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일 전에 제가 머무는 곳 근처 성당 주일 미사에 갔다가 새로 교리반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같이 지내는 환우와 환우 가족 두 분을 모시고 화요일 미사참례를 하고 교리반에 함께 참석했습니다.
J 형제님은 시한부 6개월 선고를 받으시고 펜션에 들어오셨는데, 벌써 5개월이 다 되어갑니다. 항암치료를 하다가 자살 시도를 할 만큼 힘들어서 중단하셨고, 통증이 시작되어서 요즘 많이 힘들어하십니다. 형제님에게 신앙을 권했더니 관심을 보이시길래, 교리반에 모시고 갔었습니다. 암환자들은 멀쩡하게 산에 다니다가도 통증이 시작되면서 급격히 상태가 안 좋아져서 세상을 떠나기 일쑤인지라 마음이 좀 급했습니다. 물론 건강이 좋아지실 수도 있겠지만요.
다른 자매님은 투병 중인 남편과 함께 펜션에 머물고 계시는데, 몇 번 성당에 나가보고 결정하시겠다고 해서 모시고 갔었구요. 몇 번 나가봐서 좋으면 남편에게도 권하시겠다 하셨어요.
저는 엄청 긴장을 했답니다. 특히 J 형제님은 이번이 어쩌면 세례를 받을 마지막 기회인데(어쩌면 대세를 받게 될 수도 있겠지요.), 성당 나와서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저랑 J형제님은 저녁 시간 내서 오래 앉아있는 것이 참 힘듭니다. K자매님도 집에 빨리 들어와야 하구요. 그런데, 첫 교리 모임이 9시 53분에 끝났습니다. ㅠㅠ
처음에 교황님에 대한 파워포인트 영상을 보았어요.. 음..교황님 선출 후 인사 장면, 버스 타시는 모습, 낡은 구두... 잡지 표지모델.. 등등의 사진을 보면서 수녀님의 사진 설명을 들어야 했어요. 물론 저야 교황님을 보고 또 보아도 좋지만, 처음 온 분들이 연예인 홍보물 비슷한 자료를 보면서 천주교에서 교황님을 지나치게 우상화한다 여길까 걱정을 했답니다. 특히 K 자매님은 시어머님이 독실한 개신교 신자여서 제가 긴장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부터 머리가 아프더군요.ㅎㅎ
그 다음에 <종교가 필요한 우리> 파워포인트 자료를 보면서,, 종교가 무엇이고 천주교는 계시종교이고.. 등등의 교리를 배웠어요. 그건 좋았습니다.
그리고 성호경을 배웠어요. 하느님께 함께해주십사 청하는 기도라고 설명해주셨구요.
수녀님 설명이 마음에 들었지요.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수습이 불가능하게 대화가 이어졌어요. 수녀님께서 성호경이 힘이 있는 기도라고 하시면서 당신께서 지금까지 만나셨던 신자들의 체험을 말씀해주셨어요. 요지는... 성당에 나오려고 하면 방해가 있을 수 있으니까 기도하면서 끝까지 다니기로 결단을 내려야한다는 것이었어요.
우리가 나눈 대화는 이래요.
어떤 자매가 귀신한테 시달렸는데, 귀신이 침대를 들어올려 빙빙 돌리면 성호경을 긋고 기도하면 괜찮아졌다. 그래서 무당이 안 되고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 축성된 초를 켜 놓고 있으면 이상한 것이 안 보인다는 신자도 있었다..... 어떤 자매는 성당에서 집에 가는 길이 아주 멀었는데, 뒤에서 뭐가 잡아당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계속 기도하며 갔다.....
그때부터 교리 분위기가 전설의 고향 코미디가 되어버렸답니다. ㅎㅎ 한 자매는 자기 집도 먼데 무섭다고 그만 하시라고 했다가, 나중에 궁금하다고 다시 해달라고 하고, 한 형제님은 자기도 귀신을 본 적이 있다면서, 귀신 보고나면 꼭 죽게 아팠다고 하시더니, 한 자매가 핸드폰 소리 아무 때나 울리며 전화를 받곤 하는데, “아줌마, 핸드폰 소리가 더 무서워요” 했어요. .
저는 물론 악령의 실재도 기도의 힘도 믿습니다. 하지만, 성당에 처음 온 사람들이 나눌 이야기는 아니다 싶었어요. 수녀님도 웃지 않으시고, 대화를 주도하시는 분들도 진지하게 말씀하시는데, 저 혼자 ‘멘붕’이 되어 웃음이 터져서 낄낄 웃었습니다.
지금도 킥킥 웃음이 나옵니다만, 사실 심각한 상황입니다.
K 자매님은 돌아오는 길에 바로 교리 보류 선언을 하셨어요. 앞으로 기도하면서 좀 더 설득해보겠지만 어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형제님도 제게 미안해서 말씀은 잘 못하시고 한 번 참석해보고 어찌 알겠느냐고 하시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지난 화요일이 두 번째 교리 시간이었어요.
