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al8800&logNo=221122548139 원글
"모든 사람은 (하느님 뜻의 ) 나라를 얻으려고 열망해야 한다 . 그러나 영원한 나라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나쁜 격정을 지배함으로써 자기 지배력을 획득할 필요가 있다 . 그 유일한 방편이 고통이다 . 고통을 견디는 것이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 다시 말하자면 , 사람은 인내를 통하여 자기 분수를 지키면서 스스로의 왕이 되어야 영원한 나라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루이사 피카레타의 천상의 책 , 6 권 -101)
“그리스도 수난에 동참하는 것은 곧 하느님 나라 실현를 위한 투신이다 .”
구원에 이르는 고통
SALVIFICI DOLORIS
인간 고통의 그리스도교적 의미에 관하여
가톨릭교회의 주교들과 사제들에게
수도자 가족들과 신자들에게 보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교서
VI. 고통의 복음
26. 고통의 복음의 위대한 제1장이 세세대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박해를 겪는 사람들에 의하여 기록되어오는 한편, 동시에 이 복음의 또 하나의 위대한 장이 역사의 흐름을 통하여 전개되어오고 있습니다. 이 장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받으며 자기들의 고통을 그분의 구원적인 고통과 결합시키는 모든 사람들에 의하여 씌어지는 장입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수난과 부활의 첫 증인들이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함에 관하여 말하고 쓴 것이 성취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에게는 고통의 복음이 성취되어있으며, 동시에 그들 모두가 저마다 어떤 의미로 계속해서 고통의 복음을 쓰고 있습니다. 즉, 고통의 복음을 기록하여 세상에 전파하고 있으며, 자기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향하여 자기네 시대의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세대대로 인식되어 내려오고 있거니와, 고통 속에는 인간을 내적으로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이끌어가는 특별한 힘이, 특별한 은총이 감추어져있습니다. 이 은총 덕분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과 같은 여러 성인들이 깊은 회심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회심의 결과는 비단 개인이 고통의 구원적 의미를 발견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가 완전히 새로운 인간이 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는 이를테면 자기 온 삶과 소명의 새로운 차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발견은 인간 안에서 전혀 비교가 안될 만큼 육신을 능가하는 영의 위대함을 특별히 확고하게 인식하게 되는 데에 있습니다. 이 육신이 중병에 걸리고 전혀 무능해져서 그 인간이 거의 살아서 활동할 수가 없을 지경일 때에도, 그럴수록 더욱더 내적인 성숙성과 영적인 위대함이 뚜렷이 드러나서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감동적인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서의 이 내적인 성숙성과 영적인 위대함은 확실히 특별한 회심의 결과이며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구속자의 은총과 협력한 결과입니다. 바로 그분 자신이 당신 진리의 영을 통하여, 위로하시는 영을 통하여 인간 고통의 한복판에서 활동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그분 자신이 어떤 의미에서 바로 영적 생활의 본질 자체를 변형시키시어 고통받는 그 사람에게 그분 자신에게로 다가갈 자리를 가리켜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 자신이 내면의 스승이며 인도자로서, 고통 중에 있는 형제나 자매에게 바로 구속의 신비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이 경이로운 교류를 열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고통은 그 자체로 보면 하나의 악의 경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고통을 결정적인 선, 즉 영원한 구원이라는 선의 가장 확고한 기초로 삼으셨습니다. 십자가상의 당신 고통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악의, 죄와 죽음의 뿌리에까지 이르셨습니다. 악의 장본인 사탄을 정복하시고 창조주께 대한 사탄의 영속적인 반역을 타도하신 것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형제나 자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지평을 열어 서서히 계시해주십니다. 즉, 창조주께로 회두한 세계, 죄에서 해방된 세계, 사랑의 구원 능력을 바탕으로 건설되는 세계의 지평을 점차로 열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천히 그러나 효과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고통 중에 있는 인간을 어떤 의미에서 바로 당신 고통의 한복판을 통하여 이 세계로, 이 아버지의 나라로 인도해 들어가십니다. 무릇 고통의 변형과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으려면 밖에서부터가 아니라 안으로부터 은총이 작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의 구원적 고통을 통하여 모든 인간 고통 안에 매우 풍부히 현존하시며, 당신 진리의 영, 위로하시는 영의 능력에 의하여 그 고통에 안으로부터 작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인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이신 구속자께서는 구속된 모든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탁월하게 으뜸가는 분이신 당신 성모님의 마음을 통하여 모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의 영혼에 사무쳐 들어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마치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태어나실 때의 저 모성을 연속시키시듯이, 죽음에 임한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동정녀 마리아께 모든 인간들에 대한 영적이고도 보편적인 새로운 종류의 모성을 부여하시어, 모든 개인 각자가 신앙의 순례 도상에서 그녀와 더불어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그분께 긴밀히 결합되어있도록 하셨으며, 어떤 형태의 고통이든지간에 이 십자가의 능력에 의하여 새생명을 얻어 이제는 인간의 약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내적 과정이 언제나 똑같은 양태를 따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흔히 그 시작과 추진에는 큰 어려움이 함께합니다. 바로 출발점 자체조차 서로들 다릅니다. 