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투병일기-2016년

원선오 신부님을 위한 기도 부탁드립니다.

김레지나 2016. 9. 27. 19:54

 

 

원선오(Vincenzo Donati) 신부님은 1928년 이탈리아에서 출생하셨고

살레시오회에 입회하여 1950년 일본 선교사로 파견되었고

1954년 도쿄에서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1972~80년 광주 살레시오 중고등학교에서 종교교사,음악교사를 역임하였습니다. 

1982년  케냐 선교사를 자원하여 아프리카로 가셨으며

1994년 고 이태석 신부님이 봉사하셨던 수단의 선교사로 파견되어

청소년들을 위한 학교 100개 짓기 프로젝트로 33개를 지었고,

올 해 18개를 짓고 있는중인데 김연아, 김태희도 큰 기부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88세임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에서 가난한 청소년을 위해서 봉사하고 계신 원신부님은

살아있는 성자로 불리우고 있지요.

 

가톨릭 성가 35번 "나는 포도나무요",

416번 "좋기도 좋을시고",

416번 "선한 사람 아흔 아홉"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천년도 당신 눈에는’

‘엠마우스’

"밀알 하나가"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네 마음을 다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등을 작곡하셨습니다. 

 

원선오 신부님이 82년 한국을 떠나 아프리카 케냐와 수단에서

더욱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선교활동을 하시는데,

지금 케냐 나이로비의 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입니다.

 

힘들게 투병 중이신 신부님을 위한 기도 부탁드립니다.

 

http://blog.daum.net/ohjulia/15953012

 

http://blog.daum.net/chanwoo2005/13757531

 

 

엠마우스 (공동체 성가 310번)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 누리는 어둠에 잠겼사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1.

주님의 길만을 재촉하시면 어느 세월에 또 뵈오리이까
누추한 집이나 따스하오니 이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2.
주님을 이 집에 모셔들이면 기쁨에 겨워 가슴 뛰오니
길에서의 얘기 마저하시며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이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3.
우리와 한 상에 자리하시어 주님의 빵을 떼시옵소서
가난한 인생들 소원이오니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이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http://cafe.daum.net/namdong-catholic/dzaJ/44?q=%BF%F8%BC%B1%BF%C0%20%BF%A5%B8%B6%BF%EC%BD%BA

http://cafe.daum.net/soldae2002/3td5/37?q=%BF%F8%BC%B1%BF%C0%20%BF%A5%B8%B6%BF%EC%BD%BA

 

내가 만난 그리스도인 - 원선오 신부님 2006년 12월호 (제 335호)

“원선오 신부님, 돌아오세요!”

김보록 (살레시오회 신부)


“매일 살레시오 학교 앞을 버스를 타고 지나갈 때마다, 한 외국인 신부님께서 교문에 서서는 학생들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 이번에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그 신부님을 대부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원선오 빈첸시오 신부님께서 작곡하신 성가가 『가톨릭 성가』에 몇 곡 실려 있으나, 본래는 더 많은 성가가 옛 『공동체 성가』에 실려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원 신부님은 청소년들을 위해 그보다 훨씬 많은 성가를 작곡하셨고, 그 성가들을 학생들과 함께 부르시며 ‘종교 수업’을 진행하곤 하셨습니다.