그 전에 나름 선교책자들도 주고, 읽을 만한 책도 빌려주고, 글도 몇 개 보내주고
두 분 마음이 떠나지 않도록 기도했습니다.
K자매님은 남편 병원치료가 있어서 참석을 못했구요.
J형제님이랑 둘만 갈 수 없어서, 천주교 신자이신 주인 아주머님께 부탁드려 같이 갔습니다.
이번에는 수녀님께서 여유롭게 웃으시며 강의가 넘 길어지지 않게 파워포인트 자료를 보면서 잘 설명해주셨습니다. 새로 바뀐 예비자 교리서 내용도 좋았구요.
두 분의 예비자들이 새로 합류했는데요.
에그머니나! 끝날 즈음에 또 귀신 이야기가 나오지 뭡니까?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고~'......... 웃음만 나왔습니다.
워낙 시골 본당이라 예비자는 모두 여섯 명이에요.
알고 보니, 한 자매는 열심한 불교 신자였고, 산신각 등에서 기도한 경험도 있더라구요.
또 한 자매님은 첫 시간에는 이야기하지 않더니, 당신도 귀신을 본 적이 있다는 겁니다.
이어서, 예비자 인도하신 자매님도 두 번이나 귀신을 보았다면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모인 예비자들 모두에게 짚어줄 필요가 있어서 그런 생뚱맞은? 이야기들이 이어졌나 싶었습니다.
봉숭아 학당 +전설의 고향 + 개그 콘써트 = 우리 교리 시간 ㅎㅎㅎㅎ
암튼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재미도 있습니다.
주일 반에서 빠진 부분 보충하려고 새로 시작하는 우리 반에 들어온 자매님은
감동적인 당신의 체험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엄청 힘든 일을 겪게 한 사람이 미워서, 늘 찡그리고 다녔는데,
교리 배우면서 신기하게 ‘내게 은총이 내리는구나.’하는 걸 느끼신답니다.
미운 사람 집 앞을 지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주님의 기도를 하게 되고, 마음이 편안해지셨다구요.
평생 다닌 불교에서도, 최근에 다녀 본 두 군데의 개신교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평화를 얻게 되었다며 눈물을 글썽이셨습니다.
그 자매님은 수녀님이 너무 좋아서 성당 교리를 안 빠지게 된다고 했어요.
수녀님께서 그건 하느님이 미끼로 주시는 감정이라고 답하시더군요. ㅎㅎ
암튼, 명심해야 할 것은 조상 귀신 흉내를 내는 마귀는 있지만, 구천을 떠돌며 나타나는 조상귀신은 없다는 겁니다.
마귀들은 어떻게든, 협박이든, 질병이든, 때로는 좋은 것을 이용해서라도 영혼이 하느님을 찾는 것을 막으려드니, 결심하고 애쓰고 기도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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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 신자분들 중에서 점을 보시거나, 귀신도 있고, 하느님도 계시다고 믿는 분들은 꼭 이 글을 읽어보시고 생각을 바로잡으시기 바랍니다.
미래를 알아보려 귀신의 의견을 묻는 것은 잘못된 행위입니다.
미래는 귀신이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여 알려준다면 그건 악령의 짓이지 성령께서 주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정신적인, 영적인 미래는 우리들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마귀들은 죽은 조상의 영혼이나, 다른 사람의 영혼인 양 행세하여, 하느님의 존재를 알아보기 힘들도록 할 수는 있지만, 그건 영혼 행세를 하는 마귀일 뿐이지 실제로 구천을 떠돌아다니는 영혼들이 아닙니다.
영적인 이적을 행하는 분들의 말씀이라고 해도,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특별한 체험에 집착을 한다면, 그 욕구를 채우도록, 교만에 빠지도록 마귀가 돕는 경우가 있습니다.
참으로 영적인 분별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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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란 무엇인가?
전생, 윤회, 귀신, 원혼(?魂), 초령(招靈) 등등. 이는 IT(information technology), BT(bio technology), NT(nano technology)로 대표되는 21세기 첨단 과학의 시대에 별스런 거부감 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단어들이다.이런 주제들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속속 등장하여 짭짤한 흥행을 올리고 있다는 소식도 비근하게 접하고 있다. <사랑과 영혼>, <은행나무 침대>, <여학교 귀신 시리즈> 등등.또 요즈음 서점가에는 채널링(channeling)이라는 것을 소개하는 책들이 즐비하다. 채널링은 TV 채널을 돌리듯이 영적 주파수를 맞추어 원하는 영들과 교신을 하는 것을 말한다. 채널링을 전파하는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특별한 방법을 통하여 원혼, 깨달은 영, 우주인 등의 영들과 교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던 그렇지 않던 간에 저들은 채널링을 통하여 깨달은 영들을 만남으로써 그 영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그러면서 깨달은 영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그 깨달음의 경지를 나누어 받을 수 있다고, 그럼으로써 윤회의 과정을 단축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사상을 급속히 전파시키려 갖은 방법을 다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주장들을 통틀어 우리는 ‘뉴에이지 영성’ 또는 노길명 교수의 제안을 따라 ‘신영성(新靈性)’이라 부른다. 어떻게 부르건 이런 주장들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당혹스럽게 한다.이런 주장을 접할 때 우리는 자연스레 묻게 된다.
