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말씀 (가나다순)/양승국 신부님

<고통이 은총으로>고통이 은총으로 변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김레지나 2015. 9. 19. 02:45

    <고통이 은총으로>
 
    교회 역사 안에는 성모님 일생의 여러 국면 가운데 고통스러웠던 시절을 기억한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14세기경 시작된 이러한 신심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매년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날을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로 정해 성모님께서 친히 겪으셨던 고통을 기억하고 묵상합니다. 성모님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 때부터 큰 불편 앞에 직면하셨습니다. 아기를 출산할 방 한 칸조차 찾지 못해 별이 총총히 올려다 보이는 마구간에서 출산하셨습니다. 헤로데가 주도한 ‘아기 대학살 사건’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해야하는 고통도 겪으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지 순례 길에 예수님을 잃고 사흘간이나 애간장을 태운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통은 아주 작은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은 후에 결정적인 고통, 감내하기 힘든 혹독한 고통 앞에 서게 되는데,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서계시는 고통이었습니다. 너무나 처참한 아들의 몰골에 성모님의 가슴은 그야말로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겪으셨던 고통 그 이상의 고통을 성모님은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셨을 것입니다. 극심한 고통, 하늘이 내려앉는듯한 슬픔 가운데서도 성모님은 혼절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성모님은 있는 힘을 다해 아들 예수의 십자가 밑에 꿋꿋이 서 계셨습니다. 침묵 중에 온 몸과 마음을 다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때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보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더 힘들 때가 있습니다. 십자가 밑에 서 계셨던 성모님이 아마도 그러셨을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견뎌내야 했던 성모님의 영적인 고통은 십자가 위해서 겪으셨던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을 훨씬 능가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보면 성모님은 예수님의 육체적 죽음에 영성적 죽음으로 동참하셨습니다. 결국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위해 똑같이 못 박히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성모님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살아있는 감실!’ 성모님의 육체와 영혼은 언제나 당신 아들 예수님과 하나였습니다. 성모님의 한 평생은 당신 아들의 영광이 온 세상을 덮을 때까지 희생으로 견뎌내셨습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사업을 완수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오르시기까지의 전 과정에 온 몸과 마음으로 동참하셨습니다. 그 결과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온전히 거하시는 새 시대의 성전, 살아있는 감실이 되신 것입니다. 이 땅 위에 두발을 딛고 살아가는 한 그 누구에게나 고통이 찾아옵니다. 고통이 다가올 때 마다 성모님께서 겪으셨던 고통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고통의 표면에만 머무르지 말고 성모님처럼 고통의 이면에 새겨져있는 하느님 사랑의 얼굴을 바라볼 일입니다. 고통이 은총으로 변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성모님처럼 먼저 고통을 마음에 간직한 후 인간의 시선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으로 고통을 바라볼 일입니다. 고통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묵상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