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투병일기-2016년

함께 고통을 겪으시는 주님

김레지나 2016. 6. 6. 21:25

사랑하는 00,

 

  (전략)

  어제 복음은 예수님께서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야기였지. 본당 신부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란 원어 표현은 ‘고통을 함께 한다’는 뜻이라고 하시더라. 내 마음에도, 니 마음에도, 가족들 마음에도, 같이 지내는 환우들 마음에도, 과부의 처지에서 느끼는 아픔과 상처가 있게 마련이지. 우리가 마음을 기울여야 할 ‘과부의 고통’은 우리 자신 안에도 가까운 사람들 안에도 있단다.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이거나 생의 마지막 즈음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특히나 불쑥불쑥 솟아나는 지난 상처들과 외롭게 마주하느라 고단할 거야.

 

  흔히들,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들 하지. 신앙이 깊은 사람들도 신앙의 힘으로 긍정하고 참고 견디라고 조언하기도 하고. 사실 그런 조언들은 진짜 위로가 되지 못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지.’하는 식의 폭력적인 주문일 수 있거든.

 

  아~! 그런데, 정말이지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면서, 고통이 의미가 있다면서, 말로만 위로하시는 분이 아니야.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함께 고통을 겪으시는’ 분이셔. 이번 복음 묵상 중에 새삼 깨닫게 된 십자가의 의미는 ’사랑 때문에 차라리 함께 고통을 겪는 것‘이야. 예수님은 사랑을 펼치시다 펼치시다 기어이 함께 고통을 겪는 것을 선택하신 거야. 그러니까 십자가는 대속이나 용서보다 사랑을 더 먼저, 더 크게 드러내고 있는 거지. 함께 아파하는 사랑 말이야. 예수님께서 그 아픈 사랑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셔. “일어나라.”하고.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1-17

그 무렵 11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14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몇 년 전에 썼던 글 하나 붙일게.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만이

 

"그 전에 죽는 게 나을 수도 있어.”

 

  며칠 전에 여러 해 전부터 알고 지내던 B님을 만났습니다. B님에게 “우리 아들 0000 때까지라도 살아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씀드렸더니, B님이 “아들이 00의 길을 간다면 엄마가 그 전에 죽는 것이 나을 수도 있어.”라고 하셨습니다. 엄마의 유지를 받들어서 00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샐쭉해져서 “0000을 받은 후라면 모를까 00 받기도 전에 제가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요. 자기가 자유로이 선택해야지요.”라고 대꾸했습니다. (중략)

 

  저는 뜬금없는 그분의 말씀 자체보다는 아무렇지도 않게 제 죽음의 유익을 짚어주시는 그분의 무심함이 더 섭섭했습니다. 비슷한 예로, 만약 제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제 빈 자리를 염려하고 저와의 이별을 슬퍼하는 대신 “병원비가 너무 많이 나오고 간병하는 게 힘드니, 이쯤에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우리들에게 유익하겠어요.”하고 말한다면 무지막지하게 슬플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얄팍한 사랑을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느라 힘든 작별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

 

  하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를 진실로 진실로 사랑하십니다. 8년 전쯤의 일입니다. 첫 번째 암 선고를 받은 후 7개월간 하느님을 만난 기쁨에 취해 지내다가 대학원 수업을 들으러 다니게 되었습니다. 항암 주사를 맞는 중이어서 아프고 피곤했지만 만나는 사람들한테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안 가서 동료들이 무심코 던지는 말들에 상처를 받아서 마음의 평화가 깨져버렸습니다.

울적한 마음이라 가족들을 피해 방에 들어가 막 침대에 누웠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제 마음에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라자로가 죽었을 때 왜 내가 마음이 북받쳐서 울었는지 궁금해 했지?” (요한 복음 11장 참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은 라자로가 살아나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믿게 될 것이고, 기쁨의 잔치가 벌어질 것을 미리 알고 계셨으면서 왜 무덤 앞에서 우셨을까?’하는 생각을 스치듯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정작 잊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기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곧 마르타, 마리아가 기뻐하고, 영원히 나에게 영광이 될 기적이 일어날 줄 알고 있었지만, 라자로와 마르타와 마리아가 잠시라도 겪었을 슬픔에 가슴이 아팠기 때문이다.”

  저는 가슴이 뜨거워져서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능하시면서도 우리와 같이 순간을 사시며 함께 하시는구나.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구나.’

