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선오(Vincenzo Donati) 신부님은 1928년 이탈리아에서 출생하셨고
살레시오회에 입회하여 1950년 일본 선교사로 파견되었고
1954년 도쿄에서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1972~80년 광주 살레시오 중고등학교에서 종교교사,음악교사를 역임하였습니다.
1982년 케냐 선교사를 자원하여 아프리카로 가셨으며
1994년 고 이태석 신부님이 봉사하셨던 수단의 선교사로 파견되어
청소년들을 위한 학교 100개 짓기 프로젝트로 33개를 지었고,
올 해 18개를 짓고 있는중인데 김연아, 김태희도 큰 기부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88세임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에서 가난한 청소년을 위해서 봉사하고 계신 원신부님은
살아있는 성자로 불리우고 있지요.
가톨릭 성가 35번 "나는 포도나무요",
416번 "좋기도 좋을시고",
416번 "선한 사람 아흔 아홉"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천년도 당신 눈에는’
‘엠마우스’
"밀알 하나가"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네 마음을 다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등을 작곡하셨습니다.
원선오 신부님이 82년 한국을 떠나 아프리카 케냐와 수단에서
더욱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선교활동을 하시는데,
지금 케냐 나이로비의 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입니다.
힘들게 투병 중이신 신부님을 위한 기도 부탁드립니다.
http://blog.daum.net/ohjulia/15953012
http://blog.daum.net/chanwoo2005/13757531
엠마우스 (공동체 성가 310번)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 누리는 어둠에 잠겼사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1.
주님의 길만을 재촉하시면 어느 세월에 또 뵈오리이까
누추한 집이나 따스하오니 이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2.
주님을 이 집에 모셔들이면 기쁨에 겨워 가슴 뛰오니
길에서의 얘기 마저하시며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이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3.
우리와 한 상에 자리하시어 주님의 빵을 떼시옵소서
가난한 인생들 소원이오니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이밤을 쉬어 가시옵소서
http://cafe.daum.net/namdong-catholic/dzaJ/44?q=%BF%F8%BC%B1%BF%C0%20%BF%A5%B8%B6%BF%EC%BD%BA
http://cafe.daum.net/soldae2002/3td5/37?q=%BF%F8%BC%B1%BF%C0%20%BF%A5%B8%B6%BF%EC%BD%BA
내가 만난 그리스도인 - 원선오 신부님 2006년 12월호 (제 335호)
김보록 (살레시오회 신부)
“매일 살레시오 학교 앞을 버스를 타고 지나갈 때마다, 한 외국인 신부님께서 교문에 서서는 학생들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 이번에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그 신부님을 대부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원선오 빈첸시오 신부님께서 작곡하신 성가가 『가톨릭 성가』에 몇 곡 실려 있으나, 본래는 더 많은 성가가 옛 『공동체 성가』에 실려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원 신부님은 청소년들을 위해 그보다 훨씬 많은 성가를 작곡하셨고, 그 성가들을 학생들과 함께 부르시며 ‘종교 수업’을 진행하곤 하셨습니다.
그분은 이탈리아에서 태어나셨으며, 1939년에 살레시오회에 입회하셨고, 종신 서원을 하신 다음에는 일본에 선교사로 파견되셨습니다. 그리고 1954년에 사제가 되셨습니다. 일본 미야자키의 살레시오 중고등학교와 소신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시고, 종교와 음악을 가르치셨는데, 그때 저도 원 신부님에게 음악과 종교를 배웠습니다. 고등학생이었던 제 눈에 원 신부님은 예수님의 사랑과 선교의 마음으로 충만하셨는데, 그때의 신부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1962년에 한국에 건너오셨다가 그후 1980년에 새로운 선교지 아프리카 수단으로 가실 때까지 신부님은 20년가량 줄곧 광주 살레시오 중고등학교에서 음악과 종교를 가르치셨는데, 수업 시간이면 늘 아코디언을 연주하시면서 직접 작곡하신 생활 성가를 학생들과 함께 부르셨습니다. 신부님께서 작곡하신 성가는, 심오한 영성과 사랑 없이는 결코 울리지 못하는 천상의 멜로디 같았으며, 그 성가를 부르면 누구나 저절로 마음에서 진정한 기도가 우러나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원 신부님은 점심시간과 휴식 시간에도 늘 운동장과 복도, 교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늘 학생들과 함께하시고자 온갖 힘을 다하시는 그분의 모습은 진실하고 진지하셨습니다. 그분은 학생들과 함께 있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셨으며, 학생들도 원 신부님에게 스스로 다가가, 신부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것은 교사와 학생의 관계라기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애정이 넘치는 관계였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교문 앞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등교하고 하교하는 학생 하나하나를 맞이하시고 배웅하신 일이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날마다 학생 하나하나의 이름을 직접 부르시며 그들의 손을 잡아 주시고 환영하고 환송하셨습니다. 신부님은 1600명가량의 학생 이름을 거의 다 외우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살레시오 중고등학교 건너편에 전남대학교가 있었는데, 어느 날 한 교수가 찾아와 저에게 말했습니다. “매일 살레시오 학교 앞을 버스를 타고 지나갈 때마다, 한 외국인 신부님께서 교문에 서서는 학생들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성당에 나가게 되었고, 예비신자 교리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그 신부님을 대부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저는 너무 감격했지만, 보통 성직자는 대부를 서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그래도 세례식에는 꼭 원 신부님께서 참여하시도록 부탁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하루는 교무 회의 때 한 선생님이 “요즘 학생들은 선생을 만나도 인사조차 하지 않아요.” 