나야 돼요. 근데 제 옆에서 자고 있는 유지니오가 뒤척이는 모습이 하도 귀여워서 빨리 안 일어나고 누워있었어요. 유지니오 한 번 보고, 하느님 한 번 생각하고, 행복했어요.
어제 집에 돌아와서요.
저보다 늦게 유지니오가 태권도에서 돌아왔지요. 제가 너무 오랜만에 집에 왔나 봐요. 유지니오 얼굴이 좀 변했어요. 그 동안 자란 거지요. 그래서 미안해서 눈물이 났어요. 저를 보자마자 컴퓨터를 켜더니만 그동안 자기가 찾아낸 재밌는 졸라맨 플래시 만화를 보여주었지요. 아빠를 방에서 쫓아내더니 저만 보라고 하대요. 그러고는 자기도 방에서 나가요. 저 혼자 보면서 실컷 웃으라고.
저녁에 유지니오한테 눈높이를 하라고 했더니
“엄마가 와서 아주 기분 좋은 날인데, 그런 섭섭한 말을 하다니, 분위기 파악을 못해”라면서 안하고 버티는 거 있죠? 그 놈 말에 언제나 웃어버리고 말지요. 아주 못 말리는 놈이에요.
우리 루카는 영어학원 다니기 싫다고 울상을 하고 있었어요. 학원은 딱 하나 다니거든요. 좀 어려운데 그동안 아빠가 전혀 안 봐주었나 봐요. 의사 선생님이 ‘수행불안’이 있다고 하셔서, 당분간은 잘 챙겨줘야 하는데. 남편이 그렇지, 제가 영어 숙제하는 것 도와주었어요. 속상해요.
저녁에는 제가 유지니오를 울렸어요. 저 때문에 유진이 운 적은 지금까지 딱 두 번밖에 없어요. 제가 애들한테 화내거나 혼내지 않고 키우거든요.
유진이 네 살 때 백화점 식당에서 짜장면을 사 먹인 적이 있어요. 유진이 제 뒤에 따라오다가 제가 자리 찾아 들어가는 걸 못 보고 저를 잃어버린 거예요. 식탁에 식판 놓고 애들 찾으니까 없어요. 한 1분쯤 후에 찾았을 거예요. 엉엉 울고 있더군요. 저도 얼마나 놀랬는지. 유진은 금세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짜장면 먹었어요. 그 후로 한 두달쯤 지났을 거예요. 밤에 갑자기 정훈이가 심하게 울어요.“엄마, 내 머리를 찢어버리고 싶어”라면서요. 그런 표현을 네 살짜리가 쓸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 표현이 너무 과격해서 놀랬지요.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전에 나를 잃어버려서 그 생각이 자꾸 나서 괴로워. 머리를 찢어버리고 싶어. 엄마가 나를 좀 더 잘 봤어야지” 우리 애가 네 살 때부터 맹랑했지요? 지가 한눈 파느라고 잘 안 따라오는 건 생각도 않고 제 탓만 하대요. 좀 억울하긴 했지만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어요. 병원에 가서 치료도 받게 했지요.
유지니오 반응은 꼭 몇 달 뒤에 나타나요. 정말로 괴로울 때는 잊으려고 애쓰고 외면하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표현해요. 어제도 그랬어요. 유지니오는 저 아프고 난 후에 제 병에 대해서 아는 체를 전혀 안 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아직 암이 어떤 병인지 전혀 모르는가 보다고 생각했지요.
“엄마랑 같이 자니까 너무 좋다.”
제가 꼬옥 안아주었어요.
“나도 유지니오랑 같이 자니까 너무 좋다.”
“엄마, 암은 나을 수 있어?”
갑자기 유진이 눈물을 글썽였어요. 마음이 아팠지요.
“그럼 당연하지. 몰랐어? 우는 거야?”
“아니.”
“엄마는 초기 중의 초기라서 100% 나아.”
“정말이야?”
“루카야, 정말 그렇지? 엄마가 전에 얘기했잖아. 완전히 나으려고 지금 주사 맞고 다니고 있지.”
“그래도 걱정돼.”
“걱정하지 마. 다 나아.”
루카가 끼어들었어요. “엄마, 말기 암은 낫기 힘들죠?”
“엄마는 아주 초기라니까.”
“거짓말하는 건지도 모르겠어.”
“아니야, 정말이야.”
애들이 못 믿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되었어요.
