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히야친타 예수스 마르토(포: Santa Jacinta de Jesus Marto Pastorinha de Fátima
/1910.3.11.~1920.2.20./축일: 2월 20일)
히야친타 마르토는 친오빠 프란치스코와는 꽤나 다른 성품과 기질의 소유자였다. 오빠와 여동생은 파티마 성모님의 메시지의 두 가지의 면을, 각각 삶의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사명을 섭리하심에 의해 내려진 것처럼 보였다.
프레레 미쉡은, 그 모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고요히 명상하는 영혼의 소유자였던 프란치스코는, 특별히 하느님과 성모님의 슬퍼하심에 이끌려서, 예수님과 성모님의 슬퍼하심을 동정하며, 기도로써 예수님과 성모님의 성심을 위로해드리는 것을 굳게 희망하고 있었다.
히야친타도 또한 다정하였으며, 사랑으로 넘친 마음의 소유자였지만, 그녀는 많은 영혼들이 지옥불 속으로 떨어지는 환시를 보고 마음아파하며, 할 수 있는 한 그들의 죄를 배상하며, 성모마리아님의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으로부터 그들의 회개의 은총을 얻고 싶다고 생각했다.
성모님께서 1917년 8월 19일(4번째 발현: 원래는 8월 13일 예정이었음)에 알려주신 메시지에서, “기도하여라. 많이 기도하여라. 그리고 죄인들을 위하여 희생을 바치도록 하여라. 많은 영혼들이, 그들을 위하여 희생을 바치거나, 기도해주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란다.”라는 말씀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아, 히야친타는 성모님의 이러한 메시지를 몸으로서 실천하며 살아갔다.
그녀의 희망은 할 수 있는 한,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얻는 것과, 죄인들의 회개였다. 그리고 그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기도와 희생을 바쳐드렸으며, 히야친타는 6번의 성모님의 발현이 끝난 뒤에도, 1920년 2월 선종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성모님의 발현 때 받은 은총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아가며 살아갔다.
1917년 10월 13일 이후, 파티마 본당 사제였던 페레이라 신부가, 그 수기(手記)를 완성시킨 1918년 8월 6일까지 불과 10개월 간의 짧은 시간 동안에도, 성모님께서 적어도 히야친타에게 3번 발현하셨다, 라고 페레이라 신부는 그 수기 안에서 증언하고 있다.
루치아 수녀님의 수기는, 이 히야친타 마르토에게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사건에 대해 아무 것도 언급하고 있지 않고 있다. 루치아는 그 수기(手記) 안에서, 히야친타에게는 독특하며 예언적인 환시가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1917년 7월 13일(3번째 발현)의 비밀 속에서 성모님께서 알려주신 계시의 사건에 관한 환시였다.
어쩌면 1917년 7월 13일부터 히야친타가 스페인 독감에 걸려 병상에 눕기까지인 1918년 10월 사이에 일어났던 몇 개의 사건이었다.
발현목격증인 3명이 낮잠(시에스타)를 잔 뒤에, 히야친타가 고종사촌 루치아를 불러서 다음과 같은 광경이 보이는지 어쨌는지를 질문했지만 루치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교황님이 커다란 집에 있으며,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식탁이 있는 곳에 무릎꿇고 엎드리고 있었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어. 집 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돌을 던지고, 다른 사람들은 교황을 저주하고, 더러운 욕설들을 말하고 있었어.”
히야친타는 이렇게 말했다. “불쌍하신 교황님, 우리들은 교황님을 위하여 많이 기도하지 않으면 안돼!”라고.
다른 날에 어린 목동들이 로카 도 카베소라는 동굴로 향했을 때, 히야친타는 다음과 같은 환시를 경험했다.
“길가에 사람들이 넘치고, 그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으면서 울며 절규하고 있었어. 교황이 있는 성당 안에서 성모마리아님의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 앞에서 기도드리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교황과 함께 기도드리고 있었어.”
이러한 환시들은 7월 13일의 성모님의 예언, 교황의 박해받는 것과 전쟁이 일어나는 것과 관계되어 있다. 히야친타가 목격한 이 환시들은 성모님께서 이 순진무구하며 감수성이 예민한 작은 영혼에게 성모님 당신의 깨끗하신 성심을 밝혀주신 것이다, 라고 루치아는 생각했다.