하고 한탄했을 때, 원 신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먼저 학생에게 인사하면 좋지 않습니까?” 원 신부님은 항상 학생에게 먼저 인사하셨습니다. 학생들을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하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지극히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수십 년간 입은 옷과 속옷은 해어질 대로 해어졌고, 언제나 닳고 낡아 빠진 똑같은 구두를 신으셨습니다. 평소에 돈을 가지고 다니시지 않았기 때문에 지갑은 아예 없으셨으며, 외출할 때마다 원장 신부님에게 가서 필요한 왕복 버스 요금만 달라고 겸손하게 청하셨고, 그 이상의 금액은 절대로 받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받은 선물은 전부 예외 없이 다른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그분의 방에는 침대와 옷장과 책상만 있었는데, 옷장 안에는 필요한 몇 벌의 옷뿐이었고, 책상 위에는 『성경』과 『성무일도』와 몇 권의 책과 공책만 놓여 있었습니다. 식사는 아주 소식하고 절제하셨는데도, 놀라울 정도로 많은 일을 하실 수 있었던 것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원 신부님은 비안네 성인처럼 참으로 기도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렇게 바쁜 일을 하시는 중에도 늘 하느님 안에 사셨고, 끊임없이 하느님과의 일치를 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시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셨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그분의 모습 안에서 하느님을 느꼈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감했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 살레시오회 회원들과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증언이고, 오랫동안 그와 함께 살았던 저 자신의 증언입니다.
신부님은 일본어는 물론 한국어도 거의 한국인과 다름없이 유창하게 하셨고, 한문을 자유롭게 읽고 쓰실 줄 아셨습니다. 게다가 젊었을 때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셨으며, 특히 이탈리아의 한 대성당에서는 성가대 단원으로서 솔로로 성가를 부르기도 하셨습니다. 따라서 여러 사람들이 성악가의 길을 걷도록 권유했으나 응하지 않으셨고, 마침내 ‘하느님을 찬양하는 성악가’로서 수도자요, 성직자이며, 선교사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1980년경 당시 교황이셨던 요한 23세께서 ‘아프리카 선교 프로젝트’를 발표하시면서, 전 교회를 대상으로 아프리카에 선교사를 보내 줄 것을 호소하셨습니다. 그 호소에 응답한 사람이 바로 원 신부님이셨습니다. 어느 날 신부님은 “이제 한국은 선교의 틀이 잡혔으니, 나는 아프리카로 가서 제3의 선교를 시작해야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일본,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신 것으로도 모자라 아프리카까지 가서 선교를 하시며 여생을 지내시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신부님을 만류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분께서 떠나시던 해 가을, 학교에서 체육 대회를 하고 가장행렬이 벌어졌을 때, 각 학급마다 앞에 세운 현수막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크게 쓰여 있었습니다.
“Come Back, Fr. Won!(원선오 신부님, 돌아오세요!)”
참으로 원선오 신부님은 학생들을 깊이 사랑하셨고, 학생들의 깊은 사랑을 받으셨던 ‘성인 신부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아프리카 수단에서 활동을 시작하셨다가, 내전 중인 수단 난민을 위해 에티오피아에 마련된 난민촌에서 수단 난민들과 함께 사셨고, 지금은 수단의 살레시오 직업학교에서 역시 종교와 음악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일본에서 학생들을 위해 많은 생활 성가를 작곡하셨고, 그들과 함께 노래 부르셨던 원 신부님은, 한국에서도 학생들을 위해 많은 생활 성가를 작곡하셨고, 한국인 학생들과 함께 노래 부르셨습니다. 이제 수단에서도 그곳 흑인 학생들을 위해 역시 많은 생활 성가를 작곡하시고, 그들과 함께 노래 부르고 계십니다. 그 멜로디는 참으로 아름답고 애달픈 흑인 영가의 멜로디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원선오(Vincenzo Donati) | 살레시오회 신부. 1928년에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으며 1939년에 살레시오회에 입회하였고, 1954년에 일본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일본 미야자키 소신학교에서 신학생 지도 신부로 지냈으며,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된 다음에는 살레시오 중고등학교 교감과 성무감으로 활동하였다. 지금은 수단의 살레시오 직업학교에서 종교와 음악을 가르치고 있다.
김보록 | 살레시오회 신부. 1940년에 일본 히로시마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났으며, 1969년에 서울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광주 살레시오회 원장, 서울대교구 구로3동 본당 주임, 광주 살레시오 고등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지금은 돈보스코 청소년 센터 부원장으로 있으며, 저서로는 『묵주 기도 묵상』, 『영성의 시냇물』, 『영성의 이슬』 등이 있다.
'신앙 고백 > 투병일기-2016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카오 혈압 낮추는 효과 (0) | 2016.10.14 |
---|---|
고통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기회 (0) | 2016.10.09 |
모든 것이 은총이었어요. (0) | 2016.09.24 |
조철현 비오 몬시뇰님께서 선종하셨습니다. / 매월 통장 잔고 0원 (0) | 2016.09.21 |
습도와 관절염 (0) | 2016.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