“그리고 엄마를 하느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얼마 전에 엄마한테 얘기하시던데. 다시는 엄마를 아프게 하지 않겠다고.”
“정말이야?”
“꿈속에서 들은 얘기 아니야?”
“아니야. 자고 일어났을 때 분명히 들었다고.”
“아니면 엄마 생각이든지, 아니면 옆에서 아빠가 얘기했을 수도 있잖아. 어떤 목소리였어?”
“아니야. 분명히 하느님은 계시고 엄마는 하느님 목소리를 들었다고. 엄마 말을 못 믿는 거야?”
“그래도 불안해. 나는 반반 신자야.”
유지니오가 또 울먹이대요.
(우리 아들 웃기지요? 반반신자가 뭐래요?)
“아니 벌써 하느님을 믿는 마음이 반이나 된다고? 대단한데.”
루카가 듣고 있다가 말했지요. “그래. 너는 연옥에서 2800년간 보속해야할 걸”
저는 그 말에 놀랐어요. “누가 연옥 얘기하던?”
“사부님, 사부님이라는 책에서”
“야 임마, 누가 연옥간대? 니들은 다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들인데. 세례받았잖아. 다 천국에 갈 수 있어. 근데 루카 너는 몇 퍼센트 신자냐?”
“유진이는 0.2%고 나는 30% 정도 믿어.”
“유진이가 왜 0.2%야? 반이라고 그러잖아. 정훈이가 더 많이 믿는 거네.”
“나는 지옥갈까 무서워.”
“지옥에 누가 간다고 그래?”
“엄마 속을 많이 썩여서, 엄마 말도 안 듣고”
유지니오가 울먹이면서 말했어요.
“너 엄마 속 썩인 적 없어. 엄마를 제일 행복하게 하고 기쁘게 했지. 엄마가 언제 너 말 안 듣는다고 한 적 있어? 엄마는 언제나 행복한데. 지옥 안 가니까 걱정하지 마.”
“엄마 산타클로스는 누구 아들이야?”
“누구 아들? 몰라. 사람 아들이었겠지. 성자 클로스라는 말이야. 성인이야.”
“그럼 산타클로스 얘기는?”
“그거? 산타 얘기는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지.”
“그럼 지금까지 선물은 엄마가 준 거야?”
아차! 했는데 너무 늦었어요. 근래 들어서 한 실수 중에 최고였지요.
유지니오가 갑자기 제 팔에 얼굴을 묻더니 엉엉 우는 거예요.
“아니, 엄마 말은 산타 이야기를 지어냈다는 말이지. 산타는 있어.”
“거짓말.”
유지니오는 제가 하느님께서 낫게 해주신다고 약속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말을 믿을까 말까 생각하다가 산타가 있다면 믿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산타가 없다면 하느님도 안 계실 거라는 거지요. 제가 낫기 않을까봐 걱정이 되어서 어떻게든 하느님을 믿어보고 싶어서 던진 질문이었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실수를 했어요.
루카가 말했어요.
“엄마, 유진이가 메이플 스토리 때문에 그래요. 메이플 스토리 게임에서 고달프 법사 레벨을 20에서 30으로 올려달라고 기도했는데. 유진이 안 됐다.”
루카도 산타를 믿었는데 속으로는 의심을 했던 모양인지 별로 놀라지 않더라구요. 그동안 제가 해년마다 “안녕, 나는 산타 마을에 사는 화이트 산타란다”라고 시작되는 긴 편지를 선물과 함께 주었거든요. 그 동안 정말 산타가 준 거라고 딱 잡아떼었었는데. 어쩌다 이런 실수를 했는지.
루카가 동생을 위로하느라고 말했어요.
“유진아. 산타는 없을지 몰라도 네가 산타를 생각하고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면 산타는 계속 살아 있는 거야.”
“와, 루카 대단한 생각을 했네. 멋진 말이네.”
“요즘 산타가 무슨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다니겠냐? 그런 얘기를 지어냈다는 말이지. 그런 썰매 타고 그 많은 어린이들한테 선물 줄 수 있겠어? 엄마 말은 그런 이야기를 지어냈다는 말이지.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
“사람들을 산타처럼 훈련시켜서 내보낸다고 하던데.”
“그럴 수도 있고.”
유지니오 제 말을 못 믿겠는지 또 울었어요.
