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마지막 시기가 되면, 마주치게 되는 세 가지 영적 마주치게 되는 세 가지 영적인 문제가 있다. 그중 하나가 “적절하게 잘 죽는 것”인데 즉, ‘좋은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좋은 죽음’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죽음’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좋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먼저 ‘좋은 죽음’이란 어떤 죽음을 말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이 보이는 첫 반응은 ‘고통 없이 죽는 것’을 생각한다. 그렇다면 갑작스러운 사고나 심장질환 또는 뇌사와 같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떠나는 죽음이 좋은 죽음일까? 그러나 이러한 경우 이별할 시간조차 갖지 못하고 남겨진 가족들의 슬픔은 어떻 조차 갖지 못하고 남겨진 가족들의 슬픔은 어떻게 치유되어야 하는가? 그러면 오랜 시간 동안 병마와 싸우면서, 고통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는 것은 좋은 죽음인가? 이것도 아니라면 어떤 죽음이 과연 ‘좋은 죽음’인가? 전문가들은 환자와 가족들이 원하는 최선의 삶을 살아가다 보면,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환자를 돌볼 때,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을 구분해서 돌봄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하고 싶은 일’들은 자신이 과거에 꼭 이루고 싶었던 또 좋은 죽음에 관한 는 경험해 보고 싶었던 일들을 회상하며, 임종 전까지 계획을 세워서 실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삶의 질을 높이고, 매일 최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하고 싶은 일’을 다 못하였다고 해서 크게 후회하거나 삶의 질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해야만 하는 일’을 하지 못하였을 때는 큰 후회를 남긴다. 그 중심에 선 것이 바로 ‘화해와 용서’이다. 생애 마지막 시기에 관계를 바로잡고 ‘화해와 용서’가 이루어진 삶이야말로 생애 가장 큰 축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야만 하는 일’을 모두 마쳤다고 ‘좋은 죽음’이라 할 수 있을까? 더 ‘좋은 죽음’이란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내려놓고,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이러저러한 죽음의 형태를 만들며 떠나가려는 것은 너무 교만한 태도가 아닌가? 사랑이 넘치신 하느님께서 얼마나 좋은 마지막을 준비해 주시겠는가?
그래서 삶의 마지막 시기에 가장 ‘좋은 죽음’이란, 어떠한 형태의 죽음이건 ‘삶의 주도권을 내려놓고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이다. ‘좋은 죽음’이란 죽음의 형태가 아니라 수용하는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수원주보 3 성루카호스피스 병원장 _ 윤동출(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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