성모님의 메시지는 사적(私的), 개인적 성격의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한 공적(公的)인 성격의 것이었다. 성모님께서는 히야친타에게 미래의 일을 밝혀주셨으며, 교황이 박해받고, 경멸당할 것이며, 버림받게 될 것을 보여주셨고, 히야친타는 교황을 위해 얼마나 기도를 많이 바쳐드려야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1918년 10월 말 무렵, 히야친타 마르토가 스페인 독감에 걸렸을 때, 그녀는 그것이 고통의 시작인 것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미 ‘십자가를 통해서 빛으로, 죽음을 통해서 삶으로’(라: Per crucem ad Lucem, Per Mortem,ad Vitam) 이르는 길을 천사로부터, 그리고 성모님으로 배우게 되었다.
1916년 아르네이로의 우물가 곁에서 3명의 어린 목동들은 천사로부터,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고통을 유순하게 받아들이며, 잘 참고 견뎌야 한단다.”라는 말씀을 들었다.
또한 1917년 5월 13일(파티마 1번째 발현), 성모님으로부터 “너희들은 하느님을 거스른 죄의 보상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탄원으로서, 기쁘게 너희들 자신을 하느님께 바쳐드리고, 하느님께서 너희들에게 내려주시는 고통을 잘 참아 받으련?”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루치아는 모두를 대표해서, “네,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성모님께서는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너희들은 많은 고통을 받게 될 것이란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은총이 너희들의 위로가 되어줄 것이란다.”
이 사건 이후, 히야친타는 얼마나 많은 기도와 희생을 아르네이로의 우물가 곁에서 바쳤던가!
히야친타는 병상에서 조금 회복되었을 때에, 루치아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녀와 오빠 프란치스코 마르토에게 성모님께서 나타나셔서, “프란치스코도 곧 천국에 가게 될 것이란다.”
라고 말씀하셨고, 히야친타에게, “죄인들을 더 많이 회개시키기를 바라고 있니?”라는 질문을 드렸을 때, 히야친타가 “네.”라고 대답하자, 성모님께서는 “많은 고통 때문에 병원에 가게 될 것이고, 낫게 되는 것이 아니며, 주님의 사랑을 위하여, 또 죄인들을 위하여 더 많은 고통을 위하여 두 곳의 병원에 가게 될 것이란다.”라고 그녀에게 알려주셨다.
히야친타는 더 많이 고통받게 될수록, 그만큼 많은 영혼들을 지옥불에서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처럼, 히야친타는 가족이나 루치아로부터 멀리 떨어진 병원에서 고독 중에 이 짧은 생애를 마치게 되었다.
히야친타는 1918년 10월이 끝난 후, 며칠 동안 호전되었던 날들을 제외하고 침대에서 하루라도 떨어질 수가 없었다. 기관지 폐렴이 있은 뒤에, 늑막염(肋膜炎)이 그녀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고통에 대하여 결코 불평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으며, 하나는 어머니 올린피아에 대한 섬세한 배려였으며, 또 하나는 희생을 바치기 위한 것이었다.
히야친타는 어머니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루치아에게 털어놓았는데, 이 말을 덧붙여주었다.
“나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성모님의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께 저질러진 죄의 보상을 위해서, 교황님을 위해서, 그리고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고통받고 싶어.“
히야친타는 다른 어떤 시선에서 바라봐도 사랑 받아야만하는, 감수성이 풍부한, 애정깊은 마음의 소유자였다.
포르투갈의 수호천사와 성모님의 발현 이후, 고종사촌 루치아나 친오빠 프란치스코와는 특별한 영적 관계로 맺어져서, 그들과 나눈 우정은 스페인 독감에 걸린 이후의, 그녀의 가장 감미로운 위로가 되었다.
히야친타는 이러한 영원한 행복의 가장 마지막의 원천을, 희생으로서 바쳐드리기 위해 단념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1919년 4월 4일, 오빠 프란치스코 마르토가 선종하기 조금 전에, 히야친타는 루치아가 있는 곳에서 오빠 프란치스코에게 이렇게 부탁하였다.
“내가 받은 사랑 전부를 주님과 성모님께 바쳐드리고 싶습니다. 죄인들의 회개와 성모님의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께 대한 보상을 위해 주님과 성모님께서 바라시는 것뿐입니다, 저는 고통받고 있습니다, 라고 두 분께 전해줘.”