과연 귀신은 있는가? 원혼이라는 것이 정말 있는가?
또 깨달은 자들이 머무는 영계(靈界)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들과의 교신이 과연 가능한가?
많은 가톨릭 신앙인들은 이런 물음들 앞에 서게 되면 얼른 답변하지 못하고 쭈뼛쭈뼛 망설이며 얼버무리고 만다. 영적 중심을 잡자
가톨릭교회는 이런 ‘이름’이나 ‘개념’으로 설명되고 있는 현상들을 ‘악령의 장난’이라고 본다. 모두가 사탄(마귀, 악령)의 놀음이다. 사탄이 죽은 사람이 나타난 것처럼 귀신 행세를 하는 것이고, 한(恨) 많은 원혼 행세를 하는 것이고, 깨달은 영인 것처럼 속임수를 쓰는 것이다.그 이유는 명명백백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유일신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곧 잡신들을 믿게 함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이탈시키려는 것이다. 사탄은 사람들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수라도 동원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뉴에이지, 신영성, 채널링이라는 것들은 가톨릭 신자들,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을 공략하기 위해 사탄이 발명한 최신형 무기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오늘날 아바타, 기(단학선원, 단월드), 비술, 영술, 마음수련 등의 이름으로 이러한 유혹들이 도처에서 신자들을 빼내가고 있다. 해가 갈수록 늘고 있는 냉담자 숫자는 이런 현상들과 무관하지 않다. 어찌 되었건 우리는 그 뒤에 숨어있는 태초의 유혹을 식별해낼 수 있어야 한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뉴에이지는 이것이 인간의 약점인 줄 알고 수많은 사이비 영성을 내세워 가톨릭 신자를 노리고 있다. 먹지 말아야 할 ‘나무 열매’, 먹으면 죽고 마는 ‘나무 열매’를 꿀을 발라서 팔고 있는 것이 뉴에이지이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중심을 잡아야 한다. 흐느적거리다가 유혹과 죽음의 늪에로 끌려가고 만다.
통공(通功)신앙이 정통이다
우리에게는 고유의 통공신앙이 있다. 가톨릭의 통공신앙은 산 이와 죽은 이들이 철저하게 하느님의 통치하에 예속되어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느님의 통치에서 벗어난 사람은 이 세상에도 저 세상에도 없다. 벗어난 존재가 있다면 하느님께서 잠시 그러도록 허락한 악의 세력들 곧 마귀들 밖에 없다. 통공신앙은 하느님의 통치 아래 산 이와 죽은 이들 사이에 서로의 공로를 서로를 위해 사양하고 나눌 수 있다는 신앙이다.
그런데 가톨릭교회의 통공신앙은 개신교의 신앙과 차이가 있다. 개신교는 죽은 이를 위해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이미 ‘지옥’ 아니면 ‘천당’의 운명이 결정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톨릭은 죽은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연옥’에 있을 여지가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그래서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를 바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바티칸은 ‘죽은 이들이 죄의 사함을 받도록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은 갸륵하고도 경건한 생각.’(2마카 12,46; 교회 헌장 50항 참조)이라고 확실히 천명한다. 또한 가톨릭 교리서는 ‘조상을 위한 우리의 기도는 그들을 도울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한 그들의 전구를 효과 있게 할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이 위령성월에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조상들의 연령과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불쌍한 연령들을 위해 정성껏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 귀신이니 원혼이니 초령이니 영매니 채널링이니 하는 거짓 가르침에 현혹되어 흔들리지 말고 꿋꿋이 우리의 신앙을 견지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 월간성모기사 11월호 중에서 / 차동엽 로베르토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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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과 관련하여 독자들로부터 많은 문의와 상담요청이 답지하였다. 가족 가운데 단월드, 요가, 마음수련 등에 빠져 영적으로 피폐해진 피해자를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있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필자는 신흥영성운동의 희생자가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여 그들에게 그리고 아직도 신흥영성운동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가톨릭신자들에게 무엇보다도 시급히 필요한 것이 「영적 식별력」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에제키엘이 전하는 말씀이 영락없이 오늘의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애절한 통탄으로만 들리는 것은 필자가 과민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내 양떼는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내 양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다니는 목자 하나 없다』(에제 34, 6)
필자는 상처입고 신음하는 양들의 소리도,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음성도 외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앞으로 몇 차례 더 영적 식별을 위한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그러면 먼저 신자들이 제일 혼돈스러워하는 「기체험」이라는 것에 대하여 알아보자.
소위 기체험이라는 것
실제에 있어서, 한의학, 동양철학, 전통무술(태극권, 택견 등), 침술, 풍수지리 등에서 말하는 기에 대한 개념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수련문화는 우리 한국인의 삶에 깊숙이 스며 있다. 하지만 그동안 기(氣)에 대한 신학적 해명이 거의 전무하였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이 「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과연 성령과 관계지어 생각할 수 있는지, 교회에서 우려하는 점은 무엇인지 하나하나 짚어 보기로 하자.
