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전삼용 신부님

죽음에 이르는 병, 절망

김레지나 2017. 3. 10. 09:36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순 제1주간 금요일


< 먼저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여라. >
복음: 마태오 5,20ㄴ-26
 
 
죽음에 이르는 병, 절망
 
 
어떤 분이 자신 안에 안 좋은 성향이 있어 벗어나려 해도 계속 같은 죄를 반복한다며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죄를 지을 운명으로 태어난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니 지옥에 갈 것이라고 느낀다고 합니다.
이렇게 가끔은 우리 삶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을 때
자신을 지배하는 어둠의 세력이 자신 안에 있다고 느끼고,
자신은 그렇게 가리옷 유다처럼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단정 지어 버리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 안에 뱀이 한 마리씩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 뱀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뱀이 있어야 자유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뱀을 자신과 동일시해버리는 것이 결국 영원한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은 알아야합니다.
뱀은 나를 유혹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나 자신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유혹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나는 뱀과 하느님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존재입니다.
자신이 뱀과 하나라고 느끼며 선택권을 포기한다면 그것 자체가 죽음인 것입니다.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박진식씨가 쓴 책입니다.
 
그분은 2남 1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나 다들 우량아라고 부러워할 만큼
건강한 유년 시절을 보내었답니다.
 
그런데 일곱 살 무렵부터 몸에 이상이 생겼답니다.
아홉 살이 되자 주변의 사물을 붙잡지 않으면 일어나거나 앉거나 눕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답니다.
 
우리는 잠시 그 책의 서문만이라도 읽어보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가져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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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꿀 수만 있어도 행복한 인생입니다.
멀쩡하던 사람의 몸이 점점 돌로 변하면서 죽어가고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요?
믿기 어렵겠지만 제게 바로 그런 기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불가사의한 질병의 열쇠는 인체에 꼭 필요한 칼슘의 쓰임새에 있습니다.
칼슘은 뼈를 만드는 석회(石灰)물질이라서 인체가 필요로 하는 양보다 부족할 경우
골격 형성이 지체되거나 뼈에 공간이 생기는 골다공증이 발생합니다.
 
반면에 필요한 양보다 지나치게 많이 생성될 경우에는 남아서 필요 없게 된 칼슘이
서로 뭉쳐져서 석회석이 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몸을 돌로 만들어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칼슘의 저주’가 제 몸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의학 용어로 ‘부갑상선 기능 항진증에 의한 각피 석회화증’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앞의 문장을 과거형으로 말했습니다.
아미 25년 전에 시작된 증상인데, 지금 이 순간까지도 현재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대의학은 20년 전에 저의 증상을 한마디로 ‘불치병’이라고 진단하면서
스무 살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는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서른둘입니다.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 세월보다 두 해를 더 살았으니 기적이다 싶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남아도는 칼슘이 온몸에 가득 쌓여 결국 신체의 마지막 보루인
심장까지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증상이란 심장을 손아귀에 쥐고서 서서히 조여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칼슘에 포위당한 온몸의 고통으로 인해 혼수상태가 수없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생명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십 년이 넘도록 죽음을 유보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생사를 주관하는 절대자의 가호도 있었겠지만 운명의 장난에 굴하지 않으려는
저의 의지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없었다면
저는 병원에서 말한 대로 오래 전에 생명의 끈을 놓고 말았을 것입니다.
 
제 병은 이미 병원의 손길을 떠난 지 오래입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그 흔한 진통 주사 한 대 제대로 맞지 못하고
원시인처럼 견뎌냈습니다.
그렇다고 제 병이 더 나아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점점 악화되고 있지만 그 육신의 절망을 견뎌냈을 뿐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폐마저 30% 정도 석회화가 끝난 제 몸은
이제 한계에 다다라 내일을 장담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포장한다 해도 제게는 ‘산다는 것’ 자체가 잔혹한 생매장의 연속일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상상할 수조차 없는 절망과 굳세게 싸웠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부족하나마 제 삶의 기록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 자체가 저로서는 일생일대의 역사(役事)였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과의 눈물겨운 투쟁이었습니다.
 
남들은 기적이라고들 합니다.
제가 떠나기 전에 남긴 저의 인생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도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비록 내일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은 없지만
예정된 운명보다 십수 년을 다 버텨오고 있습니다.
적으나마 제 삶의 의미를 참고 싶어서입니다.
 
이제 제게 죽고 사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일이 될지 모레가 될지 모레가 될지 모르겠지만 사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리고 저만의 꿈을 꾸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세상 살아가기가 힘들다고 하여 절망하신 분이 있다면
제 이야기를 읽고 부디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저는 “꿈꿀 수만 있어도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참담한 현실에 처해 있을지라도 살아 있는 한 꿈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
 
겨울 햇살이 졸고 있는 마루에 엎드려
 
박진식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1813-1855)는 그의 저서를 통해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절망이 얼마나 유해한지를 지적하며
제2편에서는 ‘절망은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절망하는 자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단테는 그의 책 「신곡」에서 지옥 입구에
“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자들은 소망을 포기하라!”라는 글귀가 붙어있다고 합니다.
 
절망 자체가 지옥입니다.
왜냐하면 지옥에서만 희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절망한다면 이미 지옥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우리가 지금까지 같은 죄를 지었더라도 또 앞으로도 그럴 수 있어도
절대 싸움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이길 수 있으니 주님께서 싸우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죽음을 원하시지 않고 구원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분이 기대하시니 우리도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