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투병일기-2018년

유혹 - 자신을 재판관으로 여기기

김레지나 2018. 1. 29. 16:25

<식별> 5장 유혹 중에서

 

자신을 하느님의 재판관으로 여기기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철저히 의탁할 때는 어떤 특정한 행동이나 사고방식에 주의력이 집중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순종, 전통성, 신앙, 순결, 구체적인 의식 또는 특별한 영성신학 학파 등을 통해 주님을 따르는 그들의 의지를 표현하려 들 수 있다. 어쩌면 더 나아가 이러한 행동이나 사고방식을 특별한 은총으로 체험할 수 있다.

  악마는 그들이 특별히 집중하는 이런 부분을 이용하여 그들의 주의를 그들과 현저하게 다른 사람들의 태도, 사고, 행동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그들의 행동을 하느님께 대한 의탁과 밀접하게 연결시키는 순간부터 그들은 그들처럼 행동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영성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방식대로 살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 성전(聖戰)을 벌인다.

  그때 악마는 그들이 스스로를 판단 기준으로 삼게 하여 누가 신앙생활을 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게 한다. 또 그들은 눈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종교적 배경에 대해 주로 윤리 도덕적 판결을 내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악마가 그들의 감성을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사고에 대한 도덕적 판단에 이용할 때는 그들 마음에 일종의 보상 감정을 유발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올바른 태도나 사고를 갖고 있지 않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나 긴 밤샘기도 또는 보속을 바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많은 기도와 영적인 노력을 했음에도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판단 자체는 요지부동이다.

  게다가 악마가 악마의 특성에 걸맞게 그들을 계속 몰아붙이는 바람에 비록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 울며 기도는 할지라도 결국에는 다른 사람들의 ‘재판관’노릇을 하게 된다. 이러한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들은 인생사나 세상사에 관해 이야기할 때 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간단한 의견을 피력할 때도 반드시 재판관의 성향을 드러내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성좌에서’ 선언하듯이 언제나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하며 자신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지는 감지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악마는 그들을 영적인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에서, 겸손과 사랑을 외면함으로써 더 이상 영적인 요소가 없는 태도로 옮겨놓는 데 성공한 셈이다.

  그런데 이 같은 일탈 추이는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언제나 세상에 대한 보상과 연민과 고통의 신비스런 분위이게 싸여 있었음에도 이 ‘세상’이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집단이나 한정된 지역으로 축소되어 버렸거나 아니면 완전히 추상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심판하는 그들이 자비와 사랑과 완전히 동떨어져 철저히 분별력을 잃은 심판을 하며,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에 마음의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엇보다 특히 윤리 도덕적 요소가 점점 강화되어 온 우리의 문화적 환경에서 악마가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다.

  그러나 악마는 방금 기술한 것과 비슷한 또 다른 수법을 사용한다. 이 경우에는 사람이 그리스도께 철저히 의탁하는 여정을 시작하지만, 주님을 따르는 열정을 단지 어떤 지적 체계, 곧 주님을 향한 여정에 밀접히 결합시키는 사고 구조로만 이해한다.

  악마는 앞의 수법에서 어떤 사람의 특별한 태도나 행동을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심판하는 척도, 곧 완전한 진리의 절대적 지표로 제시하는 데 성공했듯이, 여기서도 몇 가지 진리를 명확한 언어적, 개념적 또는 형식적인 공식화를 통해 분리하여 사람들이 신앙의 참된 발걸음을 내닫는 데 절대로 필요한 조건으로 여기게 한다. 악마는 사람들의 주의를 세부적 내용에 집중시켜 전체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이런 단편적 조각들을 전체로서 고찰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방식과 사고방식을 평가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실제로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리면 우리가 미처 깨달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우리 자신과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 사이에 분열이 일어난다. 곧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사랑에서 갈라놓을 뿐 아니라 그것을 독립적인 어떤 것으로 계시하려는 악마의 책략이 성공하는 셈이다. ‘만일 그 가르침을 사랑한다면 그것을 위해 싸울 필요가 있다. 아니 더 나은 것은 그 가르침의 이름으로 싸울 필요가 있다.’

  이것은 분명히 신앙을 사랑에서 갈라놓기 위한 교활한 수법이다. 악마는 우리가 신앙적으로 매우 열심하고 그리스도께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고, 이를 빌미로 우리에게 특별한 가르침이나 이념을 내세워 싸워야 할 의무를 느끼게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싸움이긴 하지만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싸우는 싸움이 아니다. 그 이념이 맹목적 숭배 대상이 되고 그 과정에서 신앙이 특정 사상의 한 부류, 곧 특정 학파의 사상이나 심지어 어떤 방법적 체계와 혼동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인류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와의 참된 유대가 상실되고 말며, 더 이상 구원의 사랑에 대한 생생한 체험이 없고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처럼 생각하며 또 우리가 구원활동에 책임을 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악마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상이 그리스도 자신보다 더 중요하고, 사람들과 그들의 삶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믿게 하는 데 성공한다.

  이런 식으로 유혹자는 그리스도 신자의 삶 자체를 산산이 흩어놓음으로써 덕행을 실천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개념적 차원에서도 무너뜨린다. 우리는 윤리생활의 어떤 영역의 가치들은 옹호하고 다른 영역의 가치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무시해 버릴 수 있다. 더구나 우리가 하고 있는 행위의 위험성을 깨닫지 조차 못하게 된다. 우리가 옹호하는 가치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모두 대신하고 있어서 우리가 하는 일을 정당하다고 여길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행동이 칭찬받을 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성장하거나 변화할 필요성을 느끼기 어렵다. 논리적으로 당연한 일이다.

  이런 식으로 악마는 우리가 체험한 진정한 구원을 위기로 몰아간다. 우리가 체험한 구원은 항구한 겸손에 의해 활기차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끌어내 주셨을 때의 처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곧 그 당시 우리의 행동과 마음상태를 기억해야 한다.

  주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심을 항구히 기억하는 사람들은 자연히 다른 사람들을 자애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이 받은 그 같은 은총을 받았더라면 영적 삶에서 자기들보다 훨씬 앞서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했던 어두움, 곧 생각과 행동, 구체적인 행실의 어두움울 잊지 않고 있으며 또 무상의 선물인 은총이 그들을 찾아주었던 빛, 그들이 오직 응답하기만 할 수 있던 빛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직 차가운 어두움 속에서 은총에 응답하기 위해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과 애정이 깃든 눈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