한국인의 언어문화 속에서 기(氣)라는 단어는 일상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에서 「공기」를 마시고 「기분」이 좋다 나쁘다, 「기색」이 나쁘다, 「기」가 빠졌다, 「기」가 막히다, 「기」가 차다 등 「기」라는 단어가 들어간 문장을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 사전적 의미로 기란 1)활동하는 힘 2)숨쉴 때 나오는 기운이다(표준국어대사전 참조). 곧 존재하는 모든 곳에 있는 생명의 기본 요소가 바로 기이다.
하지만 「기」를 이렇게 정의내리는 것은 성급한 처사이다. 동서양을 가로질러 「기」와 관련된 용어와 개념이 매우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양철학에서 기는 불변하는 이(理)에 대응되는 것으로서 가변적인 물질현상, 만물 생성의 근원이 되는 힘을 의미한다. 요가가 발달한 인도 쪽에서는 프라나(Prana) 곧 우주에너지라고 부르는가 하면 초심리학에서는 「사이」(PSI)라고 부른다. 최근 미국의 뉴에이지 계열에서는 기를 설명하기 위하여 영성(Spirituality)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영성이 「생명의 핵이며 무한 에너지」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한편 일본의 사사키 시게미 박사는 기를 다중, 다층 구조로 형성된 「우주 에너지」로 정의한다. 그는 높은 층의 에너지는 작용력이 신비로워 신(神)에 가깝고 낮은 수준에서는 악마처럼 해를 끼치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기는 물질, 에너지, 정보, 파동, 영혼 등과 관련되는 천차만별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기에 대한 설명이 이토록 다양한 만큼이나 기체험을 매개하는 방법 또한 여러 가지이다. 우리는 이들을 다음의 두 가지로 묶어서 소개할 수 있다.
1)기수련: 기수련은 크게 「몸수련」과 「마음수련」으로 분류할 수 있다.
몸수련은 「기」를 건강을 위한 수련법으로 삼는 운동을 말한다. 여기에는 근래 들어 유행하고 있는 기공, 단전호흡, 국선도 수련 등이 속한다. 이들 주장에 의하면 기수련을 통해서 우리는 몸 안에서 기의 흐름을 막힘이 없이 원활하게 함으로써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한다. 또 기의 축적과 활용 또한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굳이 배속시킨다면 요가도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
마음수련은 몸수련의 연장에서 또는 독립적으로 행해진다. 대부분 건강증진이나 평화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 행해지는 몸수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자아완성 내지 종교적인 구도행위를 지향하는 기수련으로 이어진다.
한편, 이와는 별개의 것으로 처음부터 마음수련에 입문하는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불교의 선(禪), 명상, 그리고 말 그대로 「마음수련」이라는 이름의 수련을 들 수 있다.
-기치료: 기치료는 기의 운용(運用)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기치료사가 환자의 아픈 부위에 막혀있는 기를 소통시켜주는 요법이다. 한국에서는 민간요법을 전수받아 근래에 확산되고 있고, 서구에서는 1975년 미국의 크리거(Dolores Krieger) 교수에 의하여 창안된 「치료적 접촉」(therapeutic touch)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고 있다.
기체험의 피해사례
기체험이 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무분별하게 「기체험」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가 엄청난 부작용에 시달리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직접 들은 사례의 종류만 해도 다음과 같다.
- 명문대학을 다니는 수재가 대순진리회에서 기를 받은 후 우울증에 걸려 자살한 경우.
- 초월명상 등 뉴에이지 서적에 빠져있던 청년이 악성 정신질환자가 된 경우(다수).
- 전통(무속관련) 민요를 직업으로 부르다가 단 1분도 기도에 집중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경우.
- 수도자가 기와 명상에 빠져 환속하거나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경우(다수).
- 기수련(대표적으로 「단월드」)을 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교회를 떠난 경우(다수).
- 기치료 받다가 우울증에 걸린 경우(다수).
- 「마음수련」하다가 정신질환자가 되고 이혼까지 한 경우.
- 미국의 교포 신자들이 「마음수련」에 빠져 집단으로 신앙정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경우.
- 요가에 빠져서 신앙을 잃은 경우.
- 가톨릭 신자였다가 요가 강사가 되어 신자들을 교회로부터 빼 내가는 경우.
이를 종합할 때, 독일인 목사 바실레아 슐링크(Basilea Schlink)의 초월명상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진술은 그대로 「기체험」에도 적용된다고 말할 수 있다.
『밀교의 가르침의 영향으로 감정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하는 청년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데 특별히 초월명상과 같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개인적으로 명상에 빠져들고 구루(guru: 힌두교의 지도자)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어서 감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도착상태가 되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 또한 부부가 모두 명상을 하게 될 경우 이혼율은 특별히 높다. 명상을 할 때의 그 무아지경과 현실로 돌아왔을 때 일상의 스트레스나 욕구불만 사이의 괴리감은 너무 큰 것이어서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기가 불가능하다』(차한, 성경으로 세상보기, 292~293쪽 참조).