 
그분은 이탈리아에서 태어나셨으며, 1939년에 살레시오회에 입회하셨고, 종신 서원을 하신 다음에는 일본에 선교사로 파견되셨습니다. 그리고 1954년에 사제가 되셨습니다. 일본 미야자키의 살레시오 중고등학교와 소신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시고, 종교와 음악을 가르치셨는데, 그때 저도 원 신부님에게 음악과 종교를 배웠습니다. 고등학생이었던 제 눈에 원 신부님은 예수님의 사랑과 선교의 마음으로 충만하셨는데, 그때의 신부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1962년에 한국에 건너오셨다가 그후 1980년에 새로운 선교지 아프리카 수단으로 가실 때까지 신부님은 20년가량 줄곧 광주 살레시오 중고등학교에서 음악과 종교를 가르치셨는데, 수업 시간이면 늘 아코디언을 연주하시면서 직접 작곡하신 생활 성가를 학생들과 함께 부르셨습니다. 신부님께서 작곡하신 성가는, 심오한 영성과 사랑 없이는 결코 울리지 못하는 천상의 멜로디 같았으며, 그 성가를 부르면 누구나 저절로 마음에서 진정한 기도가 우러나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원 신부님은 점심시간과 휴식 시간에도 늘 운동장과 복도, 교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늘 학생들과 함께하시고자 온갖 힘을 다하시는 그분의 모습은 진실하고 진지하셨습니다. 그분은 학생들과 함께 있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셨으며, 학생들도 원 신부님에게 스스로 다가가, 신부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것은 교사와 학생의 관계라기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애정이 넘치는 관계였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교문 앞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등교하고 하교하는 학생 하나하나를 맞이하시고 배웅하신 일이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날마다 학생 하나하나의 이름을 직접 부르시며 그들의 손을 잡아 주시고 환영하고 환송하셨습니다. 신부님은 1600명가량의 학생 이름을 거의 다 외우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살레시오 중고등학교 건너편에 전남대학교가 있었는데, 어느 날 한 교수가 찾아와 저에게 말했습니다. “매일 살레시오 학교 앞을 버스를 타고 지나갈 때마다, 한 외국인 신부님께서 교문에 서서는 학생들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성당에 나가게 되었고, 예비신자 교리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그 신부님을 대부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저는 너무 감격했지만, 보통 성직자는 대부를 서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그래도 세례식에는 꼭 원 신부님께서 참여하시도록 부탁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하루는 교무 회의 때 한 선생님이 “요즘 학생들은 선생을 만나도 인사조차 하지 않아요.” 하고 한탄했을 때, 원 신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먼저 학생에게 인사하면 좋지 않습니까?” 원 신부님은 항상 학생에게 먼저 인사하셨습니다. 학생들을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하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지극히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수십 년간 입은 옷과 속옷은 해어질 대로 해어졌고, 언제나 닳고 낡아 빠진 똑같은 구두를 신으셨습니다. 평소에 돈을 가지고 다니시지 않았기 때문에 지갑은 아예 없으셨으며, 외출할 때마다 원장 신부님에게 가서 필요한 왕복 버스 요금만 달라고 겸손하게 청하셨고, 그 이상의 금액은 절대로 받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받은 선물은 전부 예외 없이 다른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그분의 방에는 침대와 옷장과 책상만 있었는데, 옷장 안에는 필요한 몇 벌의 옷뿐이었고, 책상 위에는 『성경』과 『성무일도』와 몇 권의 책과 공책만 놓여 있었습니다. 식사는 아주 소식하고 절제하셨는데도, 놀라울 정도로 많은 일을 하실 수 있었던 것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원 신부님은 비안네 성인처럼 참으로 기도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렇게 바쁜 일을 하시는 중에도 늘 하느님 안에 사셨고, 끊임없이 하느님과의 일치를 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시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셨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그분의 모습 안에서 하느님을 느꼈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감했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 살레시오회 회원들과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증언이고, 오랫동안 그와 함께 살았던 저 자신의 증언입니다.


신부님은 일본어는 물론 한국어도 거의 한국인과 다름없이 유창하게 하셨고, 한문을 자유롭게 읽고 쓰실 줄 아셨습니다. 게다가 젊었을 때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셨으며, 특히 이탈리아의 한 대성당에서는 성가대 단원으로서 솔로로 성가를 부르기도 하셨습니다. 따라서 여러 사람들이 성악가의 길을 걷도록 권유했으나 응하지 않으셨고, 마침내 ‘하느님을 찬양하는 성악가’로서 수도자요, 성직자이며, 선교사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1980년경 당시 교황이셨던 요한 23세께서 ‘아프리카 선교 프로젝트’를 발표하시면서, 전 교회를 대상으로 아프리카에 선교사를 보내 줄 것을 호소하셨습니다. 그 호소에 응답한 사람이 바로 원 신부님이셨습니다. 어느 날 신부님은 “이제 한국은 선교의 틀이 잡혔으니, 나는 아프리카로 가서 제3의 선교를 시작해야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일본,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신 것으로도 모자라 아프리카까지 가서 선교를 하시며 여생을 지내시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신부님을 만류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분께서 떠나시던 해 가을, 학교에서 체육 대회를 하고 가장행렬이 벌어졌을 때, 각 학급마다 앞에 세운 현수막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크게 쓰여 있었습니다.
“Come Back, Fr. Won!(원선오 신부님, 돌아오세요!)”