“나 크리스마스 때 절대로 잠 안잘 거야. 산타가 정말로 오나 안 오나 볼 거야. 엄마 모르게 소원은 편지로 안 쓰고 기도로만 할 거야. 엄마 절대 모르게 할 거야.”
저 모르게 해야 받은 선물이 산타가 준 건지 제가 준 건지 알겠다는 말이지요.
“그래라. 그럼”
“엄마, 자꾸 걱정 돼. 계속 생각나. 솔직하게 자백해봐.”
“자백?”
“그럼 지금까지 선물은 다 산타가 준 거야? 솔직하게 얘기해봐.”
“니가 원했던 것은 다 산타가 준 거고, 니가 원하지 않은 것들도 받았지? 그건 엄마가 준 거야.”
“아, 그때 해리포터 시디?”
“응,”
루카가 끼어들었어요.
“거짓말, 한 번은 포장지에 비비마트라고 적혀있었는데요.”
남편이 말했어요.
“그럼 산타도 선물을 사야 줄 것 아니냐? 어떻게 그 많은 선물을 뚝딱 만들겠어?”
그러더니 남편이 이번 크리스마스에 유진이가 받고 싶다는 선물을 해결할 길을 루카에게 살짝 묻대요.
“야 , 그 고달프 법사 레벨을 어떻게 올리냐? 돈 주고 살 수는 없냐?”
루카가 돈 주고는 못 하고, 어찌어찌해야 한다고 했어요.
참 답답하더라구요. 산타가 있다고 딱 잡아떼다가 크리스마스 때에 게임레벨 올려주는 선물을 할 수가 없잖아요. 더구나 편지도 안 쓴다는데 무슨 다른 선물로 대체해도 들통날 테고. 그래서 이참에 사실대로 말해버릴까 잠시 고민했어요.
“그래도 자꾸 생각나, 솔직하게 꼭 말해줘.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안 주는 거지?”
“응 맞아. 엄마가 주는 거야.”
“실망이다.”
유지니오가 자꾸 울었어요. 저는 웃겨서 깔깔 웃었구요.
“그럼 전에 내가 로보랩터 원했을 때 어린이들이 쓰다가 금방 고장날 수 있는 물건은 안 주신다는 말은 엄마가 지어서 한 거네.”
“맞아. 엄마 생각이었어.”
“엄마도 6학년 때까지 산타가 있다고 믿고 친구랑 싸운 적도 있는데 할머니가 없다고 하셔서 실망했었지. 진짜 속상하더라. 일 년간 내가 착하게 지내서 주신 줄 알았거든.”
“나 무신론자 돼 버렸어.”
(유지니오가 무신론자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을까요? )
“내 소원은 산타만이 들어줄 수 있는데.”
“아니야. 산타 할아버지는 없어도 하느님은 꼭 있어.”
“하느님이 ‘우리 귀여운 유지니오가 산타할아버지 때문에 속상했구나. 내가 더 귀여워해 줘야지’라고 생각하실 걸”
“산타고 뭐고 다 못 믿어.”
“야, 산타는 산타고, 하느님은 하느님이지. 정말이야. 하느님은 있다니까.”
“그럼 산타는 없으니까 앞으로는 하느님한테 기도해야지.”
“아이구, 우리 유지니오 속상해서 어쩌냐?”
루카가 동생을 달랜답시고 말했어요.
“유진아, 요즘은 산타가 물이 안 좋아서 괌에 놀러가고, 노래방 가서 노래하고, 도박장에서 화투 치다가 감옥에 갇혀 있어. 산타 믿을 게 못 돼.”
00 님!
제 취미이자 특기가 뭔지 아세요?
순간순간을 기록하는 거요. 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들 농담까지 다 받아 적는다고 유명했어요. 제 노트를 보면 강의 들을 필요가 없대요. 대학교 때는 친구들이 제 노트 복사해다 보았어요. 그리고 애들 태어난 뒤로는 특별한 일 없어도 사진 찍고, 비디오 찍어 두고. 저 글 쓰는 것도 제 그런 성격 때문인 것 같아요. 순간순간을 아까워하고, 기록하려고 하지요. 수술 받는 날도 제 모습 찍어두었잖아요? 거의 병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언제나 사소한 일들까지 중요하게 생각하지요. 그 때문에 제 생활을 더 사랑할 수 있었지만요. 좀 지나치다 싶기도 해요. 저도 고생스럽고.
00 님이 고생하시지요. 끝도 없는 제 얘기 들어주시느라. 죄송해라.
신나고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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