우리는 기(氣)라는 것 자체를 부인할 수 없다. 「기」라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는 자연적인 물리현상일 수 있다. 곧 기는 순수한 자연적 에너지 또는 물리적 에너지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지난번에 확인한 바와 같이 소위 「기수련」에 빠진 신자들에게서 심각한 부작용 내지 피해가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는 이를 「플러스 알파」 부작용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플러스 알파’ 부작용
「플러스 알파」란 바로 기치료 또는 기수련의 과정에 개입되는 「제3의 현상」을 말한다. 곧 기를 부리거나 기를 타거나 또는 기를 가장하여 기행세를 하는 제3의 에너지를 말한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제3의 에너지는 성서적인 용어로 「악령」이라고 불리는 것과 관련이 깊은 듯하다. 성서에는 예수님이 악령들린 자와 대적하여 몰아냈던 사례가 숱하게 많이 나온다. 악령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재하는 존재로서, 사람 안에서 사람을 황폐화하고(마태 12, 43~45) 발작을 일으키고(루가 8, 29), 거짓된 기적과 표징과 놀라운 일들을 행할 수 있다(2데살 2, 9)고 기록되어 있다. 여하튼 우리가 말하는 「플러스 알파」의 계보에는 이 악령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플러스 알파」의 개입 가능성은 기치료나 기수련을 매개해주는 사람에 크게 좌우되는 듯이 보인다. 대체적으로 한국에 유포되고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돈벌이 목적으로 상품화 된 것이기에 위험한 것으로 간주해도 된다. 「영험한 능력」이 상품경쟁력인 이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신통력을 끌어들이려 한다. 그 과정에서 「플러스 알파」가 개입될 개연성은 매우 높아지는 것이다.
성서에 의하면 이 「플러스 알파」가 초래하는 결과는 신앙적인 부작용으로도 나타나고 정서적인 부작용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우선, 사도 바울로는 신앙적인 부작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훗날에 사람들이 거짓된 영들의 말을 듣고 악마의 교설에 미혹되어 믿음을 버릴 때가 올 것이라고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1디모 4, 1).
뿐만 아니라 성서는 악령이 사람을 「비참하게」(마태 12, 45)하고 「광야」를 헤매게 하면서(루가 8, 29) 사람을 정서적으로 피폐화 시키는 「거짓말의 아비」요 「살인자」(요한 8, 44)라고 폭로한다.
지면관계로 생략할 수 밖에 없지만 신흥영성(뉴에이지)의 실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방금의 진술은 대부분 사실로 드러난다. 특히 신흥영성에서 가장 비싼 고급상품(500만원 이상)에 속하는 「채널링」이라는 것은 그들의 주장을 빌어 표현하면 「영계의 어떤 영적존재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거짓된 영들」의 장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종합적 식별
필자는 이론과 체험 양면으로 「기수련」 및 「기치료」를 대부분 접해봤다. 개인적인 관심에서도 그랬고 연구의 사명감 때문에도 그랬다. 거두절미하고 결론을 말한다면, 필자는 자연적인 현상으로서의 기(氣)를 인정한다.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에너지로서의 기, 한의학에서 말하는 기, 그리고 자연철학(동양철학)의 기이론 등은 실제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처럼 과학적으로 인정되는 자연적인 기에도 종류(種類)와 질(質)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기의 종류 만해도 기본적으로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에 따라서 열두 가지나 된다. 거기다가 생명의 기운인 생기(生氣)가 있는가 하면 질병의 기운인 사기(邪氣)도 있는 등, 구분하기 나름으로 천차만별인 것이 바로 기이다.
그러므로 「기체험」이라는 것을 하나로 싸잡아서 옳음과 그름, 선함과 악함을 가려낼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히 부작용이라는 것이 있다. 그 부작용의 양상은 기를 매개하거나 기수련을 전수하는 주체의 성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답답한 노릇이지만 사례에 따라 또는 상황에 따라 판별하는 수밖에 없다.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자.
기(氣)는 기다. 부인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이다.
기체험은 기체험이다. 그냥 기체험이다. 기의 종류가 셀 수 없이 많듯이 이 기체험도 셀 수 없이 많다. 그런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좋지 않은 기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좋지 않은 기란 자연과학적인 사기(邪氣)일 수도 있고, 「거짓된 영」의 교묘한 개입일 수도 있다.
성령은 성령이다. 성령은 삼위일체적이기 때문에, 성령을 체험하면 반드시 성부와 성자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되어있다. 성부를 부인하고, 성자를 배척하는 성령은 이 세상에 없다. 하느님을 부정하고, 신자들을 냉담에 빠트리고, 정신질환자가 되게 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성령」은 없다.
『하느님의 성령을 알아보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예수께서 그런 분이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적대자로부터 악령을 받은 것입니다』(1요한 4, 2~3).
