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박영봉 신부님

복음을 살면 순교자가 된다!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의 강론입니다.)

김레지나 2016. 9. 21. 14:14

복음을 살면 순교자가 된다!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의 강론입니다.)


- *♥* 복음을 살면 순교자가 된다! ^^* *♥* -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추석 명절은 가족들과 즐겁게 잘 지내셨나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형제 자매님이 먼저 작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모두가 행복한 추석 연휴를 보내셨으리라 믿습니다. ^^* 형제 자매님, 오늘 한국교회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대축일을 지냅니다. 이 땅에서 돌아가신 순교자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런데 순교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자기가 믿는 신이나 종교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을 순교자라고 합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자기 목숨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순교자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기리는 순교성인들 중에는 12살의 어린 소년도 있고 일흔 아홉 살 할머니도 계십니다. 공부를 많이 하고 벼슬을 하던 양반도 있고 한글도 모르는 무식한 상민도 있었습니다. 대단한 부자도 있었고 아주 가난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신분이나 재산 혹은 나이나 성별 차이에 관계없이 그분들은 자신의 전 생애와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가치를 찾은 분들이기에 참으로 행복한 분들입니다. 형제 자매님, 순교자들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뛰어넘어 자신의 온 생애와 목숨을 걸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분들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는 오늘 복음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교리지식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크신 사랑의 손길을 체험했기 때문에 깨달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그렇지만 당시의 삶은 철저히 유교의 태두리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양반과 상민의 신분 차는 너무나 컸고, 남녀의 차별이 심해서 서로 어울릴 수도 없는 사회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그리스도교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정말 살맛나는 세상을 만난 것입니다. 이제 모든 사람이 함께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고 참된 행복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복음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내던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그 시대의 보편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반항아였습니다. 절대 왕권을 주장하던 왕의 입장에서 본다면 용서할 수 없는 역적의 무리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은 상대방을 무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잘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형제 자매님, 저는 우리가 제대로 복음화 되기 위해서는 유교문화를 극복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태리에서 포콜라레 사제학교 생활을 하면서 참 부끄러운 경험을 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포콜라레 사제학교는 전 세계에서 온 신부와 신학생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직 이태리말도 잘 알아듣지 못하던 때였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성당으로 미사를 드리러 올라가는데 누가 뒤에서 머리를 툭 치면서 “안드레아, 잘 잤나?”했습니다. 돌아보니까 슬로바키아에서 온 어린 신학생이었습니다. 화가 엄청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미사를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하는데 그 신학생이 바로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사를 하니까 “안드레아, 뭐 안 좋은 일이 있어?”라고 했습니다. 제가 대뜸 “너의 아버지가 몇 살이냐?”하고 물었어요. 그 신학생의 아버지가 저보다 한 살 많았어요. 그래서 “너는 네 아버지 머리도 툭 치냐?”라고 물었더니 그렇게 한데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버지 하고도 머리를 때리면서 장난도 치고 서로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고 그렇게 지낸답니다.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책임자 신부님이랑 얘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존댓말을 사용했는데 화를 버럭 내시는 겁니다. 80이 넘은 노신부님이 제가 자기에게 반말을 안 한다고 “안드레아,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니?”이러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나이 차이가 아무리 많이 나도 친한 사람 사이에서는 반말을 합니다. 유럽 말에 존댓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친구가 되는 겁니다. 그곳에서 지내면서 유럽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복음정신이 몸에 베여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형제 자매님, 예수님께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하셨는데 서로 잘 사랑하기 위해서는 동등한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와 동등한 입장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우리 순교성인들께서는 그런 복음의 가치를 깨달으신 분들이고 그것을 실천하면서 그 삶이 주는 참된 평화와 행복을 맛보았고 나아가서 그 삶의 결실인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미리 맛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부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말씀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져야할 십자가는,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나를 낮추고 내 욕심을 버리고 내 판단을 죽이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할 때 세상 사람들은 바보라고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보면 하느님의 선물인 참 평화가 어떤 것인지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오늘날 우리는 신앙생활하기에 여러 가지 여건이 나쁘다고들 불평합니다. 경제적인 문제에서부터 직장생활의 어려움, 가정생활의 문제 자녀교육 등등. 그러나 우리 선조 순교자들이 복음을 살던 여건은 우리보다 훨씬 더 어려웠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들은 자신의 재산을 모두 버리고 산중으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움막을 짓고 살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겠다고 배교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배불리 먹을 수도 있고 편안하게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호화롭고 배부른 생활보다, 춥고 배고프더라도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어느 교우촌에 신부님이 오신다는 전갈이 오면 고백성사를 받고 영성체를 할 수 있다는 기쁨에 이틀이 꼬박 걸리는 산길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갔습니다. 형제 자매님, 그런데 오늘의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매일 영성체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너무 좋은 환경에서 살다보니까 신앙이 우리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액세서리로 전락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신앙은 나를 위한 액세서리가 아니라 내 삶 전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은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골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오늘의 순교자가 되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삶은 고통이 아니라 참된 기쁨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대구대교구 산격성당에서 안드레아 신부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