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투병일기-2006년

암 진단을 받다. 2006.1.17-2006.1.26

김레지나 2008. 8. 28. 15:40

암 진단을 받다.

 

 

2006년 1월 17일 화요일

   흡인세포침 검사결과가 나오는 날이다. 율리아가 오전에 전화해주기로 했는데 결과가 늦어진다고 했다. 결과가 나오면 바로 짐을 싸서 올라가야한다. 병원이 너무 멀어 수술까지 율리아 집에서 머물러야할 것 같았다.

오후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학교에 갔다. 교감선생님과 행정실장님께 몇 달 간 인사 못 드릴 수도 있다고, 휴직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내 표정이 너무 환해서 믿을 수가 없었던지, 교감선생님은 건강해 보이는데 무슨 소리냐며 걱정 말라고 위로해주셨다. 

 

   율리아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 다섯 군데 검사 한 것 중에 두 군데가 암이래. 내일 올라와. 되도록 빨리 수술해야지.”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께 전화했다. 육아휴직 6년 끝에 복직한 후부터 지금까지 5년 동안 애들을 자상하게 돌봐주신 분이시다.

“다른 집 일하러 가지 마시고 계속 저희 집에 다니세요. 제가 암이라네요. 내일 올라가면 수술하고 내려올 것 같아요. 계속 애들 좀 돌봐주세요. 이번에는 애들을 대전 동생 집에 맡길 거예요. 다시 내려오니까 그때부터 와주세요.”

 

  대학원 동료선생님에게도 전화했다.

“저 암 진단 받았어요. 이다음 수업부터는 못 갈 거예요. 교수님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동료 선생님은 뭐라 위로의 말을 못 찾고 얼버무리다가 전화를 끊었다.

 

   남편 몰래 정장을 찾아서 쇼핑백에 담고 사진관으로 갔다. 나는 늘 가족들의 사진을 찍어서 복사해 나누어 주곤 했지만 정작 나를 찍어주는 가족은 없었다. 곧 죽을 것은 아니더라도 치료를 받으면서 몸이 많이 상할 것이다. 루카와 유지니오에게 조금이라도 나은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주고 싶었다.

   사진관에서 한껏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바쁘다고 했더니 바로 뽑아서 주었다. 환한 내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사진을 파일로 보내달라고 했는데, 사진관 아저씨가 안 된다고 했다.

   “저 오늘 암 진단 받고 내일 수술하러 가거든요. 파일로 보내주세요. 저 인터넷 카페에다 실을 건데. 제대로 된 사진이 없어서요.”

   웃으면서 동정심에 호소를 해 봤지만 거절당했다.

   ‘뭐 혹시 잘 못 되면 그 사진관에서 영정사진 뽑으라고 얘기해주면 되겠지.’

   남편에게는 뭐 좀 사러 나갔었다고 둘러댔다.

 

   같은 학년을 맡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했다.

   “나 암이라서 내일 병원 올라가서 수술까지 하고 내려올 것 같아. 다음 주 교직원 연수에 못 가겠어. 오늘 교감선생님 찾아가서 대충 말씀은 드렸거든. 2학년 선생님들끼리 만나자고 일부러 같은 날 연수신청 했는데 아깝다”

   “자기 목소리가 왜 그리 태평해? 나는 가슴이 철렁하구만. 어쩜 그렇게 편안할 수가 있어?”

   “헤헤. 안 그럼 어쩌겠냐? 할 수 없지. 다른 선생님들한테도 안부 전해줘. 다 전화를 못하겠어.”

 

   저녁에 미리 적어둔 물건 목록을 보고 짐을 싸고 있는데 두 친구가 예고도 없이 집으로 찾아왔다.

   “뭐하러 이 시간에 오냐? 바쁘구만. 나 어쩌고 있나 구경하려고?”

   “니 그렇게 꼼꼼하게 짐 목록이나 적어 놓고, 그런 성격 때문에 암 걸린 거야.”

   마음 여린 S가 말했다.

   “미안해. 내가 괜히 라이벌 의식 느껴서, 같은 학교 있으면서도 잘해 주지 못한 것 같애. 니는 어쩌면 그렇게 웃고 있을 수 있어? 안 좋은 일이 있어도 맨날 웃고 지내니까 더 스트레스 받아서 병 걸린 거 아니냐?”

   S의 뜬금없는 사과에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괜찮으니까 웃는 거지, 화가 안 나니까 화를 안 내는 거고, 나 화나면 못 참는 거 알잖아. 어쩌겠냐? 웃지 않으면.”

   “우리 남편이 니 전화 옆에서 듣고 있다가 어쩌면 목소리가 그렇게 힘찰 수가 있냐고 깜짝 놀라더라. 니 목소리가 밝아서 와도 괜찮겠다 싶었어. 힘내.”

 

   친구들이 돌아가고 늦은 시간까지 짐을 쌌다.

   ‘바빠 죽겠구만 쳐들어와서 시간을 뺏네.’하고 투덜거리면서.

  

 

1월 18일 수요일

   아이들을 대전 동생 집에 데려다 주고 병원으로 갔다. 산부인과 검진을 받았다. 자궁에 폴립이 있는데, 문제될 것은 아니라고 했다.

   외과진료 날짜 당기는데 아주 애를 먹었다. 간호사가 예약환자가 많아서 안 된다고 하는 바람에 갑자기 서러워졌다. 내가 웃으면서 사정했는데 거절하고 보낸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간호사 한 명이 밖으로 나왔다. 울먹이고 있는 나를 보고 “그럼, 내일 진료 다 끝난 다음에 기다려서 진료 보세요.”라고 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조직검사 담당 선생님이 일주일에 두 번만 진료하기 때문에 내일 받지 못하면 또 다음 주까지 기다려야했을 것이다.