프란치스코의 선종은 히야친타의 마음을 갈갈이 찢어 놓았지만, 그 슬픔, 고통을 희생으로서 바쳐드렸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병상에 꼼짝할 수 없어서, 그녀는 사랑하는 오빠의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1919년 7월 주치의의 권고로, 히야친타는 빌라 노바 데 오우렘의 성 아우구스티노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성모님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히야친타는 스스로가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기 위해 입원한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7월 1일~8월 31일까지 2개월 간의 입원 생활은, 히야친타에게는 엄청난 고통이었지만, 특히 그녀의 고통을 크게 했던 것은 고독(孤獨)이었다. 알주스트렐(Aljustrel)의 마을에서 빌라 노바 데 오우렘까지는 불과 15Km였으며, 그곳으로 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어머니 올린피아는 사촌 루치아를 데리고 2번이나 히야친타의 병문안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때에도, 히야친타는 루치아에게 커다란 고통을 죄인들의 회개와 성모님의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께 대한 보상을 위해 바쳐드린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8월 말에, 치료해도 결과가 순조롭지 않았으며, 또 마르토 일가의 형편도 어려워져서, 히야친타는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히야친타는 배 옆구리의 상처에 고름이 생겨서, 상처입구를 덮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열에 시달렸으며, 몸은 해골과 같이 야위어져 가는 모습에, 루치아는 2년 전(1917년) 셋이서 찾아갔던 카베소의 언덕으로 향해서, 아이리스 꽃이나 석남화 꽃을 따다가 히야친타의 병상 곁에 가져다 놓기도 했다.
히야친타는, “나는 이제 두 번 다시 그곳에, 그리고 발리뇨스나 코바 다 이리아 언덕에는 갈 수 없어.”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자 루치아는 “그게 무슨 소리야. 너는 천국에 가서 주 예수님이나 성모님을 만나게 될 거잖아.”라고 말하며 그녀를 위로해주었다.
히야친타에게 남겨진 시간은 별로 없었으며, 그 약간의 마지막 시간 동안 더욱 더 쓰라린 나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히야친타가 루치아에게 남겨준 증언에 의하면, 1919년 12월에 성모님께서 히야친타에게 나타나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해주셨다고 한다.
“히야친타는 리스본의 병원에 한 번 더 입원하게 될 것이고, 루치아와는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고, 부모님이나 형제들과도 만날 수 없단다. 다만 한 사람이 병원에서 죽게 된단다.”라고. 그렇지만 성모님께서는 그때, “내가 히야친타를 천국으로 데려가줄테니, 무서워하지 않아도 좋단다.”라고 또 그렇게 말씀해 주셨다. 이러한 성모님의 예언이 생각지도 못한 모습으로 이루어졌다.
히야친타의 부모는, 빌라 노바의 병원에서 치료가 좋지 않다고 여겨져서, 딸을 다른 병원으로 입원시키다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여기고 있었다. 1920년 1월 중순 무렵, 리스본의 유명한 의사였던 리스보아 박사가 파티마를 방문, 포르미강 신부와 산타렝의 신학교 교수와 만나, 히야친타의 치료에 대한 협력을 요청, 리스보아 박사와 교수의 설득을 얻어 그녀의 양친은, 포르미강 신부와 상담하여, 친딸 히야친타를 수도 리스본의 병원으로 이송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파티마를 영원히 떠나는 것이 결정되어서, 히야친타는 어머니에게 간청해서 마지막 기회로 코바 다 이리아 언덕으로 데려다갈라고 했다. 물론 히야친타는 혼자 걸어갈 수가 없어서, 당나귀 등에 올라타 그곳으로 향하였다. 칼레이라 연못에 도착했을 때, 히야친타는 당나귀 등에서 내려서, 혼자서 로사리오 기도를 바쳤으며, 그녀는 경당에 꽃을 봉헌하기 위하여 길가의 들꽃을 꺾어, 경당에 들어가 무릎 꿇고 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어머니 올린피아에게 성모님께서 발현하셨을 때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드디어 파티마를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히야친타는 고종사촌 루치아를 끌어안고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나를 위해서 많이 기도해 줘! 내가 천국에 가면 너를 위해서 많이 기도할께! 비밀을 절대 털어놓으면 안 돼! 예수님과 성모님의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을 많이 사랑해드려야 해. 그리고 죄인들을 위해 많은 희생을 바쳐줘야돼!”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눈물바다가 되어서 어머니와 큰오빠 안토니오가 함께 따라가 주었다.
리스본까지는 기차를 타고 길을 떠나야 했다. 리스본까지 일행을 입원시키기까지 간격을 두고 여정을 떠날 예정이었지만, 히야친타의 너무나 비참한 상태를 보고,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 히야친타는 상처 입구에 고름이 생겨서, 싫은 악취를 내는 일도 있었다. 몇 곳의 집을 돌았지만 거절, 마지막으로 한 곳의 집에서 받아들여서, 1주일 간 그곳에 머물렀으며, 어머니 올린피아와 큰오빠 안토니오는 파티마로 되돌아갔다.