성서의 입장은 명료하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루가 20, 25 참조). 바꾸어 말해서 기는 기고 성령은 성령이라는 것이다. 결코 기수련이 가톨릭 영성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종교다원주의의 시대에 이 무슨 고리타분한 이원론(二元論)이냐며 반론을 제기할 「가톨릭신자」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사람에게 반문하고 싶다. 그렇다면 애제자 베드로에게 난데 없이 『사탄아, 물러가라』(마태 16, 23)하셨던 예수님은 이원론적 근본주의자였던가? 대화와 일치운동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성서의 「영의 식별」 요구를 폐기하지 못한다.
이제까지「영의 식별」을 위한 가톨릭적 관점을 알아봤다. 이제 그 연장선상에서 이른바 「채널링」이라는 것에 대한 영의 식별을 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용어의 차이가 있을 뿐 신흥영성운동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이 채널링(channeling) 현상이기 때문이다.
‘귀신’들이 판치는 시대
요즈음 서점가에는 「채널링」을 소개하는 책들이 즐비하고 있다. 채널링은 말 그대로 TV 채널을 돌리듯이 영적 주파수를 맞추어 원하는 영(靈)들과 교신(交信)을 하는 것을 말한다.
채널링을 전파하는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는 특별한 방법을 통하여 영들과 교류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영들에는 크게 두 종류의 영들이 있다.
첫째, 너무 갑작스런 충격을 받아 횡사 내지 객사하거나, 억울한 일로 감당할 수 없는 한을 품고 죽은 영혼들이 있다고 한다. 한국의 민간 통설에서는 이들을 귀신이나 원혼이라 부른다. 이들은 윤회(輪回)의 과정에서 비정상적으로 이탈하여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로서 이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위령제(慰靈祭)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오늘날 잡지물에서 천도제(薦度祭)를 지내준다는 광고를 쉽게 접할 수 있는데, 이들은 우리가 겪는 질병, 우환, 액운 등이 죽은 조상들의 영혼이 천도하지 못한 악영향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얼마 전 모 방송사의 TV특집물에서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속아 넘어가 적어도 몇 백만 원, 많으면 몇 천만 원을 날린 피해자들에 관한 고발이 다뤄진 일도 있다.
둘째, 소위 깨달은 영들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깨달음에 도달하여 장구한 윤회의 굴레를 벗어난 영들이다. 부처처럼 열반(涅槃)의 경지에 도달한 영들이 바로 이런 영들이다.
여기서 채널링은 주로 두 번째에 속하는 영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저들이 채널링을 권장하는 이유는 채널링을 통하여 깨달은 영들을 만남으로써 그 영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깨달은 영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그 깨달음의 경지를 나누어 받을 수 있고 그럼으로써 윤회의 과정을 단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어떤 이들은 이런 채널링이라는 것을 통하여 「우주인」과도 교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은 우주인들이 유전자 조작을 통하여 창조된 존재 곧 우주인의 창조물이라고 한다. 채널링은 저런 우주인의 창조 예지를 나누어 받는 탁월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여하튼 채널링은 대부분 신흥영성운동들의 핵심 프로그램에 속한다. 다소 표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실제적으로는 이 채널링 현상이 그 배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채널링 현상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정리할 수 있다.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이라는 이름으로 밀법전수적(密法傳受的)인 비교(秘敎)를 실행한다.
-심령술(心靈術, Spiritism)이라는 이름 하에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어 대화를 주선한다.
-영매(靈媒, channeler)라는 사람이 물질세계와 영혼세계를 연결시켜 준다며 인생상담, 영적상담을 중개한다.
-채널링을 해주겠다며 환각제를 이용하여 황홀경에 빠지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채널링과 관련된 이런 현상들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당혹스럽게 한다. 이런 주장을 접할 때 우리는 자연스레 묻게 된다. 과연 귀신은 있는가? 원혼이라는 것이 정말 있는가? 또 깨달은 자들이 머무는 영계(靈界)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들과의 교신이 과연 가능한가?
많은 가톨릭 신앙인들은 이런 물음들 앞에 서게 되면 얼른 답변하지 못하고 쭈뼛쭈뼛 망설이며 얼버무리고 만다. 자신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채널링의 정체 - 귀신은 없다
가톨릭 신앙의 공식적인 답변은 간명하다. 『귀신은 없다』는 것이다. 가톨릭의 입장은 분명하다. 귀신은 없고, 원혼도 없고, 깨달은 영들이 별도로 존재하는 영계도 없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자들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죽은 자들은 천국, 연옥, 지옥 중 어딘가에 배속되어 있다. 만일 죽은 자의 영이 이들 셋 가운데 배속되어 있지 않고 구천(九天)을 헤매는 일이 정말 가능하다면 세상은 난리판이 될 것이다. 그 말은 곧 「지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배달사고」 또는 「탈주」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전능(全能)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하느님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시다. 그렇게 허술한 하느님을 누가 하느님이라 인정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제로(0)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느님의 제어권(制御圈) 속에 예속되어 있어야 한다.