 

  예수님께서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외로워하지 마라. 나도 게쎄마니 동산에서 너무 괴로워서 제자들에게 깨어있으라고 했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내가 겪어봐서 네 마음 안다. 외롭다고 하지 마라. 슬퍼하지 마라. 네 지난 7개월이 낯설게 느껴지고 그 식당에 걸린 시 신세라며 슬퍼했지?”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동기들과 어느 식당에 갔는데, 식당 주인이 쓴 수십 개의 시들이 액자에 담겨 벽에 걸려있었습니다. 다들 신발을 벗으면서 두어 줄 읽다가 말았습니다.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시들이 마치 7개월간의 제 삶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쁜 사람들이 저 시들을 언제 읽겠어? 게다가 식당 주인이 쓴 시라서 좋을 거라 기대하지도 않을 테니, 고작 한두 줄 읽는 게지. 지난 7개월 간 나는 부러울 것 하나 없이 행복했지만, 사람들은 바빠서 주님의 은총 따위에는 관심도 없고, ’너처럼 부족한 사람이 하느님은 무슨~‘하고 건성으로 생각하고 부러워하지도 않는구나. 내겐 생애 최고의 순간들이었는데, 누구도 관심이 없구나. 지난 7개월간의 내 삶이 저기 걸린 시 신세이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지난 7개월이 낯설게 느껴지고 다른 사람들이 네 고통에 무심하고, 이번에는 냉대까지 받았다고 슬퍼하지 마라. 내 수난과 고통도 그러하다. 사람들은 내 수난에 무심하다. 하느님의 아들이니 십자가 고통도 쉽게 견뎠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 사느라 바빠서 나에 대해 아예 관심도 없다..... 내가 겪어봐서 네 마음 안다. 그러니 외롭다고 하지 마라. 슬퍼하지 마라.”

  저는 암 때문에 직장생활을 계속 하지 못할 것 같은데, 대학원 졸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마지막 학기를 등록할지 말지 알려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읽어야할 책도 많은데,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징징대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 대해서도 대답하셨습니다.

  “내게 기도할 시간 없다고, 기도할 시간이 나게 해달라고 하지 마라. 나에 대해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겪는 모든 수고를 내게 봉헌하는 것을 나는 더욱 기뻐한다. 그것이 순명이다. 순교자들도 고통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나도 아버지 하느님께 따로 시간을 내어 기도하는 것이 간절히 필요했지만 군중들 틈에서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 내가 겪어봐서 네 마음 안다. 그러니 외롭다고 하지 마라. 슬퍼하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키워드를 주시는 식으로 말씀하시고, 저는 듣는 순간에 그 의미를 통째로 깨닫게 되는 식이었습니다. 자상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밖의 몇 가지 말씀들을 통해서 당시의 사소한 외로움과 슬픔을 낱낱이 위로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깨우쳐준 놀라운 사랑

 

  예수님께서는 왜 저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의 자잘한 감정들까지 그토록 섬세하게 살펴 위로해주셨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겨볼수록 단순한 위로의 말씀을 넘어서 어마어마한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놀라고 감사하게 됩니다.

  - 분에 넘치게도 저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증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살아날 것임을 미리 알고 계셨기에 라자로를 찾아가기까지 일부러 지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인간'이셨고, 동시에 '온전한 하느님'이셨습니다.(50:50이 아니라 100%하느님, 100%인간으로서의 하느님.) 죽은 이를 다시 살리는 권능을 갖고 계시고 동시에 모든 시간 속에서 유한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지금 이순간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사랑으로 수난의 고통과 부활의 기쁨을 동시에 겪고 계시겠지요.

