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박영봉 신부님

☆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아가페, 필리아, 에로스

김레지나 2016. 4. 30. 16:25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의 강론입니다.)


- *♥*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 *♥* -

찬미 예수님!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뵙지는 못했으도 예수님의 부활을 굳게 믿고 자신의 부활을 확신하면서 부활의 기쁨을 잘 누리고 계신가요? 사방에서 피어나는 벚꽃이랑 온 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복사꽃이 부활의 기쁨을 제대로 누릴 수 있게 도와주고 있습니다. 오늘 액자는 지난 수요일 잠깐 경주에서 밤벚꽃을 보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 형제 자매님, 오늘은 부활 제3주일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맞아 “알렐루야!”를 외치면서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형제 자매님은 그 기쁨을 아직도 계속 누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 기쁨이 사라졌습니까?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부활의 기쁨이 남아있다면 그 기쁨을 더 크게 하고, 사라졌다면 다시 기쁨의 근거를 찾도록 합시다. 오늘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던 제자들도 시간이 지나고 현실적인 문제를 직시하자 먹고 살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몇몇 제자들이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여기서 재미있는 표현을 씁니다. 고기를 잡으러간 제자들이 모두 일곱 명인데, 다섯 명은 이름을 알 수가 있는데 두 명은 알 수가 없습니다. 요한은 우리를 그 자리에 초대하는 것입니다. 일곱이면 완전하니까 더 이상의 숫자는 필요 없습니다. 제자들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누군가가 나타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과연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알아봅니다. 형제 자매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자신들이 하고자 했던 일, 곧 경제적인 수익사업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일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원하신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큰 고기를 153마리나 잡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기가 많이 잡혔다고 하려면 100마리, 혹은 천 마리 아니면 만 마리라고 하지 왜 하필이면 153마리라고 했겠습니까? 153은 강한 상징을 지닌 숫자입니다. 그것은 1부터 17까지를 다 더한 값입니다. 즉 1+2+3+…+16+17=153이죠. 그럼 왜 하필이면 1부터 17까지를 더하겠습니까? 17이라는 숫자는 10+7입니다. 10은 당시에 이방인들이 사용하던 10진법에서 처음 나오는 완전한 숫자이고 7은 이스라엘 종교적으로 완전한 숫자입니다. 그러니까 10은 이방인을 7은 유다인을 그리고 그물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명령으로 유다인과 이방인 모두를 교회에 받아들여도 교회의 일치가 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사람 낚는 어부의 역할은 훌륭하게 수행한 것입니다. 그 일을 하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께서 명하신 일을 하면서는 식사 중에도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느끼면서 기쁨에 넘치는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 역시 벌써 부활의 기쁨이 나에게서 사라졌다면, 과연 나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내 자신이 원하는 것만 행하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내 욕심을 채울 일을 추구하면서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시고 기쁨을 주시길 원한다면 그것은 염치없는 바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뜻대로 살려고 한다면 오늘 복음의 베드로 사도처럼 변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변했습니까? 계속되는 복음은 베드로의 변한 모습을 참 재미있게 전해줍니다. 예수께서는 식사 후에 베드로에게 3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습니다. 두 번까지 “예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던 베드로가 세 번째 질문을 받고는 슬퍼하며 대답했다고 합니다. 왜 슬퍼졌는지 우리말로는 그 이유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말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의 언어인 희랍어에는 사랑을 세 가지로 표현합니다. 자신의 목숨까지도 다 내어놓는 신적인 사랑을 ‘아가페’, 부모와 자식 혹은 형제간 또는 친구 사이의 이익을 따지지 않는 사랑을 ‘필리아’, 젊은이들이 많이 추구하는 정열적인 사랑을 ‘에로스’라고 합니다. 처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는 ‘아가파스 메?’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필로 세’라고 대답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너는 목숨을 내어놓을 만큼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차마 “예!”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저는 당신을 진짜 좋아합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더 쉽게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너 나를 100%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주님 70%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에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라고 장담했었는데 막상 예수님이 체포되자 죽음이 두려워서,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러한 자신의 실수를 깊이 뉘우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도 예수님께서는 ‘아가파스 메?’라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필로 세’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3번째 물으실 때는 ‘필레이스 메?’라고 물으십니다. ‘나를 100%는 사랑하지 못한다면 70%는 진짜 사랑하느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슬퍼진 것입니다. ‘이제 정말 주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데, 100% 사랑할 수 있는데, 지나간 과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할 뿐인데, 그것을 다 아시면서 그렇게 물으십니까? 속을 열어 보일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는데…’라는 심정입니다. 그래서 “100%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예 70%는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참으로 베드로는 겸손해졌습니다. 이제 진짜 주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을 만큼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그것을 실천해 보이기 전에는 그 말씀을 드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실제로 오늘 독서에서 들었듯이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전하다가 최고의회에 잡혀가서 심문을 받았고 모욕을 당했지만 오히려 그것을 예수님의 제자이기에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셨습니다. 우리는 쉽게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을 위한 일을 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처럼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자주 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건강이나 육체의 평안을 위해서, 하느님보다 사람에게 특히 자신의 욕망에 복종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할 수도 없고 생활 가운데 참된 기쁨 곧 부활을 누리는 기쁨을 전혀 맛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만일 우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생활을 한다면 즉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로 산다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분명히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매일의 생활에서 나 자신의 부활을 미리 맛보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뜻대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오늘도 미사를 통해서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주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몸을 모시면서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삶을 살도록 결심합시다. 대구대교구 산격성당에서 안드레아 신부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