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잘 났든 못 났든, 나에게 유익하든 유익하지 않든
존재 자체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존재 자체로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마음의 거리를 두고 관조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사랑은 적극적이고 상호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우리들 존재 자체로 사랑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못나고 악하면 당신은 사랑하는 것을 그만 두지도 줄이지도 못하시고 다만 상처 받으신다.
우리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묵상하고 감사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하느님도 우리에게 존재 자체로 사랑을 받으셔야 하는 분이라는 걸 잊을 때가 많다.
하느님을 우리의 어떤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서 믿고 시간을 들여 믿는 행위를 하면서
우리를 존재 자체로 사랑해주시는 그분 대신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평화나 어떤 좋은 것을 해주시는 고마운 분으로 하느님을 느끼려고 한다.
그러나 명심해야 한다.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 속에 진정한 평화는 찾아들지 않는다.
하느님의 순도 100% 사랑이 우리의 무질서한 욕망의 필터에 대부분 걸려져서 마음 깊숙히 스며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존재 자체로 사랑하는 마음이 튼튼한 주춧돌이 된 후에야
하느님을 핑계로 불평할 자격도 얻는 것이다.
먼저 하느님을 존재 자체로 사랑하려고 애써야 한다.
하느님의 사랑이 마음과 영의 근육을 튼튼하게 할 때까지 하느님께 구하는 자신의 바람을 미루는 것도 좋은 일이다.
자신의 고통을 두고도 하느님과 지나치게 힘을 들여 씨름하지 말자.
하느님을 아는 것이 자신의 고통보다 더한 짐이 될 수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은총이 아니고서는 힘들지만
은총이 주어져도 우리의 재주로서는 수백 번 수천 번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면서 배우는 것이 마땅한 이치이다.
자전거를 몸으로 익히려면 여러 번 타고 넘어지고 일어서야 하듯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도 머리가 아닌 영으로 익히려면 여러 번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내게 일어난 어떤 일을 핑계로든, 세상에 일어난 어떤 일을 핑계로든 하느님을 사랑하려는 열망의 불꽃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은 존재 자체로 사랑 받으셔야 하는 분이시다.
마음 속에서 하느님 사랑이 바탕이 안 된, 자신을 해치는 좌절과 원망이 자리잡으려고 할 때에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거나, 자신에게 바라는 하느님의 뜻을 알려고 씨름하다가는 더 크게 넘어질 수 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대신, 자신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대신, 조용히 하느님을 묵상해보자.
하느님은 존재 자체로 사랑받으셔야 할 분이다.
분명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싹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미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기에, 나를 위해 뭔가를 더 해주어야 할 빚이 있으신 분이 아니다.)
우리 영의 시선을 하느님 존재 자체에 두는 것은 우리 영혼에 가장 유익한 휴식이고 은총의 통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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