  - 하느님 강생의 의미를 더 잘 깨닫고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시어 우리의 처지에서 우리와 똑같이 고통을 겪으셨기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각 말씀의 끝부분에 후렴구처럼 “내가 겪어봐서 네 마음 안다. 그러니 외롭다고 하지 마라. 슬퍼하지 마라.”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울던 그날의 기억을 되새길 때면 어느새 진짜배기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한숨까지도 살피시고 함께 해주시는 분이심을 알고 경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나서주실 만큼 절박하지는 않았던, 제 사소하고 못남 감정들까지 일일이 위로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찰나에 스치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들을 낱낱이 아시고, 섬세한 사랑으로 위로해주십니다. 저처럼 한없이 부족한 사람에게까지 위로해주시는 주님의 사랑은 놀랍기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한테 그러셨던 것처럼 영원 속에서 모든 이들의 한숨 한 번까지도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 우리 눈으로 보면 의미 없어 보이는 수고와 고통일지라도 영원 속에서 보면 헛된 것이 아님을 배웠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면서 겪는 고통과 수고뿐만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크고 작은 일들 모두를 하느님께서는 셈하여 갚아주실 것입니다. 저는 몸과 마음이 몹시 아플 때면 주님 말씀을 기억하며 견딜 힘을 얻으려 애씁니다.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이라야만

 

  B님의 서운한 말씀이 예수님 말씀의 중요한 의미를 한 가지 더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만이 '어떤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사랑‘으로 우리죽음의 때를 정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직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께만 우리의 모든 것을 의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게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가 잠시라도 겪었을 슬픔’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이를 떠나보내는 이들, 죽음을 맞는 이들, 이미 죽은 이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서 격하게 우십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슬픔에 마음 아파하며 우시는 예수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하는 이를 잃고 애통해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십니다.(‘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요셉 성인께서 돌아가신 후에 천국에서 영광스럽게 계실 것을 아셨지만 ‘인간이신 예수님’께서는 성인과의 이별을 슬퍼하시고 몹시 그리워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이를 떠나보내는 이들의 아픔과 슬픔을 ‘겪어보셨기에’ 잘 알고 계십니다.)

 

  어떤 이를 사랑하지 않거나 덜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의 죽음에 대해 ‘이러저러한 면에서는 다행이네,’하고 구차한 위로거리를 만들어내겠지만,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처럼 슬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라자로의 죽음이야말로 당신 신적인 권능을 드러내어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믿게 하는 엄청난 선익을 불러올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죽음과 이별을 겪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슬픔을 함께 겪으셨습니다. 우리를 당신 사업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당신 영광을 더하여주는 장식품으로서가 아니라, 당신의 자녀로서, 당신의 벗으로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 그토록 인간적으로, 그토록 신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 저를 하늘로 부르신다면 저는 순명하여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완전한 사랑으로 제 마지막을 허락하시고, 그토록 섬세한 사랑으로 제 모든 것을 주관하실 것이기에, 저는 두려움 없이 제 삶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고, 사랑이신 그분 곁으로 갈 날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영원 속에서 네 눈물을 닦아주겠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살리셨듯’ 당신의 전능으로서가 아니라, ‘라자로를 위해 우셨듯’ 당신의 눈물로써, 영원속에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게 묻힌 지 나흘이나 된 라자로가 겪었을 슬픔도 마음아파하시며 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예수님께서는 “네 고통과 슬픔은 이러이러한 면에서 어쩔 수 없었고 오히려 최선이었단다. 이제 다 지났으니 잊어버려라. 내 전능으로 앞으로는 네가 행복만을 느끼게 해주겠다.”하는 식으로 우리를 위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라자로를 위해 우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죽어 부활한 후에도 우리 기억 속의 고통들을 낱낱이 헤아리시며 함께 마음 아파하시며 우실 것입니다. 주님의 눈물로 인해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우리의 형편없는 사랑을 뉘우치게 되며, 주님의 눈물로써 우리는 완전한 치유를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 의탁합니다.”

 

  부족함이 없으신 주님께서 비천한 우리를 위해 비통해하며 우십니다. 주님께서는 참으로 사랑이시고 참으로 우리의 아빠이시기에, 우리는 삶뿐만 아니라 죽음과 그 이후의 영원한 생명까지도 주님께 의탁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무한히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믿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러한 사랑으로 인간에게 무한한 존엄을 부여하셨음을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 인간의 몸을 취하셨음을 믿는 것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 마음 안에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음을 믿는 것은

      모든 인간을 고귀하게 드높이는 무한한 사랑에 대한 우리의 온갖 의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복음의 기쁨> 178장 중에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얼마나 저를 사랑하시는지 일러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크신 사랑 아직 다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주님 만난 세상 참으로 행복합니다. 저를 위해 눈물을 흘리시는 주님! 저의 의미, 저의 사랑, 저의 행복 되어주시니, 저 당신께 의탁합니다.”

 

                                                                                                                 2014년 4월 1일 엉터리 레지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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