참으로 원선오 신부님은 학생들을 깊이 사랑하셨고, 학생들의 깊은 사랑을 받으셨던 ‘성인 신부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아프리카 수단에서 활동을 시작하셨다가, 내전 중인 수단 난민을 위해 에티오피아에 마련된 난민촌에서 수단 난민들과 함께 사셨고, 지금은 수단의 살레시오 직업학교에서 역시 종교와 음악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일본에서 학생들을 위해 많은 생활 성가를 작곡하셨고, 그들과 함께 노래 부르셨던 원 신부님은, 한국에서도 학생들을 위해 많은 생활 성가를 작곡하셨고, 한국인 학생들과 함께 노래 부르셨습니다. 이제 수단에서도 그곳 흑인 학생들을 위해 역시 많은 생활 성가를 작곡하시고, 그들과 함께 노래 부르고 계십니다. 그 멜로디는 참으로 아름답고 애달픈 흑인 영가의 멜로디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원선오(Vincenzo Donati) | 살레시오회 신부. 1928년에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으며 1939년에 살레시오회에 입회하였고, 1954년에 일본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일본 미야자키 소신학교에서 신학생 지도 신부로 지냈으며,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된 다음에는 살레시오 중고등학교 교감과 성무감으로 활동하였다. 지금은 수단의 살레시오 직업학교에서 종교와 음악을 가르치고 있다.
김보록 | 살레시오회 신부. 1940년에 일본 히로시마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났으며, 1969년에 서울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광주 살레시오회 원장, 서울대교구 구로3동 본당 주임, 광주 살레시오 고등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지금은 돈보스코 청소년 센터 부원장으로 있으며, 저서로는 『묵주 기도 묵상』, 『영성의 시냇물』, 『영성의 이슬』 등이 있다.

수요묵상 (원선오 신부님 - 양치기 신부님 글)
 
    원선오 신부님
 
    저희 살레시오회의 전설적인 인물이신 원선오 신부님께서 엊그제 인천공항을 통해서 15년 만에 방한하셨습니다. 그분을 꿈에도 못 잊어하는 제자들의 초대로 이루어진 감격적인 입국이었습니다. 살레시오중고등학교 성무감 시절 아이들 사이에서 활기차고 당당하게 사목하시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지고 같은 연배의 다른 선교사 할아버지 신부님들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신부님의 모습에 다들 가슴아파했습니다. 이젠 기력도 많이 쇠하시고 허리도 많이 굽으셔서 사목활동하시기도 힘드실 텐데, 여전히 남수단의 청소년들을 위해 동분서주하시는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노구에다 시력마저 약해진데다 장거리 여행에 제대로 서있기도 힘드신 상태인데도 새벽미사며 묵주기도며 공동체 전례에 어떻게 해서든 함께 하시려는 모습에서 참 수도자의 모습을 잘 뵐 수 있었습니다. 이제 호호백발 왕 할아버지가 다 되신 선교사 원선오 신부님의 생애를 통해서 그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산 지체로 남아있기 위해 노력했는가를 잘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928년 이태리에서 출생하신 신부님은 어린 나이에 살레시오회에 입회하게 됩니다. 폐전의 여파로 고통에 시달리는 일본 선교사로 고국을 떠나오게 됩니다. 유럽 선교사들에게 형벌과도 같이 배우기 어렵다는 일본어를 잘 배우신 신부님은 13년 동안 일본의 돈보스코로 활동하시게 됩니다. 신부님의 선교 본능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 일본에 잘 적응해서 선교사로 사실만 했는데, 보다 사정이 어려운 한국으로 눈길을 돌리십니다. 전쟁 직후 모든 것이 파괴된 한국 땅에 입국하십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19년간 한국 청소년들의 음악교사로, 종교교사로, 또 다른 돈보스코로 활동하십니다. 그렇게 한국 땅에 잘 정착해가던 어느 날 원선오 신부님은 또 다시 어려운 결정을 하게 됩니다. 또다시 보다 더 어려운 아프리카를 향해 작은 가방 하나 달랑 매고 길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이젠 쉬실 만한데 아직까지도 그 노구를 이끌고 남수단의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봉사하고 계십니다. 가톨릭 성가책을 펼쳐보면 작사 작곡 원선오 신부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합니다. 원선오 신부님은 한국 심성에 맞는 수많은 성가를 손수 작사 작곡하여 청소년들에게 직접 가르치셨습니다. 대표적인 곡들이 우리가 틈만 나면 흥얼흥얼거리는 ‘좋기도 좋을시고’ ‘천년도 당신 눈에는’ ‘엠마우스’ 그리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입니다. 포도나무가 풍성한 결실을 원한다면 관건은 단 한가지입니다. 각 가지들이 원줄기에 꼭 붙어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있는 가지로 남아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뿌리를 통해 왕성하게 영양분이 공급될 것이고 풍성한 결실이 보장될 것입니다. 원선오 신부님의 선교사로서의 여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어떻게 해서든 예수 그리스도의 생생한 살아있는 가지로 남아있기 위한 눈물겨운 여행길이었습니다. 그는 늘 안정된 곳에서 불안정한 곳을 향해 떠났습니다. 잘 갖춰진 나라에서 아무 것도 없는 나라로 내려갔습니다. 우리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가지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다른 비결이 없습니다. 원선오 신부님처럼 부단히 밑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보다 가난한 지역으로 보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지역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오늘 내게 진정으로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 지속적으로 헤아리면서 오늘 여기 안주하지 않고 또 다시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