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도록 보여주자! ^^* *♥* -
알렐루아! 알렐루야!! 알렐루야!!!
주님의 부활로 한 가족이 되신 형제 자매님과 부활의 기쁨을 함께 합니다.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긴 사순시기를 잘 보내시고
복된 부활절을 기쁘게 맞이하셨죠? ^^*
저희 대구가톨릭대학교는
성목요일~부활절까지 전교직원과 학생들이
부활 방학을 합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근무하는 신부들은
교구 사제피정을 함께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방학을 이용해서 피정을 합니다.
지난 목요일 성유축성 미사를 드리고
갈평에 있는 예수성심시녀회에서 운영하는
피정의 집에서 피정을 하고
지금 막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신자들을 위해서 매일매일 강론을 준비하고
전례를 준비하면서 바쁘게 시간에 쫓기며 지냈던
본당에서의 성삼일 전례에서는 맛 볼 수 없었던
성삼일 전례의 맛을 깊이 느끼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느끼기에는 본당신부로서
본당신자들과 전례를 함께 하면서
맛보는 사제로서의 보람과 기쁨이 훨씬 더 큰 것 같습니다.^^*
형제 자매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약속하신대로
십자가에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당신만의 사건이 아니라,
세상 모든 인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부활은
우리 신앙인의 부활에 대한 희망이며 보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교 신자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자신의 부활을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관은 쓸모없고
인간의 삶은 결국 죽음과 멸망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
부활처럼 기쁘고 복된 소식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가능하게 했고,
신앙을 가진 우리 모두가 한 형제, 자매가 되게 한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는 호칭이 계속 변화됩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즉 당신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이제 당신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셨으니
제자들을 당신이 누리게 된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해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절은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부활의 삶으로 초대받았음을 확인하는 날이기에,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형제 자매님,
오늘 전례의 말씀들을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의 기쁨과 신앙의 원천에 대해서 묵상하도록 합시다.
오늘의 제1독서는 베드로 사도가 이방인인 코르넬리우스와
그 가족들에게 행한 설교의 내용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코르넬리우스와 그 가족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뻗쳐나가 만인을 포용하게 됩니다.
설교에서 베드로 사도는 세 가지 점을 강조합니다.
먼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던 유다인들이
인간이 되신 하느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판단하고 십자가형에 처형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써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참되다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둘째,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증인으로 택하신 사람들 즉 사도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사도 즉 부활의 증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은 한정되어 있고 다른 사람은
그 증인들의 증언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사람들의 신앙과 희망의 기초가 됩니다.
이제 인간이면 누구나 구원에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 모두는 그 초대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형제 자매님,
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전하면서
빈 무덤의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아직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성경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무덤에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런데 본다고 모든 것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먼저 보았지만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제자가 보고 믿었던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대상의 내면을 보기 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할수록 더 많이 더 깊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난다 해도
그를 도외시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한 제자의 그러한 사랑이 그들이 깨닫지 못했던
성경의 말씀을 이해하게 이끌어 준 것입니다.
그들이 깨달은 것은 어떤 성경의 한 두 구절이 아니라
성경이 담고 있는 근원적인 기쁜 소식입니다.
결국 그가 깨달은 것은 창조주이시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들 사이에 현존해 계시면서 우리의 삶을 다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사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에 놓아두시지 않고
당신의 참된 생명, 곧 영원한 생명 안으로 다시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삶의 마지막에도 죽음을 반대하는 생명이 있음을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것을 희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는 그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무덤이 비었다’는 복음의 증언만 듣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어렵습니다.
사도들이 1독서에서 본 베드로 사도처럼
모두가 기쁨에 차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했고
또 그 선포를 뒷받침하듯이 기쁨에 찬 삶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기에,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 역시 기쁜 삶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에 찬 삶의 모습으로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아려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들 역시 성서 말씀을 듣고
우리의 기쁨에 찬 삶의 모습을 볼 때 쉽게 믿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그래서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하는지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기에 세례성사를 통해서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사도의 말씀처럼, 천상의 것들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부활은 단순히 다시 살아나는 소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영광 속에 들어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는 누구나 오늘 하루만이 아니라 매일 부활을 체험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매일 예수님과 함께 죽어서 함께 묻혀야 합니다.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을 갖고
일상생활 가운데서 이웃을 위해 스스로를 낮추고 죽이는
사랑의 행위는 고통이 아니라 참된 기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사랑의 삶을 살 때
우리는 매일 매일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런 기쁨에 넘치는 사랑의 삶을 살 때
우리는 온 세상 사람들을 부활의 기쁨 안으로 초대하는
부활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대구가톨릭대학교 효성 캠퍼스에서 안드레아 신부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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