     

 

1월 19일 목요일

   유방외과 의사선생님의 진료를 받았다. 오른쪽 유방에서 다섯 개의 혹을 검사했는데, 두 군데서 암세포가 나왔고, 하나는 1센티쯤, 하나는 3센티쯤이라고 했다. 두 군데라서 부분절제를 할 것인지 전절제를 할 것인지 결정하기가 애매하니, 조직검사를 먼저 해보자고 했다.

   한참 차례를 기다려서 열 군데가 넘는 부분의 조직을 뽑아냈다. 피가 많이 났고 지혈이 잘 되지 않았다. 가슴 전체에 붕대를 칭칭 감았다.

 

 

1월 20일 금요일

   조직검사한 부위가 많이 아팠다. 남편이 기분 전환하러 영화를 보자고 했다. 천천히 걸어서 택시를 타고 영화관으로 갔다. 애들 없이 남편과 단둘이서 외출한 적이 없었는데. 영화는 짜임새 있고 재미있었다.

 

 

1월 21일 토요일

   미카엘 집에 있는 애들을 보러 율리아 내외와 대전에 갔다. 엄마, 아빠도 광주에서 올라오셨다. 친정 식구들이 모두 모였다. 저마다 내가 암에 걸린 이유에 대해 한마디씩 했다. 운동을 안 해서, 공기가 안 좋아서, 마음을 편히 못 써서, 성당에 안 나가서..... 아는 암환자들 예를 들면서 세상일에 욕심 부리는 사람들이 암에 걸리더라는 소리까지 했다.

   어떤 조언도 내가 잘못 살아서 암에 걸렸다는 핀잔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만 안 해? 암 걸릴 사람이 따로 정해졌어? 몸이 약한데 너무 힘들게 지내서 그런 거지. 고등학교 때(장로교계 학교) 어떤 부부가 간증한다고 와서 자기들이 폭파된 KAL기를 탈 뻔했는데, 다음 비행기로 변경해서 죽음을 면했대. 주님이 자기들을 쓰시려고 도와주신 거래. 웃기는 말 아니야? 그럼 그 비행기 탄 사람을 하느님이 쓸 데가 없어서 죽게 하셨다는 말이야? 내가 잘못 살기는 누가 잘못 살아?”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푹 숙이고 여섯 살 조카랑 장난감 놀이를 했다.

 

1월 25일 수요일

   율리아 선배의 남편이 운영하는 유명한 유방외과에서 진찰을 받기로 했다. 율리아가 조직검사 결과를 복사해왔다. 이상이 있는 부분이 3cm가 넘는다고 했다.

   “언니야. 언니 복직 못하겠다. 이제는 살아남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되겠어.”

   나는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그저 좀 답답했다. 아직은 제법 잘 버티고 있다.

   율리아네 병원에서는 왼쪽에 이상이 없다고 했었는데 그 외과에서는 왼쪽도 이상이 있다고 했다. 왼쪽에도 작은 혹들이 많다면서 세포침 검사를 했다. 다행히 초음파 결과 림프절 전이는 안 된 것 같다고 했다. 오른쪽 유방의 상태로 봐서는 전절제를 해야하고 항암치료를 여섯 번쯤 하게 될 거라고 하셨다. 바로 수술해야한다면서 S 병원 외과에 2월 1일 진료예약을 해주었다.

     전절제 수술보다는 ‘항암치료 여섯 번’이라는 말에 더욱 심난해졌다. 오랜 기간 동안 아이들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할 거고, 아이들이 더 많이 상처받을 것 같았다. 수술이야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항암치료만은 피하고 싶었다.

 

 

 

1월 26일 목요일

   율리아네 병원에 가서 조직검사 결과를 들었다. 수술은 S병원에서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환자 한 명이 진찰실을 나서는 나를 따라 나와서 물었다.

   “어디 병원에서 수술하기로 하셨어요?”

   “S 병원에서요.”

   “저는 B 병원에서 진단 받았는데, 이 병원이 집에서 가까워서 여기서 수술하려고요. 저는 림프절 전이도 되었다네요. 5년 전에 난소암에 걸려서 직장도 그만 두고, 집에만 있었어요. 초등학교 선생이었거든요. 이제 좀 살만하다 싶으니까 다시 유방암이라네요. 어떡해요. 남편도 있는데 하필 유방암이어서. 자궁을 들어내고 호르몬 약을 먹고 있는데, 그 호르몬 약의 부작용이 유방암이라네요. 몸조리 잘 하세요. 천연비타민도 먹고..... 항암주사 정말 힘들더라구요. 옆에 애들이 있어도 전혀 아무런 생각이 안 들 만큼 힘들어요. 딱 까무러칠 것 같지요. 감기도 한번 걸리면 절대 떨어지지 않아요. 저랑 같이 항암주사 맞던 사람은 두 번 맞고 온 몸에 발진이 돋으면서 죽었어요. 무섭더라구요.”

그가 이런 저런 얘기를 해 주는 것이 정말 고마웠지만, 그가 가엾고 내 병이 걱정돼서 더 심난해졌다. 그는 자기 차례가 되어서 진찰실로 들어갔다.

   ‘그래, 나는 그보다는 낫지. 이제 시작인데. 힘내자. 나도 언젠가 저렇게 재발해서 병원에 다시 온다면 어떤 기분일까?’

  

 

   병원에서 중증환자 등록을 하면 의료비를 10%만 부담하게 된다고 했다. 중증환자 등록을 하고 카드를 받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중증환자구나. 중...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