히야친타는 마지막으로 ‘기적의 성모님’이라고 부르는 고아원에 맡겨졌고 그 시설의 설립자였던 고딩뇨(Godingho)수녀는 가장 어린 발현목격증인의 한 사람을 자신이 있는 곳이 받아들이게 된 것을 대단히 기뻐하였으며, 스스로에게 주어진 명예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히야친타는 그곳에서 미사를 드리고, 영성체를 할 수 있다는 생각지도 못한 은총을 받은 것을 기뻐하였다.
리스보아 박사는 히야친타를 입원시키고, 수술을 시키려고 생각했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어머니 올린피아의 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렇지만, 올린피아도 최종적으로 동의, 1920년 2월 2일에 히야친타는 ‘기적의 성모’ 고아원을 떠나, 도나 에스테파니아(Doña Estefânia) 병원 소아병동에 입원하게 되었다. 히야친타는 스스로에게 마지막 시기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일을 진행해 나갔다. 그녀는 고아원에 있었을 때처럼, 성체 조배를 드리러 가거나, 영성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그녀에게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희생이었다.
마르토 일가에서는 다른 아이들이 병에 걸려, 어머니 올린피아는 딸 히야친타를 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2월 5일, 히야친타는 혼자 남게 되었다. 고딩뇨 수녀나 다른 여성들이 매일, 병문안을 와 주었지만, 어머니를 대신할 수 없었다. 이런 모습으로, 성모님의 예언은 실현되었으며, 히야친타는 이 큰 병원 속에 혼자서 죽지 않으면 안 되었다.
히야친타의 수술을 담당했던 주치의는 카스트로 페레이라 박사였다. ‘고름이 생긴 늑막염. 왼쪽 7~8번 늑골에 염증’이라고 진단. 수술은 2월 10일 이루어졌고, 2개의 늑골 절제 수술을 받았으며, 매일 생겨나는 상처를 견디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고통이 있었다.
히야친타는 성모님의 거룩하신 호칭 기도를 반복해서 바쳐드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한 번씩 병문안을 와 주셨지만, 오랫동안 머물지 못하고, 고통과 고독에 시달리고 있는 딸 히야친타를 남겨두고 곧바로 되돌아갔다.
선종 3일 전, 히야친타는 고딩뇨 수녀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수녀님. 저는 이미 아픔이 없어요. 성모님께서 또 나타나셔서. 이제 곧 내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라구요. 나는 더 이상 고통 받지 않을 거란다, 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리스보아 박사가 수술 경과가 좋다는 것을 아버지 마누엘 페드로 마르토 씨나 알베아제레 남작에게 편지를 써 주었지만, 히야친타는 본인의 죽음의 시간과 날짜를 알고 있었다.
리스보아 박사의 보고서에 의하면, 2월 20일 금요일 저녁 6:00 무렵, 히야친타는 증세가 나빠져 병자성사를 받고 싶다고 요청, 교구사제 페레이라 도스 레이스 박사가 달려왔으며, 저녁 8:00 무렵 그는 히야친타의 고해를 들었다.
히야친타가 마지막 영성체를 받고 싶다고 요청했지만, 레이스 신부는 그녀가 호전된 듯 보여서, 그 요청에 동의하지 않고, 다음 날 아침 성체를 영하게 해 주겠다고 말하였다.
히야친타는 반복해서, 얼마 안 있으면 죽게 될테니 마지막 영성체를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결국 그날 밤 그녀는 선종하였으며, 성체를 모실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성모님의 모든 예언이 이루어졌다.
히야친타는 그 마지막 최후의 시기에 부모님이나 친구들 누구 하나도 곁에 머무는 것 없이 혼자서 이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그렇게도 바라고 있었던 성체 안에 현존해계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싶다는 지극히 높으신 천상의 위로로부터도 멀어져서, 가장 커다란 희생을 바친 것이었다.
[출처] 파티마의 성모님 발현목격증인에 대하여: 성녀 히야친타 예수스 마르토(1910.3.11.~1920.2.20./축일: 2월 20일)|작성자 다큐포엠
'밭에 묻힌 보물 > 신앙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파티마에 오신 성모님 1 (1917년 5월 13일~1917년 10월 13일) (0) | 2018.07.01 |
---|---|
파티마의 목격 증인, 성녀 히야친타 2 (0) | 2018.07.01 |
고통의 복음 /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0) | 2018.03.26 |
산골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0) | 2018.03.11 |
연옥에 가고 싶으신가요? (0) | 2017.0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