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나해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복음 : 루카 21,12-19
상처 받아야 하는 이유
정신분석 전문의 김해남 씨의 ‘어른으로 산다는 것’에 이런 사례가 나옵니다.
학생 실습을 할 때 소아과에 네 살 된 사내아이를 안은 젊은 엄마가 들어왔고
그 뒤로 어른들 대여섯 명이 함께 따라 들어왔습니다.
아이가 네 돌이 다 지나도록 기본적인 단어 몇 개 외에는 통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그 원인이 어른들에게 있다고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 아이는 5대 독자였고 그 집엔 증조할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고모 둘이
함께 대가족을 이루고 살고 있었습니다.
워낙 귀하게 얻은 아들이라 어른들은 24시간 그 아이 곁에서
아이가 불편하지 않게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는 거의 울 필요도 없었습니다.
울기 전에 모든 것이 다 충족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욕구가 다 충족되면 아이에겐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표현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아기가 태어나 우는 것은 편안한 곳에서 나와 원하지 않는 환경에 접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울음은 첫 번째 욕구불만의 표출입니다.
그것을 통해 아이의 허파가 작동하게 되고 뇌에 산소가 공급되게 됩니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것은 분명 상처가 되지만
그 상처가 아이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아이는 각기 다른 울음으로 자신의 욕구불만을 표출합니다.
그러면 욕구가 타인에 의해 충족됨을 느끼고 그럼으로써 타인과 내가 둘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표현을 통해 타인과 하나가 됨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언어를 배우고 나서는 자신과의 대화인 생각을 통해
‘나’라는 자아인식이 생겨나고 타인과 나는 하나가 아닌 둘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나와의 대화를 통해 나를 하나로 여기게 되어 자의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타인과 내가 구별이 되려면 필연적으로 욕구불만을 표현하기 위한
더 고급수단인 언어의 사용이 전제됩니다.
언어의 구사와 사고체계의 형성을 통해 아이가 도달하게 되는 곳은
바로 자아의 명확한 인식입니다.
이때를 사춘기라 부를 수 있습니다.
욕구불만 때문에 언어가 발달하게 되고 사고체계도 형성되었는데
더 큰 욕구불만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아가 욕구불만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으로 보자면 자아는 뱀이고 하느님께서 하와가 뱀과 대화하는 것을 허락하신 이유와 같습니다.
뱀은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자아의 욕구를 상징합니다.
이 자아와 접촉하게 하시는 이유는 그래야 ‘자유’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유라기보다는 자아의 욕구에 지배받는 것입니다.
참 자유는 자아로부터의 벗어남에 있습니다.
이를 위해 사람 안에 양심이란 것을 넣어주셨습니다.
그 양심이 하느님의 법입니다.
그리고 그 양심은 자아의 욕구와 반대됩니다.
인간은 자아와 접촉하며 이제 본격적인 선택의 자유가 생긴 것입니다.
만약 그 자유를 주지 않고 하느님께서 인간과 관계 맺기를 원하셨다면
사람을 못 나가게 집에다 가둬놓고 사귀자고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온전한 인격적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인간이 하느님 뜻과 반대되는 자아를
명확히 인식할 수 있도록 욕구불만과 상처를 통해 성장시키시는 것입니다.
자아가 강한 사춘기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이 명확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굳게 믿습니다.
자아가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오는 자기 확신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부터 해 나가야하는 일은 다시 어린이와 같이
자아 없이 하느님과 내가, 이웃과 내가 하나가 되는 단계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을 바라보며 당신의 뱀을 발로 밟고 계신 것처럼
우리도 힘겹게 만난 자아를 통제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이처럼 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앞으로 있을 박해를 예언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할 말을 미리 준비하지 말라는 뜻은 자신을 믿지 말고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는 뜻입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려면 지금까지 자신을 더 믿게 만들었던 상처가 치유되어야합니다.
상처가 더 자아에게 집중하게 만듭니다.
주님께서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상처를 받게 하셨음을 알아야합니다.
자신을 덜 믿기 위해서는 어린이처럼 내 자신의 신뢰를 다시 누군가에게 온전히 두어야하는데
신앙인들에겐 그분이 주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자아가 죽으면 그 자리를 성령께서 차지하시고 성령께서 이끄십니다.
우리 자신을 다시 상처가 없어 말을 할 필요가 없는 어린아이처럼 만들면
그것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완전한 준비가 된 상태가 됩니다.
모든 상처는 흉터를 남깁니다.
그러나 그 흉터는 다 필요가 있어서 생긴 것입니다.
김혜남 씨의 딸아이도 심장수술 자국이 가슴에 길게 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흉터 때문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불만족과 상처를 통해 자신 속으로 빠져든 것입니다.
김혜남 씨는 딸 아이를 꼭 안아주며 이렇게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그 흉터는 바로 네가 큰 병을 이겨냈다는 징표란다.
어린 나이에 그 큰 수술을 견뎌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래서 난 네 흉터가 오히려 자랑스럽단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더 자랑스러워하실 이유는 바로 당신께서 만나게 하신 자아를
우리가 극복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말을 들어도 되지만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상처에 대해 아파하는 것보다 상처가 더 큰 축복의 준비단계였음을 아는 것이
진정한 치유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치유되었다면 앞으로 받을 상처도 하나의 교육과정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상처가 주님께로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임을 압니다.
주님께서 상처와 치유를 통해 당신께로 이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끊임없는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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