성서는 분명히 말한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히브 9, 27). 죽는 것과 심판 받는 일에는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가 17, 23)에서도 부자가 「죽음의 세계」에서 치러야 할 고통을 벗어나고자 애원하지만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는 경종으로 끝난다. (자세한 것은 월간 「참소중한당신」 2004년 4월호 이철수 신부의 글 「구천을 헤매는 죽은 영혼」에 잘 나와 있다)
결론을 내려보자. 가톨릭교회는 귀신, 영매(靈媒), 초령((招靈) 그리고 채널링 등의 이름으로 설명되고 있는 모든 현상들이 사실은 성서적 개념인 「악령」의 장난이라고 본다. 바로 이 악령이 죽은 사람이 나타난 것처럼 귀신 행세를 하는 것이고, 한(恨) 많은 원혼 행세를 하는 것이고, 깨달은 영인 것처럼 속임수를 쓰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명명백백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유일신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곧 잡신들을 믿게 함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이탈시키려는 것이다. 악령은 사람들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수라도 동원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
분명히 알자. 복음의 가르침은 명백하다. 귀신은 없다. 원혼도 없다. 그러므로 채널링은 거짓된 영의 속임수이다. 이에 반대되는 주장은 복음에 대한 훼손이다. 사도 바울로는 준엄하게 말한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가리워졌다면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나 가리워졌을 것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악신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기 때문입니다』(2고린 4, 3~4).
-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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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 신문 신앙상담]
한마디로 귀신은 없어 최면·마귀의 소행일뿐 유일신 하느님 믿어야
<질문>
농촌에 사는 청년입니다. 저희 마을에서는 가끔 귀신과 관련된 소문들이 떠돌곤 합니다. 그중 가장 많은 것이 묘 자리를 잘못 쓴다거나 억울하게 죽은 조상의 영혼이 후손들에게 몹쓸 병을 앓게 한다든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성서에도 악마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요즘 같은 과학시대에 이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답>
한마디로 말한다면 귀신은 없습니다. 즉, 죽은 영혼이 떠돌아다니고 사람들에게 길이나 흉을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모두 천국에 있거나 연옥에 있거나 지옥에 있거나 합니다. 모든 생명은 하느님께서 관장하십니다.
그렇다면 실제 경험으로 죽은 조상이 꿈에 나타나서 어떤 사람에게 지시하고 하는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은 자기 최면 아니면 마귀(악령)의 일입니다. 어떤 일이 꼬이고 풀리지 않는다면 묘자리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악의 일에 동의해서입니다.
예를 들면 낙태 등의 죄를 지었다면 그 죄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꿈에 조상이 나타나 다음날 돈을 벌었다 해도 궁극적으로 축복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마귀가 노리는 것은 유일신에 대한 관념을 없애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마귀는 이 유일신의 관념을 포기하고 다신론을 믿도록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안타까운 것 중의 하나는 이 시대는 마귀의 존재와 역할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악마를 신화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악마의 실재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사탄에 대해서 말하게 되면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기라도 하듯 당황해하고 사탄에 관한 통속적인 형상을 시인하고 과학의 발전을 무시하는 사람으로 보일까봐 두려워합니다.
교리와 설교, 대학교나 신학교에서 하는 신학 강의에서는 흔히 이 주제를 피합니다. 그리고 악마의 존재를 토론하는 모임에서조차 세상에 끼치는 악마의 영향이나 활동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악마는 짐짓 시대에 뒤떨어진 시대착오인 체합니다. 이야말로 악마의 크나큰 교활함입니다』(교회문헌, 은사쇄신과 어둠의 세력, 1장 1항).
-김연준 신부 가톨릭 신문 기사입력일 : 2004-08-29
=========================== [귀신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가톨릭교회는 귀신, 영매(靈媒), 초령((招靈) 그리고 채널링 등의 이름으로 설명되고 있는 모든 현상들이 사실은 성서적 개념인 「악령」의 장난이라고 본다.
바로 이 악령이 죽은 사람이 나타난 것처럼 귀신 행세를 하는 것이고, 한(恨) 많은 원혼 행세를 하는 것이고, 깨달은 영인 것처럼 속임수를 쓰는 것이다.
그 이유(속임수를 쓰는 이유)는 명명백백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유일신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곧 잡신들을 믿게 함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이탈시키려는 것이다. 악령은 사람들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수라도 동원할 수 있는 의지와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분명히 알자. 복음의 가르침은 명백하다. 귀신은 없다.
원혼도 없다. 그러므로 채널링은 거짓된 영의 속임수이다. 이에 반대되는 주장은 [복음에 대한 훼손]이다.
사도 바울로는 준엄하게 말한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가리워졌다면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나 가리워졌을 것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의 악신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기 때문입니다』(2고린 4, 3~4) -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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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 신앙 읽기
송용민 지음
4. 세상 속 사람들
죽음, 그 뒤에는 무엇이 오나?