즉, 사람들은 고통에 대하여 서로 달리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각개인이 고통에 들어서게 될 때에는 거의 언제나 전형적으로 인간적인 반항과 “왜”라는 물음이 따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자기 고통의 의미를 묻고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것입니다. 물론 이 물음을 하느님께, 또 그리스도께 제기하는 일도 자주 있는 일입니다. 더욱이 그는 자기가 질문을 제기하고 있는 상대방인 그분 자신이 고통 중에 계시며 십자가에서부터, 당신 자신의 고통의 핵심에서부터 그에게 대답을 주고자 하시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답이 내적으로 체인되기 시작하는 데에는 흔히 시간이, 심지어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저 직접적으로 대답을 주시지 않으며, 또 고통의 의미에 관한 이 인간적인 질문 제기에 대하여 추상적으로 대답을 주시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그 자신이 점차적으로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어가면서 그리스도의 구원적 대답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 참여를 통하여, 스승과의 내적인 만남에 의하여 얻게 되는 대답은 그 자체가 고통의 의미문제에 대한 단순한 추상적 해답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부르심입니다. 하나의 소명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추상적으로 고통의 이유를 설명하시지 않고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오너라? 너의 고통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이 일에, 나의 고통을 통하여 성취된 구원사업에 참여하라? 나의 십자가를 통하여. 각자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영적으로 결합시켜감에 따라, 점차로 고통의 구원적 의미가 그의 앞에 열리어 나타나게 됩니다. 그는 이 의미를 자기 자신의 인간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통이라는 차원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그리스도의 차원에서부터 고통의 구원적 의미는 인간의 차원으로 내려오게 되며, 어떤 의미에서는 개인 자신의 응답이 됩니다. 바로 그때야말로 인간은 자기 고통 속에서 내적인 평화를, 또 영적인 기쁨까지도 발견하게 됩니다.
27.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88)고 바오로 성인은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런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통은 쓸데없는 것이라는 느낌을 이겨내는 거기서 하나의 기쁨의 샘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런 느낌은 때로 인간의 고통 속에 매우 끈질기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도 합니다. 이 느낌은 비단 인간 자신을 내적으로 소모시킬 뿐만 아니라 그를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것으로 보이게 합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움과 협력을 받도록 저주를 받았다는 느낌이 들고,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자기가 쓸데없는 인간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결합에서 고통의 구원적 의미를 발견하게 되면 이 우울한 느낌이 변형됩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고 있다는 믿음과 더불어 고통 중의 인간 자신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고 있다.”는 확신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즉, 구속사업의 영적 차원에서 “자기가” 그리스도처럼 자기 형제자매들의 구원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확신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남이 대신할 수 없는 봉사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구속자의 십자가에서 끊임없이 태어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는 바로 그리스도의 희생 정신이 사무쳐있는 그런 고통이야말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 불가결한 좋은 일들의 대신할 수 없는 중개자요 조성자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고통이야말로 인간 영혼을 변형시키는 은총을 위하여 길을 닦아줍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고통이야말로 인류의 역사 안에 구속의 능력이 현존하게 합니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고 있는 바,89) 선과 악이라는 영적 능력들 사이의 저 “우주적” 싸움에서, 인간의 고통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적 고통과 결합될 때 선의 능력들을 특별히 밑받침해주는 요소들이 되는 것이요, 이 구원적 능력들이 승리에 길을 열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교회는 고통 중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들을 이를테면 그분의 초자연적 능력의 복합적 주체로 보고 있습니다. 교회의 목자들이 바로 그들에게 호소하고 바로 그들에게서 협력과 지원을 구하는 일이 얼마나 자주 있습니까? 고통의 복음은 끊임없이 기록되고 있으며, 또 그것은 끊임없이 이 오묘한 역설의 말로써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즉, 바로 인간적 약함 가운데서 신적 능력의 샘들이 솟아난다고.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기네 자신의 고통 속에 세상의 구속이라는 무한한 보화의 매우 특별한 한 조각을 간직하고 있으며, 또 이 보화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습니다. 인간이 받고 있는 죄의 위협이 많을수록, 오늘날의 세계가 수반하고 있는 죄의 구조가 무거울수록, 인간 고통이 그 자체 안에 간직하고 있는 웅변은 그만큼 더 큰 법입니다. 또 그래서 교회는 세상의 구원을 위한 인간 고통의 가치에 의존할 필요를 그만큼 더 절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밭에 묻힌 보물 > 신앙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티마의 목격 증인, 성녀 히야친타 2 (0) | 2018.07.01 |
---|---|
파티마의 목격증인, 성녀 히야친타 (0) | 2018.07.01 |
산골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0) | 2018.03.11 |
연옥에 가고 싶으신가요? (0) | 2017.06.24 |
위로와 행복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 (0) | 2017.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