죽음은 하나의 신비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죽음과 사 후세계에 대한 체험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해 주고 있지만, 모 든 인간은 죽음에 대해 그리고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오는지 궁금해 한다. 그리스도인도 예외는 아니다. 부활을 기대하고 고백하는 신자라도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말 그대로 믿기에 는 뭔가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죽음과 사후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교회의 전통 교리들은 성경과 교 회 교부들의 가르침에 근거한 믿을 교리에 속하지만, 그렇다 고 교리가 곧바로 내게 믿고 납득할 만한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한테 살아 있는 진리가 되려면 그것이 내 삶의 언 어로 재해석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자신의 죽음을 상상해 보자. 대중매체나 책을 통해 우 리에게 각인된 사후 세계는 이렇다. 내가 죽으면 영혼이 육신 에서 이탈된다. 그리고 나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의 모습 을 보고, 내 영혼은 절대자의 심판을 기다린다. 그것이 염라 대왕이든 지옥 사자이든 전통 민간신앙에서 각인시켜 온 죽 음의 과정 말이다. 내가 살아온 행적에 따라서 심판을 받고, 이 세상에서는 상상하지 못한 최상의 천국으로 가거나 불길 이 치솟는 지옥에 떨어질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죄의 보 속을 위한 연옥도 있지만, 연옥이라고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 다. 민간 신앙에서는 원한을 품고 죽으면 저승에 가지 못해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된다고 하지만, 그리스도교에는 그런 귀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 그래도 조상신에 대한 믿음이나 죽 은 영혼들과의 접신, 우리가 볼 수 없는 세상의 또 다른 죽은 자의 도시가 있다는 상상은 다른 형태의 믿음일 뿐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죽음에 대한 상상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죽음은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 이기 이전에, 내 삶의 의미를 종결짓는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사건이자, 새로운 생生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여 기서 새로운 생이란 우리가 믿고 고백하며, 간절히 바라던 하 느님 모습을 '얼굴을 맞대고' 직접 보고 맛보는 새로운 차원 의 생을 말한다. 이것을 그리스도교는 '부활한 삶', '구원의 완성'이자 '영원한 생명(永生)'이라고 부른다. 사심판이나 공 심판, 지옥, 연옥, 천국에 대한 교리는 모두 이처럼 근원적 믿 음을 해석해 주는 언어적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의 궁극 목표는 하느님을 뵙는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직접 만날 수 있는 대 상이 아니기 때문에, 단지 보고 들을 수 있는 표징을 통해서 희미하게 '체험'할 뿐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이제 더는 표징 을 통하지 않고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의 섭리를 명료하게 만 나는 사건이다. 사후 심판도 하느님 앞에 서는 것 자체를 말 한다. 문제는 내가 하느님을 만날 때 어떤 기대와 감사, 찬미 와 영광 속에서 만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토록 간절히 기 대하던 하느님을 직접 뵙는다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극히 복된 (至福) 체험이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천국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도 그분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절대적 나락의 상태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자 관계의 영원한 단절 체험이다. 지옥불에서 타는 영 원한 고통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가톨릭 교리에서 연옥이 존재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하느님 의 자녀이지만, 그분을 직접 마주보는 것이 고통스러울 때 하느님은 우리를 기다려 주신다. 마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죄를 지어 가까이 다가서고 싶지만 스스로 다가설 수 없을 때 나한테 용기를 주고 격려해 주는 이웃의 힘으로 용서와 화해의 체험을 하듯이, 연옥은 하느님을 뵙기에 부족 한 나한테 정화의 필요성을 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일상 안에서 우리가 이러한 영원한 상태의 체 험을 부분적으로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천국처럼 아름다운 체험이 있을 수 있고, 지옥과 같은 생의 고통을 맛볼 수도 있 다. 그리고 가슴 졸이며 용서를 기다리는 연옥의 떨림도 체 험할 수 있다. 단지 이런 체험들이 사후의 심판과 달리 세상 에서는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뿐이다. 종말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은 하느님이 세상 역사와 모든 것을 섭리하신다는 근원적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성 경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모든 종말 이야기도 사실은 하느님 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당신이 우리 개인의 역사와 인류 의 역사를 궁극적으로 완성하신다는 믿음을 다양한 표징을 통해 전달한 것뿐이다. 문제는 죽음 이후가 우리의 체험 범주 를 벗어나기 때문에 시대마다 달라지는 이 표징들의 해석에 따라 그 의미에 대한 이해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 이후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져 있 다. 단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깨닫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죽음보다 더 강한 희망, 부활한 삶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 다는 것이다. 세상의 고통, 부조리, 모순과 절망을 넘어 하느 님께 거는 강한 희망이 죽음을 넘어 우리를 살게 한다는 점이 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필리 2,12)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영광을 이 세상에서 미리 맛보지 못한다면 결코 죽음 이후에도 누릴 수 없다는 경고이기도 하 다. 우리에게는 죽음의 공포와 세상이 상상하는 종말에 대한 호기심에 매달리기보다 하느님 사랑에 열정을 쏟는 일이 더 중요할 듯싶다. 그래서 위령성월은 우리의 공덕이 연옥 영혼 에게 이른다는 믿음과 삶과 죽음이 모두 하느님께 달려 있음 을 고백하는 시기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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